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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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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세 목소리의 절규

등록 2005-07-13 00:00 수정 2020-05-02 04:24

저마다의 아픔으로 전쟁의 상흔을 호소하는 알바니아·세르비아인과 소수민족들…그곳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였고 모두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이었네

▣ 코소보 프리슈티나=글·사진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곳에서는 세개의 목소리가 들렸고, 세 목소리의 절규가 터져나왔다.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도, 세르비아인도, 소수민족들도 저마다의 아픔으로 전쟁의 상흔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승리의 찬가를 부르지는 못했다. ‘아직’ 코소보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였다. 모두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이었다.

빈집과 묘지, 그리고 흉흉한 소문

“땅땅땅땅!”
7월3일 저녁, 코소보의 중심도시 프리슈티나에 도착했다. 발칸의 하늘은 음울했다. 프리슈티나의 해외 공관들이 모인 드라고단 언덕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적막했다. 음울한 하늘 멀리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가 들려도 아이들은 태연했다. 공을 차고 웃음을 지었다. 마을에는 빈집이 많았다. 빈집들 옆에는 묘지가 있었다. 묘지에는 전쟁 희생자의 비석이 서 있었다. 흉흉한 소문도 들렸다. 하루 전에 프리슈티나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해가 저물자 이슬람 사원에서 독경 소리가 흘러나왔다. 독경 소리는 흐느낌처럼 음울한 하늘을 떠다녔다. 코소보는 그렇게 전쟁의 흉터를 드러내고 있었다.

7월4일 오전, 프리슈티나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 가까이를 달려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그 도시는 두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페야 혹은 페치. 세르비아어로 페치로 불렸고, 알바니아어로 페야로 부른다. 1999년 4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코소보 공습 당시 집중 폭격을 당했던 도시다.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갈등도 심했던 곳이다. 1998년부터 세르비아 군인과 민병대의 공격이 심해지자 알바니아인들은 난민으로 이웃나라를 떠돌았다. 코소보 내전의 첫 번째 피해자는 알바니아인들이었다.

당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등으로 떠나간 난민이 무려 60만명이었다. 알바니아 난민들은 코소보 공습으로 세르비아 군인들이 철수하자 코소보로 돌아왔다. 알바니아인들이 돌아오자 세르비아인들이 떠났다. 역시 10만명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떠났다.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코소보 내전의 두 번째 피해자는 세르비아인들이었다. 아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모두에게 전쟁의 상처만 남았다. 난민생활 5년을 넘긴 2004년 9월, 세르비아인들은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60가구 중 49가구가 돌아왔다. 그나마 국제이주기구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귀환이었다. 나머지는 아직도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이날 오후 귀환한 세르비아인들의 마을을 찾아갔다. 국제이주기구(IOM) 프리슈티나 사무소가 운영하는 정착촌이다. 시가(Siga) 마을은 세르비아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산으로 둘러쳐진 마을에 집들은 무너졌고, 인적은 드물었다. 그나마 허물어진 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다시 지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국제이주기구는 무너진 옛집을 복원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파괴의 정도에 따라 최고 1200유로까지 지원한다. 나토 공습은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시가 마을에서만 두명이 폭격에 목숨을 잃었다.

“1999년 6월24일”
일흔다섯의 촌로는 고향을 떠난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시가 마을의 촌장인 자소비치 할아버지는 폭격당한 집을 자기 손으로 다시 지었다. 낡은 벽돌 위에 선명히 구분되는 새 벽돌로 얹은 지붕은 무너진 흔적을 증언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베오그라드의 난민촌에서 살다가 지난해 9월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는 시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8대째 300년 동안 시가에 살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아직도 타향을 떠돌고 있다. 큰아들은 몬테네그로, 작은 아들은 세르비아에 흩어져 있다. 시가 마을에는 노인과 아이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젊은 세르비아인에게 알바니아인이 압도적 다수인 코소보는 여전히 위험하고 희망 없는 땅이다. 코소보를 탈출한 세르비아인 중에서 재산이 넉넉하고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코소보로 돌아오지 않는다. 세르비아에 정착하거나 다른 나라로 떠난다. 정말 갈 곳 없는 사람들만이 코소보로 돌아온다.

