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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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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에 정신 번쩍 든 영국

등록 2005-03-29 00:00 수정 2020-05-02 04:24

지구 온난화와 개도국 지원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구조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가

▣ 런던= 글 · 사진 줄리언 체인 전문위원 joimsook@hotmail.com

인도양 해안을 강타한 쓰나미는 2주 이상 영국의 뉴스 프로그램에 계속 톱으로 나갔고, 지금도 복구현장이나 지원문제 등은 텔레비전 뉴스의 주요 관심사다.

처음에는 피해자가 몇만명 정도로 발표됐고, 영국 정부는 애초 제스처에 불과한 몇 백만파운드를 제공했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인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기부하기 시작했고, 불과 며칠 만에 기부금은 정부의 지원금을 훨씬 넘어서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인들은 동네가게, 종교단체, 자선단체, 마을센터에 돈과 구호품을 들고 몰려들었고, 전화 모금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영국 정부는 사람들이 보인 뜻밖의 열기에 놀라 지원 액수를 늘려 발표했으나, 국민들의 기부금은 이미 1억파운드를 넘어선 상태였다. 영국인들의 기부는 그 뒤로도 이어져 이제 3억5천만파운드(약 6600억원)를 넘어섰다. 상대적으로 영국 정부의 원조는 더 초라하게 보였고, 이 미증유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휴가를 취소하지 않고 안이한 대응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온난화, 미국 양보 얻어내는 데 실패

쓰나미의 충격은 앞으로 다가올 총선이라든가 다른 대형 사건들로 인해 잊혀질지도 모르나 두 가지 점에서 장기적·정치적 결과를 낳고 있다. 하나는 자연재해에 대한 관심, 즉 지구 온난화 문제를 새삼 부각시켰고, 다른 하나는 개발도상국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높인 것이다. 쓰나미가 특히 영국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두 가지 정치적 이벤트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올해 서방 선진국 정상회담인 G7·G8의 의장을 맡고 있으며, 올 하반기에는 유럽연합의 의장을 맡게 되어 있다. 이 리더십의 책무상 블레어 총리와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지구 온난화와 개발도상국, 특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원을 현안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터진 쓰나미는 지구 온난화 등 자연재해와 가난한 나라의 지원 문제를 모두 함축하고 있었다.

영국 매체가 보여준 쓰나미는 말 그대로 자연이 일으킨 9·11 테러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의 언론매체들은 이미 영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홍수와 더불어 슈퍼 화산폭발, 해일, 행성 충돌, 대형 지진 등에 대해 다시 큰 관심을 보이고 이에 대한 각종 시나리오와 과학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고 있다. 마침 우연의 일치로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영국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지구 온난화의 진행 과정이 과소평가됐으며, 이산화탄소의 방출량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다고 경고한 터였다. 또 과학자들은 쓰나미의 비극은 지구 온난화가 발전할 경우 예상되는 재난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교토협약은 이미 효력을 발휘하고 있고, 토니 블레어로서는 G7·G8 의장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어떤 형식이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현안이다. 그는 이라크전에서 미국에 협력하는 대신 지구 온난화 문제에서 국가 이기주의를 고수하는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겠다고 공언했으나, 결국 요지부동의 미국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함으로써 조롱만 사게 되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영국이 이 문제에 리더십을 발휘할 자격을 갖추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영국은 유럽위원회에서 정한 이산화산소 방출량의 목표치를 두배나 초과했기 때문이다. 교토협약이 말잔치에 그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산화탄소 방출량의 규제 대상인 기업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특히 문제가 되는 항공산업계는 포함돼 있지도 않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해 경제성장과 해외여행 제한을 감수할 나라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국민들이 빈국 원조에 나선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 이슈에 견주면 가난한 나라의 원조에 대한 블레어와 브라운 재무장관은 훨씬 전향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영국은 70개 개발도상국에 건강, 교육 혹은 복지 프로그램에 쓴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진 채무의 10% 정도의 돈을 원조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브라운은 제3세계에 뉴 마셜플랜을 제안했고, 블레어는 아프리카인들로 주로 구성된 ‘아프리카를 위한 위원회’를 두어 실질적인 개발정책을 수립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영국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채무 탕감을 주장했고, 특히 쓰나미에 강타당한 나라들의 채무 상환을 유예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장 이런 제안이 벽에 부닥치고 있다.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이다. 미국은 영국이 개발도상국을 위한 대출금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금고에서 잠자는 금을 이용하자는 제안에 반대했으며, 신보수주의자의 수장 격인 폴 울포위츠를 세계은행 총재에 지명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을 돕는 문제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쓰나미 희생을 돕기 위해 영국 국민들이 보여준 열정은 영국의 원조 정책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채널 4 뉴스>는 전화 인터뷰 응답자의 99%인 절대 다수가 국내총생산(GDP)의 0.7%를 원조금으로 즉각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유엔안에 찬성했다. 영국 국민들은 세계정치 무대에서 개발도상국 문제를 적극적으로 선도하고 있는 셈이다. 쓰나미를 계기로 원래 원조 예산을 줄이자고 주장했던 보수당조차 이를 철회하고 노동당안과 같은 수준의 원조액을 제안했다.

