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1]
버마-중국-타이-라오스 국경에서 미국·대만·타이의 반공용병으로 싸웠던 전사들의 고향 도이 매살롱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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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버마 국경=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크리스천 찬송가가 이슬람 모스크 위로 사납게 흘러다니는 아침나절, 방콕으로 내다팔 양배추를 다듬는 아낙네들 칼질이 분주하다. 싸움인지 정담인지 알 수 없는 고성들이 귀를 때리고, 늘어선 찻집들은 중국방송을 틀어대고, 어지러운 한문 간판들 아래로 산악 소수민족인 몽(Hmong)과 아카(Akha), 리수(Lisu)들이 어슬렁거리며 이방인의 눈길을 붙들어맨다.
첩첩산골의 살아 있는 전쟁박물관
얼핏 중국 윈난(雲南)의 한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버마 국경을 마주보는 타이 북부 산악 도이 매살롱(Doi Mae Salong)이다. 한동안 길이 마땅찮아 바깥 세상과 교통마저 힘들었던 이 깊은 산골에는 1만4365명 주민이 살고 있다. 꼬불꼬불 산길을 돌며 멀리서 바라보는 도이 매살롱이야 여느 타이 산골 마을들과 다를 바 없지만, 산마루에 자리잡은 마을 들머리에 들어서노라면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내달리는 픽업 트럭들 양쪽으로는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산골 자락에서는 그럴듯한 게스트하우스 예닐곱이 나그네를 부른다.
위성안테나를 꽂은 집들도 어렵잖게 눈에 띈다. 구름도 쉬어가는 이 깊은 타이 산골에서 이런 ‘부자 마을’을 본다는 건 확언컨대, 별난 일이다. 게다가 마을 한복판으로 접어들 즈음, 떡하니 버틴 3층짜리 타이군인은행(Thai Military Bank)과 마주치노라면, 과연 이 첩첩산골 도이 매살롱이 심상찮은 곳임을 쉽사리 예감할 수 있다.
그렇다. 한때 국제적인 마약 생산지로 유명했던 이른바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의 한축인 그 도이 매살롱 아니었던가! 비록 지금은 마약 대신 대만 품종을 이식한 ‘도이 매살롱차’와 온갖 과실주 생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한건만 잘하면 3대가 간다”는 자본주의 맹렬사(猛烈史)가 살아 있는 이 산골 찻집에 앉아 주인장 쑨정둥(48)씨가 따라주는 이 차 저 차를 받아 마시다 보니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래, 차 이파리만 팔아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나?” 말귀를 잽싸게 알아들은 쑨씨는 낯빛을 바꾸며 이내 두 손을 내젓는다. “30년 전에 끝난 일인데, 뭘…. 지금은 양귀비 밭도 없고, 그런 사업도 없어.”
마침 쑨씨 무선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어색할 뻔했던 대화가 끝난다.
옳다. 이 도이 매살롱에서 양귀비나 마약을 화제에 올린다는 건 주민들로부터 그리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닌 모양이다. 사실 그 이름 도이 매살롱마저도, 타이 정부가 마약 오명을 씻자며 ‘평화로운 언덕’이란 뜻을 지닌 ‘산티키리’(Santikhiri)로 바꿔버린 지 오래지만.
이름이야 산티키리가 되었든 도이 매살롱이 되었든, 이 마을은 현대 전사를 고스란히 품은, 살아 있는 전쟁박물관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온몸으로 20세기 전쟁을 치렀던, 살아 있는 전사들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이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국공합작과 배신의 지난한 역사
“이거, 왜 또 왔어?” “한번 더 확인하려고요. 그러니까 1937년 난징으로 가서 처음 일본군과 싸운 게 틀림없죠? 그게 제2차 국공합작 때란 말이죠?”