알바니아 기자들을 만나다

전쟁은 이웃을 갈라놓았다. 시가 마을의 드자브리치(75) 할머니는 “전쟁 전에는 이웃마을의 알바니아인 친구 집에 가서 생일축하 파티를 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돌아온 뒤에는 알바니아인 친구 중 단 한명만 찾아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 돌아왔을 때는 알바니아인들이 몰려와서 왜 돌아왔느냐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직 시가 마을의 세르비아인 중 알바니아인에게 공격당한 사람은 없다. 국제이주기구 프리슈티나 지부의 베킴 홍보담당관은 “만약 누군가 폭행을 당한다면 불안한 평화마저 깨어지고, 세르비아인들은 시가 마을을 떠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렇다고 코소보 출신 세르비아인을 세르비아 정부가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세르비아 정부에 코소보 난민은 ‘짐’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서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세르비아인들은 친척들과 함께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미노드리그 가족은 대여섯명의 사촌 가족들이 한꺼번에 시가 마을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변의 불안에 생계 위협까지 겹쳤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만 자급자족 수준”이라며 “생계 대책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그래도 마을 앞에 다시 짓고 있는 학교 건물은 희망을 상징한다. 가을에는 세르비아인 아이들을 모아 새 학기를 시작할 계획이다. 아직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통합 교육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도 이 마을은 ‘귀환촌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이날 오후 다시 프리슈티나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알바니아 기자 4명을 만났다. 알바니아 기자들은 입을 모아 세르비아인의 폭정을 고발하고 코소보의 독립을 주장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베하르 조가니 기자는 “나토 공습으로 세르비아군이 쫓겨가면서 코소보의 전기를 끊고, 주소지마저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며 “만약 당신의 눈앞에서 당신의 가족이 살해당하고 집이 불타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알바니아인은 코소보 내전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90년대 들어 밀로셰비치가 집권하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부추겼고, 코소보의 다수 인종이었던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으로 큰 희생을 치렀다. 최소한 옛 유고연방에서 알바니아인들은 이라크의 쿠르드족처럼 ‘희생자’였던 셈이다. 물론 알바니아계로 구성된 코소보 해방군(KLL)이 조직돼 반격에 나섰지만 세르비아군의 물리력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지난 1998년 코소보의 작은 마을에서 알바니아인 15명이 세르비아인에 의해 학살당한 사진이 국제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알바니아인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형성됐다. 그리고 나토의 공습이 시작됐다. 내전 당시 코소보에서 활동했던 유엔 관계자도 “알바니아 난민들과 함께 코소보에 다시 들어올 때 공기 속에 주검 썩는 냄새가 가득하고, 거리에는 차가 뒤집히고, 길가의 집들은 불타고 있었다”며 “알바니아인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집단 분노는 이유 있는 분노였다”고 말했다. 그는 “예컨대 작은 마을에 돌아왔을 때 40채의 집 중 30채는 불타고 없었는데 나머지 10채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잘 살고 있었고, 내 집의 텔레비전이 옆집으로 버젓이 옮겨져 있었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알바니아 기자들은 코소보의 독립만이 발칸반도 평화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라디오 텔레비전 오브 코소보>(Radio Television of KOSOVO) 베톤 루고바 기자는 “현재도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일부가 절대 아니다”라며 “코소보는 현재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C)의 관할하에 있고, 화폐단위도 세르비아와 달리 유로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코소보 독립 염원에는 알바니아인의 슬픈 역사가 녹아 있다. 알바니아인은 지난 100년 동안 알바니아인의 운명이 알바니아인에 의해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알바니아인은 1912년 런던협정에 따라 알바니아 독립국, 옛 유고연방 등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현재도 알바니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지에 나뉘어져 살고 있다.

난민에도 계급이 있다

루고바 기자에게 이날 오전에 만난 세르비아 귀환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루고바는 자소비치 할아버지의 사연도 의심했다. 자신이 페야 출신이라고 밝힌 그는 “내 사촌들이 오래전부터 세르비아 정교회에 다녔는데 당시 교회에 나오는 세르비아인은 단 세 가족밖에 없었다”며 “페야 인근에서 3대째 살아왔다는 세르비아인의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세르비아인이 90년대 세르비아 정부의 정책에 따라 코소보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 가족의 사연을 놓고도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주장은 엇갈린다. 루고바는 2일 일어난 폭탄사고도 세르비아계의 소행으로 의심했다. 4일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코소보의 프리슈티나를 방문하는 것에 맞추어 일어난 ‘경고성 테러’라는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나토가 코소보를 공습할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코소보에서 클린턴과 함께 인기가 좋다. 루고바는 “주요 인물들이 방문할 때마다 경고성 테러가 터진다”고 주장했다.

알바니아인은 나토군의 코소보 공습 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코소보의 패권을 장악했다. 코소보 공습 전 알바니아인은 코소보 인구의 80% 이상, 공습 뒤에는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전히 코소보의 일부는 세르비아인이 장악하고 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집단 거주촌이 맞서고 있는 코소보의 미트로비차에서는 2004년 3월 알바니아인 소년 4명이 세르비아인 소년들에게 쫓기다가 그 중 3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살아남은 1명의 증언은 언론을 타고 코소보 전역에 알려졌다. 알바니아인들의 분노는 들끓었고,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 세르비아인들이 숨지고, 유엔까지 공격당했다. 사태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나토군이 증강되면서 소요는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코소보에서 인종간 힘의 역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코소보에는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전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토의 코소보 공습 전에 코소보 인구의 10%를 차지했던 로마(흔히 집시로 알려진 유랑민족) 등 소수민족도 있다. 전쟁의 파편은 소수민족을 비켜가지 않았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충돌로 코소보의 인종주의가 극심해지면서 소수민족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코소보 공습 이전에 다수인 알바니아계를 견제하기 위해 세르비아에 이용당했던 소수민족들은 코소보 공습 이후에는 알바니아인들에게 박대당하고 있다.