이미 아프리카 난민, 에이즈 구호 등 가난한 나라를 돕는 문제에 많은 연예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번 쓰나미 재해 구호를 위해 봅 캘도프, U2의 보노와 같은 음악인 그리고 코미디언 등 연예인들은 ‘라이브 에이드’(Live Aid)나 ‘코믹 릴리프’(Comic Relief) 같은 대형 이벤트를 열었다. 또 개발도상국 농민에게 적정한 가격을 보장해주는 대안무역 시장은 영국에서 계속 약진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유명 정치인인 클레어 쇼트의 지원에 힘입어 정부 개발부의 위상을 높였으며, 노동당은 원조에 정책 비중을 더 높게 두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원조 프로그램은 비정부기구(NGO)들의 환영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옥스팜’이나 ‘크리스찬 에이드’는 실제로 원조액의 20%만이 수혜자들에게 지원되며, 대부분 원조공여국의 상품을 산다는 조건을 달고 제공되기 때문에 전체 원조액의 40%가 원조공여국으로 돌아가는 현실을 지적한다. 또 높은 원조이자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옥스팜, 크리스찬 에이드, 캐포드 등의 원조정책에 비판적 민간단체들은 단순한 자선차원을 넘어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즉 채무탕감, 무기판매, IMF 구조 조정정책, EU의 농업보조금, 관세장벽 그리고 세계화 등에 대한 캠페인을 펼쳐왔다. 시민운동가들은 특히 유럽연합이 현재의 개발도상국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무역관행을 지적한다.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경작된 농산물을 싼 값에 아프리카에 팔아 아프리카 농업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안 해줄 것인가

지난해 10월 런던대학의 한 세미나에서 남아프리카에서 온 개발분야 활동가인 로리 나탄은 블레어 총리가 아프라카를 위해 할 일은 “무엇을 해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안할 것인가”라며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아프리카 농업을 파괴하는 무역행위을 중단할 것, 둘째 아프리카의 끝없는 분쟁을 부추기는 독재자들의 민중학살도구인 무기판매를 하지말 것, 셋째 IMF를 통한 구조조정정책을 강요하지 말 것을 지적했다.

어쨌든 가난한 나라의 고통을 함께 하려는 대중들의 열의가 뜨거워진다면 직접적 도움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 구조변혁까지 추동해 낼 힘이 될 수도 있다. 쓰나미 재해 구호를 위해 대중들이 모은 돈은 적지않으나, 영국의 전체 국부에 견주면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쓰나미 재해 문제에 힘입어 개발문제는 정치적 아젠다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민간단체의 캠페인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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