“거참, 찰거머리로군. 그래, 몇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듣겠나? 역사책 뒤져보면 되잖아.”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일곱이지만 청년 같은 근력을 지닌 레이위톈 장군은 혀를 차며 달갑잖은 듯 불청객을 맞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지난 4월 말 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2주 동안 세번씩이나 찾아가 기억도 삼삼한 옛 일들을 풀어내라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해서 퍼부어댔으니.
도이 매살롱에서 나이로 보나 군 시절 계급으로 보나 가장 손윗사람인 레이위톈 장군은 난징 대학살을 목격한 17살 때 일본 군국주의 침략에 맞서고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전사로 뛰어들면서부터 44년을 꼬박 전쟁터에서만 보낸 인물이다.
청년 레이위톈이 처음 전선에 올랐던 그 시절은 중일전쟁 발발로 국민당이 중국공산당과 이른바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형식상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했지만, 사실은 국민당이 항일투쟁보다는 공산당 공격에 치중해 ‘적전 분열상’을 드러내던 때였다. 그렇게 국민당이 ‘반공전선’에 목을 매단 사이 공산당이 이끈 팔로군(八路軍)이 8년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던 가운데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공산당의 민중연합정부 창설 주장에 찬물을 끼얹고, 오히려 항일투쟁 승리를 독점하며 1946년 6월 공산당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렇게 시작된 ‘제2차 국공내전’은 결국 국민당에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안기며 중국 현대사의 흐름을 돌려놓았다.
인민들의 지원을 받은 공산당의 반격에 몰리던 국민당은 1949년 들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1월21일 장제스 총통이 물러나고 리충런이 총통 대행으로 취임했다. 반격의 고삐를 잡은 공산당은 1월23일 베이징에 이어 항저우, 우한, 상하이, 란저우, 난징을 비롯한 국민당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무너뜨린 뒤, 10월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창설했다. 이어 10월14일에는 광저우까지 손에 넣었다. 광저우가 함락당한 국민당 정부는 10월15일 충칭으로 천도하면서 중앙당을 대만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12월5일 리충런 총통 대행이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12월8일 장제스가 마지막까지 본토 수복 근거지로 삼고자 열망했던 남부 윈난성마저 그 지역의 군벌 루한이 공산당에 투항해 잃게 되자, 12월9일 장제스는 50여만명에 이르는 국민당 당원을 본토에 남겨둔 채 청두에서 특별기를 타고 대만으로 탈출했다. 12월 말, 윈난성에서 마지막까지 ‘꿈’을 좇던 리미 장군의 국민당 제8군과 류톈위안 장군의 제26군 그리고 93사단의 주력도 버마의 샨주 국경으로 쫓겨났다. 그 과정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후퇴했던 리미 장군의 제8군 병력 가운데 5천여명은 프랑스군에 의해 곧장 무장해제당한 채, 1953년 대만으로 옮겨갈 때까지 억류당했다.
형식상 내전은 끝났고, 장제스는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본이 지배해왔던 대만에서 국민당 정부를 세웠다.
중국 현대사의 지난한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인민해방군(PLA)에 쫓긴 국민당 제93사단 소속이었던 레이위톈 장군도 살길을 찾아 버마 국경을 향했다. “윈난을 떠나 버마 국경을 넘던 길은 악몽이었어. 먹을거리도 없고, 신발도 제대로 갖춘 이가 드물었으니.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지.”
레이위톈 장군과 그 국민당 잔당들은 1950년 1월부터 버마의 샨주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1950년 3월인가, 우리 국민당 1500여명이 샨주의 켕퉁에서부터 타이 국경과 맞댄 도시 타칠레크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했고….”
비행기까지 추락당한 버마 정부군
레이위톈 장군이 증언하는 그 3월에 앞서, 1월 초 리미 장군은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가서 본토 수복의 꿈을 버리지 않은 장제스로부터 윈난반공구국군 최고사령관 직함에다 무기와 물자를 안고 다시 버마 국경으로 되돌아왔다. 대만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잔당은 1950년 4월 살윈강과 와주의 몽마오에 이르는 중국 국경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어 리미 장군은 몽양에 새로운 기지를 마련한 뒤, 코캉을 비롯한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끌어들여 병력을 키워나갔다.
