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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로”

등록 2005-12-01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4개월 만에 축구대표팀 ‘사커루’의 컬러를 확 바꿔버린 기적의 사나이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호주 스포츠의 초대형 히트작” 팬들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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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니=권기정 전문위원 kjkwon@hotmail.com

지난 11월17일 오전 시드니 중심부에 위치한 도메인 공원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열혈 축구팬 8천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전날인 16일 시드니 텔스트라 경기장에서 홈경기로 진행된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예선에서 ‘사커루’(오스트레일리아 국가대표팀의 애칭)가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꿈을 이룬 것을 자축하는 축하 행사였다. 16일 경기장을 꽉 메운 8만2천여 관중들 중 일부는 밤새 곳곳에서 파티를 즐기다 아예 이날 아침 도메인 공원에 출근 도장을 찍은 경우도 있고, 승전 소식을 듣고 시드니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뉴캐슬에서 온 사람들까지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축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색상인 ‘그린 & 골드’ 옷을 차려입고 모인 이들은 하루 종일 우루과이와의 경기 하이라이트를 몇 번씩이나 함께 시청하며 역사적인 승리의 감흥에 취해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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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월드컵 족집게 선생!

물론 이날 축하행사에는 점심 때쯤 사커루 선수들과 이번 경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거스 히딩크 감독도 참석했다. 8천 명의 인파가 “사커루”와 “거~스”를 번갈아가며 연호하는 순간, 독일 월드컵에서 사커루가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느냐는 사회자의 물음에 히딩크 감독이 대답하기도 전에 군중들은 “끝까지”(All the way)라고 합창하며 기대와 소망을 드러냈다. 이에 히딩크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끝(결승전)까지는 너무 멀다. 하지만 지금 다들 기분이 좋으니까 오늘은 ‘끝까지’라고 말하자”라고 화답하자 또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거~스” 연호가 터져나왔다.

사실 이날은 히딩크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맺은 대표팀 감독 계약이 끝나는 날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패배했다면 말이다. 히딩크 감독의 계약 조건이 월드컵 본선 진출시에만 자동 연장돼 내년 7월에 임기가 만료되는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행 티켓을 따낸 히딩크 감독은 고향인 네덜란드행 비행기 대신 도메인 공원에서 수천 명의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32년 만에 월드컵 진출이라는 숙원을 달성한 오스트레일리아 축구팬들의 히딩크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온라인에서도 뜨겁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히딩크에게 호주 명예 시민권을” “히딩크를 총리로”(guss hiddink 4 pm), “히딩크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guus no glory) 등을 적어놓은 오스트레일리아 네티즌들의 마음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을 당시 한국인들과 같다.

오스트레일리아 언론들도 연일 승리의 비법을 분석하며 달라진 오스트레일리아 축구를 크게 반기고 있다. 히딩크 감독에게 ‘기적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오스트레일리아 언론들은 “히딩크 감독이 1998년에는 네덜란드를, 2002년에는 한국을 4강에 보냈으니, 2006년에는 사커루를 4강에 보낼 것”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유력지 <시드니모닝 헤럴드>도 “사커루의 승리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캐시 프리맨의 400m 우승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스포츠 사상 최고의 위업”이라며 히딩크 감독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럭비와 크리킷에 밀려 축구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던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축구 관련 기사가 눈에 띄게 많아진 것도 달라진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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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언론들은 특히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사커루 팀 컬러가 180도 바뀐 점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주장 마크 비두카와 슈퍼스타 해리 키웰 등 주전 선수들 대부분이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등 유럽 무대에서 뛰고 있는 관계로 사커루는 개인기는 뛰어나지만 조직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점이 최대 취약점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오스트레일리아 팀을 맡은 지난 4개월 동안 정작 사커루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한 시간은 4주 정도에 불과하지만 입에 단내 나는 고된 훈련 덕에 팀의 조직력은 그만큼 향상됐다. 물론 히딩크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 때문에 일부 선수들은 “너무 힘들다”고 불만을 여러 차례 토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오스트레일리아 언론들은 “예전에는 이름값으로 대표팀에 들어갔지만 이제 대표팀에 자동 선발은 없다. …스타 플레이어 시대는 가고 팀 플레이 시대가 왔다”며 히딩크의 전략을 초대형 히트작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4-4-2 전략만 고집하던 사커루의 트레이드마크를 한 선수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 방식으로 완전히 바꿔놓은 것도 월드컵 족집게 히딩크의 작품이다.

2018년 월드컵 개최 가능성도 높아져

히딩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과 네덜란드에서의 히딩크 열풍도 호주 언론에서는 관심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시드니모닝 헤럴드> 일요일판인 <헤럴드 선>은 11월20일 ‘한국이 호주의 히딩크 감독을 꽉 잡고 있다’(Korean grip on Aussie Gus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히딩크가 호주에서 영웅이 됐으나, 이미 다른 두 국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헤럴드 선>은 “히딩크는 한국에서 예수나 석가모니에 비하는 큰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면서 “그는 한국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고,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뽑히고 있으며, 매년 수만 명의 한국인들이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바르세벨트를 찾고 있다”며 한국인들의 히딩크 사랑이 여전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헤럴드 선>은 “히딩크는 내년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킬 준비를 막 시작했다”며 호주가 한국 못지않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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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커루의 승전 소식은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월드컵 4강에 안착시킨 지 3년 만에 ‘축구 변방’ 오스트레일리아를 국제 무대로 이끌어낸 1등 공신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됐다. 게다가 히딩크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기대, 그리고 사커루의 이번 독일행 결정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축구 붐 조성에 큰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전국 프로축구가 올해부터 현대자동차 오스트레일리아법인이 공식 후원하는 ‘현대 A리그’로 명칭을 변경한 뒤에 순항하고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축구연맹(FFA)이 추진하는 아시아축구연맹(AFC)으로의 편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이 같은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또 내년 1월에 AFC에 가입하는 FFA는 2018년 월드컵 유치 의사까지 밝힌 상황이라 오랜만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불고 있는 축구 열기를 가속화해 축구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류 스포츠로 자리잡는 시기도 앞당겨질 것으로 관측된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최근 월드컵 개최권을 대륙별 순환 방식으로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상태라서, 오스트레일리아의 2018년 월드컵 개최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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