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투쟁 물 건너간 버마-타이 국경에서 17년전의 항쟁은 덧없고…
군사혁명조직이든 난민구호단체든 가릴 것 없이 외세 얻고자 출혈경쟁만
▣ 버마-타이 국경=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누구는 ‘나비의 꿈’이라 했고, 누구는 ‘노곤한 오후’라 했다. 또 누구는 ‘권태’라고도 했다. 또 뭐가 있나? 아무튼 버마 국경전선은 그런 아득한 심정이다.
미군이 개입해서라도 군사정권 뒤엎자?
민주혁명, 민족해방, 반독재 투쟁, 아웅산 수치, 국경전선, 카렌민족연합, 민족민주동맹, 보먀 장군, 민족민주전선, 버마민주동맹…. 원도 한도 없이 불러온 이런 말들은 소리만 다를 뿐 뜻은 하나인 ‘버마식 희망어’였다.
이런 말들을 외치며 지난 17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전선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1988년 8월8일 버마 민주항쟁 17년이 가까워오는 오늘, 국경전선에서 이런 말들을 자신 있게 내뱉는 이들은 거의 없다. 아니다. 말은 있되 뜻은 없다고 해야 옳겠다. ‘민주주의’ 한마디를 가슴속에서 끄집어내면 눈물이 절로 핑 돌던, 그 불같은 의지로 타오르던 명예로운 말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개, 소도 민주주의를 외친다”던 그 시절은 분명 가고 없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가 없어도 ‘혁명’ ‘해방’만 외치면 저절로 힘이 불끈 솟아나던, 그 아름답던 시절은 가고 이제 국경전선에는 패배주의에 물든 환상적 전망만 돌아다니고 있다.
“미군이 개입해서라도 군사정부를 뒤엎어야 한다. 미군이 개입하면 우리도 함께 싸운다. 그 다음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하면 된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흠모의 눈빛으로 바라봐온 버마 국경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처럼 놀라운 말들을 내뱉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외세가 무장 개입하지 않고는 현 버마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많은 혁명조직들이 죽어라고 회의를 하고서도 결론은 이런 수준이다. 정확히 말해, 1995년 1월20일 카렌민족해방군(KNLA) 본부이자 국경 혁명단체들의 해방구였던 마너플라우가 함락된 날부터 혁명은 한물갔다. 명예롭던 무장투쟁도 물건너갔다. 그리고 국경에는 온갖 음흉한 외세들이 몰려들었다. 아니다. 사실은 그전부터도 군사혁명 조직이든 난민구호 단체든 저마다 그 외세를 얻고자 출혈 경쟁을 벌였다. 되돌아보면, 그 혁명 지도자들이 열망한 미군 개입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혁명단체들이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으로부터 온갖 명목으로 돈을 받아왔고, 심지어 국무성과 중앙정보국으로부터도 직·간접적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자 국경전선에 청춘을 바쳤던 전선기자들도 하나둘씩 떠났다. 그렇게 해서 국경 혁명전선이 발표한 성명서는 강아지들 입에 물려 돌아다녔고, 세상 사람들은 버마혁명을 잊어갔다. “응, 버마혁명? 그거 너무 심심해서. 뭐, 새로운 이야깃거리도 없잖아.” 1980년대부터 버마전선을 취재하며 빛나는 기사들을 뽑아내고 수많은 책으로 혁명을 정리했던 베르틸 린트너 같은 기자들마저 국경을 등지고 말았다. 그 많던 기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민주항쟁 17주년이 가까워오지만 국경을 찾는 기자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렇게 국경혁명 전선은 자진해서 자신들의 ‘입’을 막고는 메아리 없는 소리만 지르고 있는 꼴이다. 속절없이 17년 세월이 흘러버린 오늘,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는 국경은 ‘신경질’만 남은 기분이 든다. 정교한 전략이나 전술은 없고 그저 “군사독재 반대”란 말만 앵무새처럼 되뇔 뿐이다. 그런 가운데 국경은 ‘적’과 ‘동지’에 대한 분별력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질환 낌새마저 보이고 있다.
왜소하게 쭈그러든 버마학생민주전선
국경에선 요즘, 오랫동안 버마 민주화 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던 라모스 오르타 동티모르 외무장관이 난타당하고 있다. 두어주 전, 그이가 박제로 변해버린 버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웅산 수치가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 의장직을 버리고 민족 지도자로 나서는 것이 좋겠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를 모델로 삼아”라고 말한 탓이다.
