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 그 뒤]
<font color="darkblue">구호기금으로 해변에 고급스런 관광리조트 단지 세우려는 정부 계획으로 이재민들은 더욱 소외되고…</font>
▣ 콜롬보= 수마두 위라와르네(Sumadhu Weerawarne)/ <아일랜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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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계속된다. 살인적인 파도를 피해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쓰나미 이후의 삶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헛되이 일상의 흔적을 찾는다. 100만여명에 이르는 지진해일 피해자 대부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계속되는 무기력감뿐이다. 정부와 시민단체를 통해 수억달러의 구호자금이 밀려들고 있다. 쓰나미 피해자들에게 쏟아진 동정과 구호의 손길은 가히 전례가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재민들은 여전히 임시 거처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들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자신들과 같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100만여명에 이른다는 사실뿐이다.
공무원에 숨죽인 이재민 캠프
스리랑카 동부 해안가 카라이티부 해변에서 한 남자가 흐느끼고 있다. 한때 그의 곁에 있던 것들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지 꼭 두달이 된 지난 2월26일, 그의 주변엔 무너진 건물 잔해와 여기저기 나뒹구는 벽돌더미, 찢어진 옷가지가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흐느끼던 남자가 부인과 딸아이의 주검을 찾아내던 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난폭한 지진해일은 망자의 옷마저 벗겨내버렸다. 몸을 감싸줄 옷가지도 없었던 그는 부인과 딸을 알몸인 채로 묻어야 했다. 쓰나미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껏 그는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고기잡이를 나설 배도, 피곤한 몸을 쉴 만한 집도 그에겐 없다.
남부 해안가 탄갈라 마을. 쓰나미로 보금자리를 잃은 한 중산층 여교사(67)가 막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있다. 지진해일이 살던 집을 휩쓸어간 탓에 새 보금자리 마련을 위해 분주하다. 가족들이 돕고 나서 힘든 일도 기꺼이 하고 있다. 해변에서 불과 200여m 떨어진 곳에서 살던 그는 쓰나미가 몰려들었을 때 이웃집 대문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오랫동안 하나둘씩 모아온 삶의 흔적들은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폐물과 가구도 모두 잃었다. 지진해일이 할퀴고 간 상처는 불쑥불쑥 옛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경험은 그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다.
마타라 이재민 캠프에선 여성들이 캠프운영과 구호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공무원 쫓아다니기에 바쁘다. 그의 손가락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여성들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공공연히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공무원에게 밉보일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숨죽인 채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한 노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다고 했다. 캠프에 함께 사는 남성들이 과년한 딸아이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공동으로 쓰는 물가에서 남성들이 훔쳐보는 가운데 목욕을 하는 수모를 감내하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은 갓난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달라고 했다가 대신 감자나 먹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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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카남마(40)는 동부 해안가 바티칼로아의 이재민 캠프에서 아들 곁에 멍하니 앉아 있다. 가족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그와 아들뿐이다. 남편과 두 아이는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캠프 안에 있는 옷가지도 구호품으로 받은 것이다. 지난해 12월26일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예측이 가능했다. 가난했지만, 내일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고 살았다. 이제 그는 캠프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빼고는 미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캠프에서 제공해주는 것 말고 카남마 모자에겐 아무것도 없다.
관광호텔은 왜 건축허가가 났을까
쓰나미가 할퀴고 지나간 뒤 두달여가 흘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올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는 최근 해안가에 ‘안전지대’를 마련하기로 했다. 관광호텔을 제외하고 이재민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살던 해안가에 다시 집을 지을 수 없게 됐다. 종족에 따라 조금의 차별은 있다. 다수파인 신할리족이 사는 남부에선 ‘안전지대’가 해안가 반경 100m에 불과하지만, 타밀족과 이슬람 등 소수 인종이 몰려사는 북부와 동부에선 200m로 결정됐다. 20여년에 걸친 종족 갈등으로 정부가 종족 차별로 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100m가 됐든 200m가 됐든 ‘안전지대’는 피해주민들을 절박하게 만들고 있다. 집을 잃은 주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예전에 살던 터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권리를 정부가 박탈해갔다.
동부 해안가 일부, 특히 무슬림들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 중 하나다. 칼무나이 같은 곳은 7㎢ 안에 무려 13만5천여명이 몰려 살고 있다. 그런데 이번 지진해일로 4천여명이 목숨을 잃고, 1만4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이재민들이 살던 집은 해안가 반경 200m 안에 있다. 안전지대가 선포됨에 따라 이들은 새 집을 짓지 못하고, 북적이는 이재민 캠프에서 텐트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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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복구 대책을 마련할 때 쓰나미로 피해를 본 이들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지 한달여 만에 스리랑카 정부는 참사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구호품 배급을 둘러싼 부패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며 비상법률을 선포했다. 법률 선포와 함께 피해자들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게 됐다. 지방정부가 가졌던 주택건설과 택지조성 결정권은 중앙정부로 넘겨졌다. 이웃해 살지도 않는 중앙정부 정책결정자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겠느냐고 피해주민들은 한탄한다.
재건·복구 작업과 관련해 피해주민들과 정부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갔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야당과도 최소한의 대화만 했을 뿐이고, 피해 지역에서 구호작업을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와도 겉치레식 논의만 오갔을 뿐이다. 정부가 구성한 ‘국가재건 태스크포스’ 역시 공무원과 약간의 민간인력, 그리고 대통령 측근으로 구성됐다. 야당쪽이나 시민사회 진영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됐다. 재건복구 작업에 대한 정부의 근시안적 인식은 지난해 12월26일 쓰나미가 몰려오기 이전에 해변에 건축허가가 난 관광호텔은 안전지대 안에서도 영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결정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피해주민들에겐 이런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변의 무너진 집들은 이재민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귀중한 자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산일 것이다. 그들이 옛 집터로 돌아가는 걸 금지함으로써 정부는 이재민들의 비참함과 빈곤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가 새로 집을 짓지 못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국제적인 구호단체들도 집터를 구하지 못해 이재민들을 돕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트리코말리 지역에선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새 집이 7천채인데 국제 구호단체들은 9천채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참사로 인한 피해복구 작업을 국가재건 과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집중하다 보니 스리랑카 정부는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하게 됐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피해주민들의 일상을 되돌려주는 게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구호캠프에서 이재민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 정부는 전세계에서 쏟아진 동정과 구호의 손길을 스리랑카가 미래로 도약하는 기회쯤으로 여기고 있다. 해안가를 따라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흩어져 있던 가난한 어촌은 쓰나미가 휩쓸어가버렸다. 이들 해변에 고급스런 관광리조트 단지를 건설할 수도 있고, 국제 부동산 시장에 내놓을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계산이다. 피해지역을 잘 계획된 도시와 가난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다. 쓰나미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정부가 타밀반군과 손을 잡는다 해도…
지진해일의 희생자들이 흘린 눈물에 전세계가 움직였다. 어디에 살든, 어떤 종족 출신이든,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중앙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이 내리는 판단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이들이 무시돼선 안 된다. 스리랑카 정부가 타밀해방호랑이 반군과 손을 맞잡는다면, 쓰나미 참사는 분명 스리랑카인들이 새 삶을 일으켜세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국가적 재건 노력의 제1순위 과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피해주민들의 삶을 다독이는 데로 모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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