7월5일 오후, 유엔고등판무관실(UNHCR) 프리슈티나 사무소가 운영하는 코소보 최후의 난민촌을 방문했다. 아조티쿠 지역의 플레메티나 캠프에는 로마, 아슈칼리 등 유랑하는 소수민들이 모여 있다. 유엔고등판무관실 프리슈티나 사무소가 운영하던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난민촌은 이미 문을 닫았지만, 소수민의 캠프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가난한 소수민들에게는 세르비아인들처럼 돌아갈 집도, 농사지을 땅도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심지어’ 난민에게도 계급은 있다. 소수민은 코소보 내전으로 강화된 인종주의의 최후 피해자처럼 보였다.

“유엔조차 공정하게 일하지 않는다.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만 도와주고 있다.”

플레메니타의 난민 대표인 베리샤는 불만부터 터뜨렸다. 베리샤는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가 난민들에게 정착촌을 지어줄 것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했다. 그는 난민촌 방문 전날인 7월4일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의 차관을 만나 최소한 난민촌 이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단식농성을 풀었다. 난민촌에 들어서자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난민촌 앞의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냄새였다. 난민촌 오른쪽에는 발전소에서 쓰는 석탄 더미가 쌓여 있었고, 왼쪽에는 철로가 바짝 붙어 있었다. 난민촌 이전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엔고등판무관실도 열악한 난민촌의 환경을 이해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기찻길 옆 난민촌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남성들은 무기력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여성들은 묵묵히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복도에는 오물이 널브러져 있었고, 복도 바로 안의 방에서는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전쟁으로 부상을 당한 여성도 있었다. 로마인 말리지 제네리는 폭격으로 다리를 잃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였다.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서 벌어진 ‘그들만의 전쟁’이었지만, 폭격은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만 덮치지 않았다.

아직 이웃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한 유랑민도 있다. 7월7일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스코피시에는 아직 2500명의 코소보 출신 유랑민들이 남아 있다. 스코피의 토파나에 위치한 유랑민 집중지역에는 코소보 출신 유랑민 난민의 70%가 살고 있었다. 마케도니아로 피난왔던 알바니아인들은 대부분 코소보로 돌아갔지만, 유랑민의 상당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유랑민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는 “전쟁은 로마에게 재앙이었다”고 돌이켰다. 다시 한번, 전쟁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낮은 목소리의 절규만이 코소보의 대지를 떠돌고 있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의 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2006년에 운명이 결정된다

코소보는 독립할 것인가, 자치정부로 남을 것인가



코소보의 인구는 250만명으로 추정된다. 1999년 코소보 공습 전에는 알바니아계가 80%, 세르비아계가 10%, 소수민족이 10%를 차지했다. 소수민족은 유랑민족, 터키인 등으로 구성된다. 소수민족은 다시 로마(인도 북부 출신으로 추정), 아슈칼리(알바니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유랑민) 등으로 나뉜다. 나토군의 공습 뒤에는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지로 탈출하면서 알바니아계가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코소보 내전은 세르비아군(세르비아 정규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과 코소보 민족해방군(KLL알바니아계) 사이에 벌어졌다. 두 민족의 충돌은 98년 말 세르비아 정부의 알바니아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격심해졌다. 99년 3월 말 나토 공습이 시작됐고, 3개월 만인 99년 6월 세르비아군이 퇴각했다. 현재는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C)가 사법권을 담당하고 있고, 그 밖의 행정부 기능은 코소보 자치정부가 담당하고 있다. 코소보 자치정부는 알바니아계가 장악하고 있다. 코소보는 아직 국제법상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일부지만 사실상 독립국가로 운영되는 상태다. 2006년 초, 코소보가 독립할지, 자치정부로 남을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상상을 뛰어넘는 친미주의

중심가에서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 간선도로 이름은 ‘클린턴 블리바드’

“뉴욕~ 뉴욕~”
7월4일 코소보 프리슈티나의 중심가에서는 귀에 익은 팝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1천여명의 군중들이 콘서트 무대를 보며 몸을 흔들었다. 7월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이 콘서트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가수들은 <뉴욕 뉴욕>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을 상징하는 노래를 잇따라 불렀다. 이날 콘서트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부 장관도 참석했다. 콘서트 사회자는 “마이 투비 러브드 아메리카”를 외쳤다.
프리슈티나 중심가를 관통하는 간선도로의 이름은 ‘클린턴 블리바드’다. 코소보인들에게 미국은 꿈의 나라고, 클린턴은 국민의 우상이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 당시 나토군의 코소보 공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한 나토군의 폭격은 세르비아 군인들을 코소보에서 몰아내고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에게 ‘해방’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수백년에 걸친 코소보인들의 설움의 세월을 끝내준 은인이자 세르비아 적군을 물리쳐준 해방군이다. 알바니아인들의 ‘미국 사랑’은 코소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알바니아에서도 ‘아메리카’는 꿈의 나라다. 알바니아 공산당을 잇는 알바니아 사회당조차 선거 유세에서 성조기를 걸어놓을 만큼 알바니아인들의 ‘친미주의’는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들의 친미주의는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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