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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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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의 친구들에게 바친다

등록 2005-03-09 00:00 수정 2020-05-02 04:24

[쓰나미, 그 뒤]

유고 출신 사진기자의 앵글에 담긴 반다아체… 쓰나미에 영혼을 할퀸 이들의 기록

▣ 반다아체=글 ·사진 보이슬라브 밀라디노비치(Vojislav Miladinovic)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밀라디노비치는 난민으로 덴마크에 이주한 뒤 16살 때부터 사진기자로 나서 세계 곳곳의 분쟁과 재난을 비롯해 정치 분야를 취재해왔다. 그리고 1980년대 초부터 방콕을 베이스로 삼아 아시아 취재에 집중해온 보야는 현재 현장을 뛰는 사진기자 가운데 고참으로 꼽힌다. ‘시그마’ ‘감마’를 비롯한 여러 포토에이전시에서 일해왔던 그는 현재 ‘시파’를 통해 국제 언론사들에 사진을 제공하고 있다.



<아체의 비극을 처음으로 전하다>

무할람 M. 누르(Muharram M. Nur·40·반다아체 현지 기자· 통신원)



“판지, 판지, 거대한 판지(물)가 몰려온다.” 자카르타지국과 연결된 무선 전화기를 켠 채 사진을 찍고 있던 아체 현지 기자 무할람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당시 오토바이를 전속력으로 몰아 도망치던 동장이었다. 그리고 무할람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2004년 12월26일 8시10분, 지진이 강타한 반다아체(Banda Aceh) 상황을 전송한 무할람은 반다아체 형무소로 달려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8시20분, 지국은 무할람을 불렀지만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이가 일을 좇아 집을 나선 뒤, 불안에 떨고 있던 아내 마이샤라(Maisyarah Nur)의 품에 안긴 두 딸도 쓰나미가 데려가버렸다. 그리고 쓰나미에 쓸려갔던 마이샤라는 하루 뒤, 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됐다. 그로부터 마이샤라는 5주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족과 집을 모두 잃어버린 마이샤라는 반다아체에서 남동쪽으로 300km 떨어진 동생 집으로 떠났다. 그렇게 아체의 비극을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전한 무할람은 기자로서 직업적 의무를 다하고 떠났다. 그이가 떠난 뒤, 세상은 아체를 알게 되었다. 그이는 명예롭게 갔다.
< “춧, 너 지금 꿈꾸는 거니?” >
춧 누라시킨(Cut Nurasyikin·50·자유아체운동가·라자와리 호텔 경영자)

춧은 세 아이를 남겨두고 떠났다. 아체에서 손꼽히는 부자 가문에서 태어난 춧은 라자와리 호텔 경영자로 또 여성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지난 2003년 계엄령과 함께 형무소에 처박혔다. 1999년 11월9일 아체국민투표정보센터(SIRA)가 주최한 모임에서 연설을 했다는 죄였다. 춧은 “국민투표는 아체 분쟁의 해결을 위해 아체인 모두가 바라는 것”이라며 반역죄를 부정했지만 11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리고 지진과 쓰나미가 몰아닥치기 이틀 전인 12월24일 그는 형무소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아체가 자유를 되찾게 될 거야! 수많은 외국인들이 몰려와서 아체를 지원할 거고….” 전화를 받은 친구는 그에게 되물었다. “춧, 너 지금 꿈꾸는 거니?” 춧은 “형무소에 앉아 있으면 미래를 꿈꿀 권리가 있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틀 뒤 지진과 쓰나미가 덮쳤고, 아체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구호사업을 벌이고 있다. 춧이 말한 그 ‘자유’는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아체 사람들 사이에 그녀는 ‘여장부’로 불리기 시작했다. 춧은 12월26일 반다아체 형무소에서 사라진 수많은 아체 독립 투쟁가들 가운데 한명이다.

