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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바뀌는 유럽의 수도?

등록 2005-01-07 00:00 수정 2020-05-03 04:23

순번제로 돌아가는 유럽의 문화수도, 2004년에는 프랑스 릴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다채로운 행사

▣ 헨트(벨기에)=양철준 전문위원 yang.chuljoon@wanadoo.fr

2004년 프랑스의 북부도시 릴과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바는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행사로 특별한 한해를 보냈다. 이들 도시는 지난해 유럽의 문화수도(European Capitals of Culture)였기 때문이다. 1985년 그리스의 아테네가 유럽의 문화수도로 최초로 지정된 이래 그동안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이 행사를 유치해 유럽인들의 문화적 결속을 강화하고, 유럽의 문화적 다양성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해왔다.

릴과 중국, 제노바와 일본

지난 20년 동안 유럽의 문화수도 지정과 행사는 유럽연합의 정치·경제적 통합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공통의 정체성을 창출하고 문화와 가치의 다양성을 보전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평가된다.

2004년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된 릴과 제노바는 도시의 특성과 이미지에 걸맞은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릴은 한때 내륙 플랑드르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역사적 배경과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도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집중했다. 즉, 루벤스·반다이크 등 플랑드르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각종 전시회를 연중 개최하는 한편 현대미술·건축·음악·공연예술에도 무게를 둠으로써 전통과 현대성의 안배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릴이 1년 동안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되면서 릴 인근의 북부지방에서도 많은 문화행사가 1년 내내 다양한 형식과 주제로 마련됐다. 릴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고 브뤼셀, 파리, 런던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이점이 있어 행사기간 중 릴을 방문한 관광객 수가 크게 늘어났고, 도시의 역동적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릴이 플랑드르 문화의 전통과 역동적인 현대성을 부각시키려는 문화행사에 집중한 반면, 제노바는 문화행사보다는 문화유산의 복원에 더 많은 예산과 노력을 기울였다. 제노바가 오랜 유적을 간직한 문화도시로서보다는 중요한 공업도시이자 항구도시라는 고정된 인식이 일반 대중에게 각인돼 있었기 때문에 2004년은 이러한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호기였다. 제노바는 도시의 역사적·지리적 특성에 따라 여행을 주요 테마의 하나로 설정하고 주요한 행사를 조직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제노바에서 태어났고, 중세에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해양 문화와 여행을 주요한 테마로 삼은 것이다.

유럽의 문화수도는 단순히 유럽 도시들만의 축제가 아닌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가 교류하는 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2004년 프랑스의 릴과 북부지방에서는 특히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해지고 있는 프랑스와 중국의 밀월관계가 문화수도 행사에도 반영된 것이다. 북부지방의 항구도시 당케르크에서는 중국문화축제가 성대하게 치러지는 등 동양 문화의 소개가 두드러진 한해였다. 한편 제노바는 이탈리아 리구리아 지방의 중심도시인데, 리구리아 지방과 일본의 아오모리현은 자매결연을 맺었기 때문에 제노바에서는 일본과 관련된 전시회와 문화행사가 단연코 많았다. 즉,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된 도시 혹은 지방과 자매결연을 맺은 세계 각지의 문화가 소개됨으로써 유럽의 문화수도는 열린 문화의 창 구실을 하는 것이다.

1985년 멜리나 메르쿠리가 처음 제안

2005년 유럽의 문화수도는 아일랜드 제2의 도시인 코크이다. 1천년 전에 세워져 교역도시로 성장한 코크는 현재 대학도시이자 전자, 통신, 제약산업 등 첨단산업도시로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과 함께 아일랜드의 고도성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양대축이다. 2002년 5월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된 뒤 2년 이상의 준비기간을 거쳐 이른바 ‘켈트 호랑이’(Celtic tiger)로 알려질 정도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아일랜드의 기적과 문화유산을 동시에 알릴 것으로 기대된다. 아일랜드는 이미 1991년 더블린으로 유럽의 문화수도를 유치한 바 있다.

유럽의 문화수도라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한 이는 멜리나 메르쿠리 (1920~94)이다. 그가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85년 6월 유럽연합 각료이사회에서 유럽의 문화수도를 발의해서 채택된 것이다. 그는 영화배우이자 가수로 대중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또한 문화부 장관과 국회의원으로서 비단 그리스 정계뿐 아니라 유럽의 문화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67년 쿠데타로 조국 그리스에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자 멜리나 메르쿠리는 망명지 스위스 로잔에서 군부독재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지원했고, 74년 군부독재가 종식되자 귀국해서 정계에 뛰어들었다. 1981년부터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한 멜리나 메르쿠리는 영국이 19세기 초엽에 파르테논 신전에서 약탈해 대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대리석 조상들을 반환받기 위한 노력을 줄기차게 전개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유럽의 문화수도인 것이다.

유럽연합은 다양하고 풍부한 유럽의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심고 유럽국가들 사이의 문화적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1985년부터 해마다 유럽의 문화수도를 지정해왔다. 처음에는 유럽의 문화도시(European Cities of Culture)라는 명칭으로 정해졌으나 1999년부터 유럽의 문화수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유럽의 문화수도로서 처음으로 지정된 도시는 서구문명의 요람이고 헬레니즘 문화의 꽃을 피운 아테네이다. 그 이후 1986년에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87년에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88년에는 독일의 베를린, 89년에는 프랑스의 파리가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됐고, 2006년에는 다시 그리스의 파트라스로 옮길 예정이다.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이 공평하게 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순번제 방식을 채택해 유럽의 문화수도를 지정한다. 통상 유럽연합 회원국가가 문화수도를 유치하기를 희망하는 연도를 기준으로 4년 이내에 신청서를 제출하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문화 부문의 전문가 7인으로 선정위원단을 구성해 결정하는 방식으로 선정한다. 1985년 처음으로 유럽의 문화수도를 지정해서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했을 때에는 주로 서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순번제로 진행됐다. 그러나 2004년 5월1일 유럽연합의 제5차 확대를 통해 폴란드, 헝가리, 체크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사이프러스 등 10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유럽의 문화수도도 전 유럽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경제적 파급효과 크다

유럽의 문화수도를 창안한 멜리나 메르쿠리는 “문화야말로 그리스의 중공업”이라고 말했다. 문화야말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원천임을 갈파한 선견지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럽의 문화수도를 유치한 도시는 1년 동안 각종 문화행사를 통해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등 가시적인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행사가 진행되는 1년 동안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가 40% 이상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을 정도로 관광 부문에는 파급효과가 크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인 효과보다도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과 이미지를 재정의하고 도시의 문화적 부가가치를 생산해낸다는 점일 것이다. 문화수도 이전이 기대되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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