국경에서 인터뷰한 혁명단체 지도자들은 모두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아웅산 수치는 1990년 선거에서 이긴 야당 지도자인데다, 그 자리를 떠나든 말든 사람들은 이미 그를 민족 지도자로 여기고 있어. 라모스 오르타가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없지.” 카레니민족진보당(KNPP) 사무총장 리몬드 투(Rimond Htoo)의 말은 점잖은 편에 속한다.
버마 망명정부에 해당하는 버마연방민족연립정부(NCGUB) 아시아담당장관 산옹(Dr. San Aung)은 “라모스오르타와 샤나나 구스망도 야당 지도자였다. 왜 그이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지껄이는지 알 수 없다. 그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원색적인 용어로 쏘아붙였다.
“라모스 오르타의 말은 돌파구를 마련해보겠다는 애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 결정은 아웅산 수치가 하면 된다. 국경이 그렇게 짜증을 낼 까닭이 없다. 아니면 자신들이 대안을 만들어내든지.” 한때 북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North) 의장을 지냈고, 현재 외신기자로 일하는 옹나잉(Aung Naing)처럼 말했다가는 자칫 ‘맞아죽을’ 분위기다.
17년은 참으로 긴 세월이었던 모양이다. 국경도 사람도 변했다. 한때 1500여명 전사를 이끌고 민주혁명세력 대표로 전선을 달렸던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은 지금 살윈강 기슭 웨지(We Gyi)에 초라한 움막을 짓고 무장투쟁의 대를 잇고 있다. 그이들은 300여명으로 줄어든 왜소한 조직으로 카렌(Karen)과 카레니(Karenni) 지역에 9개 여단을 파견해 전선을 이어가고 있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최근 북부 샨(Shan)과 서부 인도 국경에 새로운 조직을 건설해 체중을 조금 늘리긴 했으나,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치는 실정이다. 그리고 1990년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전선을 떠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전 의장 나잉옹(Dr. Naing Aung)은 전직 중앙위원회 위원 대부분을 이끌고 민주개발네트워크(NDD)란 준정치조직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국경지역 비정부기구(NGO)와 다를 바 없는 활동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전 의장이었던 모에티준(Moe Thee Zun)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변신했다.
운동조직인가, 장사판인가
이처럼 17년이 지난 현재 국경에는 두 가지 또렷한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조직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행’이다. 하여 지금 국경에는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조직이 생겨난다”는 말이 나돌 만큼 심각한 조직 난립 사태를 맞고 있다. 문제는 그 혁명정치 조직들이 시민단체나 비정부기구 흉내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단체들이 혁명을 외치고는 있지만, 실상은 외국 정부나 단체 또는 기업으로부터 돈을 얻어내 난민 지원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생존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국경은 늘어나는 조직만큼 저마다 돈줄 확보에 온 정력을 바칠 수밖에 없는 장사판으로 돌변했다.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기업이나 구호단체로부터 받은 돈으로 혁명을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외국행’ 유행도 국경을 좌절시킨 주범 가운데 하나다. 수많은 혁명 지도자들이 동지들의 주검을 전선에 버려놓고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지도자들이 “더 배워서 조국혁명에!”라는 엄숙한 말을 남기고 떠나자, 전사들 사이엔 “더 벌어서 조국혁명에!”라는 환상적인 구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더 배워서 조국 혁명전선으로 돌아온 이들도, 또 더 벌어서 조국 혁명전선에 기부한 이들도 본 적이 없다.
버마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은 그렇게 고단한 길을 가고 있다. 전선에서 ‘먼저 죽은 놈’만 억울한 기분이 들 만큼 무기력한 길을 가고 있다. 그사이 더욱 강고해진 ‘적’ 버마 군사정부는 민주화 일정이라는 로드맵을 내걸고 영구 집권 기획을 현실로 옮겨가고 있다.
전망 없는 국경, 길 잃은 국경혁명은 장맛비에 젖어 눅눅한 17년 추억만 떠올리고 있다. 분명한 건 18주년이 되는 내년 이맘때쯤이면 국경이 원하든 원치 않든 버마 내부는 변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국경은 그 변화에 대한 준비 없이, 그날도 또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군사독재 타도”만 외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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