<쓸려간 뒤, 다시 일어서다>

아마드 자밀(Ahmad M. Jamil·52·어물전)



지난 10년 동안 람푸루의 어부들로부터 고기를 사다 반다아체 생선시장에서 팔아온 아마드는 장사 수완이 있어 시내의 한 모퉁이 경찰서 부근에다 카페까지 차려 쏠쏠한 재미를 봐왔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 7명을 데리고 잘 살고 있던 아마드는 12월26일 아침, 땅이 흔들린 뒤 뭍으로 밀려나온 고기들을 건지며 신기하다고 떠들어대는 동네 사람들을 쫓아 바닷가로 나섰다. 그리고 아마드는 이내 밀어닥친 쓰나미에 쓸려 떠내려갔다. 그날 오후 아마드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야 쿠알라(Siyah Kuala) 바닷가에서 6km쯤 떨어진 다루살룸 지역의 한 모스크 벽에서 온몸이 할퀸 채 경찰에 구조됐다. 목숨을 건진 아마드는 가족을 찾아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5일 만에 그는 난민촌에서 21살 먹은 맏딸과 초등학생인 아들 둘을 찾아냈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 넷을 쓰나미에 잃었음에도 아마드는 다시 일어나 무너진 어물전과 집을 복구한 뒤, 시야 쿠알라로 되돌아가 바닷가에서 살겠다고 한다. “어디 살든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고, 사람이 자연을 피할 수는 없단 말이지.”

<1천여명의 아이들은 어디로?>

바이툴라만 모스크(Baiturrahman Mosque)



120년 묵은 바이툴라만 모스크는 반다아체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다. 그곳에는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경전학교’가 열렸고, 7~14살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들이 모여들었다. 150여명 선생들은 어림잡아 1천여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속삭이며 가르치곤 했던 곳이다. 그러나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2월10일 현재 60여명 선생들과 50여명 아이들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쓰나미는 성스러운 모스크도 예외 없이 휩쓸어버렸다. 경전 선생이었던 라마와티 달(Rahmawati Dar·24)과 아이들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경전 선생이었던 누르마야티(Nurmayati·35)와 그의 왼쪽에 있는 라카(7)도 사라져버렸다.

<“할머니, 우리들은 무사해요”>

라덴마 아카 안네(Radenma aka Anne·80·야채전)



반다아체에서 20km 떨어진 혹 라메(Chok Lame) 마을에서 자신과 동네 사람들이 키운 나물을 반다아체 중심지인 파사르 라자(Pasar Raja) 시장에서 팔아온 라덴마 할머니는 12월26일 7시57분 지진에 이어 20분 만에 몰아닥친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온몸이 찢기고 다리가 부러진 채 구조된 그이는 현재 반다아체에서 400km 떨어진 란크사(Lanksa)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10년 전 남편이 먼저 떠나간 뒤 자식 다섯과 손녀, 손자 20명과 함께 살아온 라덴마 할머니는 “빨리 나아서 채소가게로 돌아가야 하는데…”라며 20년 동안 지켜온 그 채소전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가족들이 전한다.







<죽어서도 ‘국가기밀’>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경찰기동타격대



지난 2003년 5월부터 계엄군사작전지역으로 선포된 아체 전역은 인도네시아 정부군으로 뒤덮여왔다. 12월26일 쓰나미는 인도네시아 정부군(TNI)을 비롯한 경찰기동타격대(Brimob)도 예외 없이 타격했다. 특히 반다아체의 경찰기동타격대 본부는 완파당했다. 경찰과 장비 모두 휩쓸려갔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정부군과 경찰 사망 숫자를 밝힌 적이 없다. 군인과 경찰은 죽어서도 ‘국가기밀’로 취급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수천명에서 2만여명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누구도 정확한 숫자를 아는 이가 없다. 이 사진에 찍혔던 이들 소식도 알 길이 없다.

<해변에서의 대규모 파티, 그 뒤…>

군대와 경찰 부근으로 모여들었던 아가씨들



지난 1999년 독재자 수하르토가 쫓겨나고 2000년까지만 해도 이슬람단체들과 자유아체운동(GAM)이 술과 매매춘을 공격한 탓에 반다아체에서는 ‘아가씨’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한동안 사내들에게 유명했던 쿠알라 트리파 호텔 지하도 폐쇄됐다.
그러나 2001년 인도네시아 정부가 다시 대규모 군대를 아체에 파견하면서부터 ‘아가씨’들이 군대와 경찰 부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체에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다만, 적어도 100여명에 이르는 이들이 쓰나미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일요일이던 12월26일, 전날 밤 치안 관련자들이 해변에서 대규모 파티를 벌였고 그 수만큼 많았던 ‘아가씨’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니. 사진 속에 담긴 이 아가씨들 소식도 들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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