이에 당황한 버마의 우누 총리 정부는 켕퉁 지역의 사령관을 통해 국민당 잔당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장 버마를 떠나라. 아니면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리미 장군은 오히려, 1월 초순 버마 국경을 넘은 뒤 무장해제당한 국민당 잔당 제1진의 석방을 요구하며 맞섰다. 그러자 버마 정부군은 국민당 잔당들을 공격해 1주일 만인 6월21일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 공격받은 국민당 잔당 가운데 200여명은 라오스로 쫓겨난 뒤 억류당했고, 나머지 병력은 리미 장군 지휘 아래 타이 국경에서 24km쯤 떨어진 몽사트로 후퇴했다.
“그 전투에서 우리가 밀려나긴 했지만, 버마 정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어.” 항?쥔샤오(黃?軍校) 18기 출신으로 국민당 제93사단 소속이었던 천마오슈(87·타이 북부 치앙마이 거주) 대령의 증언처럼, 버마 공보부가 1953년 발행한 이라는 기록문서를 뒤져보면 실제로 버마 정부군은 켕퉁 지역에서 작전 지휘용 비행기가 추락해 공군 사령관 셀윈을 비롯한 최고위급 군 지휘관까지 잃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음이 드러난다.
트루먼, CIA를 통해 비밀작전을 짜다
한편, 그 무렵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장을 염려하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게 1950년 초부터 합동참모본부(JSC)는 버마 국경지대에 퍼져 있는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는 특수 비밀작전 실행을 건의했다.
“그 계획은 그때까지 CIA가 실행한 비밀작전 가운데 최고단위 기밀로 취급했던 탓에 합동참모본부나 CIA는 어떤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 또 그 비밀작전은 랭군 주재 미국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국방부 고위관리와 심지어 CIA 정보부 국장마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한 암흑 속에서 진행했다”고 데이비드 와이즈와 토머스 로스는 (The Invisible Government·1963)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게 해서, 중국-인도차이나반도-타이-버마-티베트를 잇는 반공 전략 요충지로 버마를 주목한 트루먼 정부는 국민당 잔당을 중국공산당의 확장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파제로 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에 따라 트루먼은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배해온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미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버마 국경지대로 쫓겨난 국민당 잔당들을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트루먼이 CIA를 통해 비밀작전을 명령했던 까닭은 중국공산당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트루먼은 1945년 집권하면서부터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 쫓겨 패퇴하는 과정을 놀란 눈으로 지켜봐왔던 인물이다.
“CIA 요원들이 직접 몽삿까지 날아와서 무기를 제공했고, 또 대만에서 온 군사 교관들이 우릴 훈련했어. 그이들 지원을 받아 리미 장군은 국경에서 새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휘하에 4천여명을 거느리게 됐고….”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발뺌하던 레이위톈 장군은 세 번째 만남에서 결국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국민당 잔당은 그 무렵 몽삿에 군사훈련소까지 건설한 CIA와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부터 ‘갑자기’ 버마 정부군과 맞설 만한 무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CIA의 대국민당 잔당 지원을 위한 비밀작전은 1년 남짓 지난 1951년 초, 마침내 버마 정부로부터 의심받기 시작했다. 버마 정보요원들이 정체불명의 C-46과 C-47 수송기가 국민당 잔당 본부인 몽삿에 전략물자를 공수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국민당 잔당을 낀 버마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는 국제적인 긴장이 일기 시작했고, 우누 총리는 ‘국민당 사안’을 유엔으로 끌고 가 미국을 성토했다.
그렇게 CIA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잔당들의 대버마 비밀전쟁에는 ‘마약의 정치경제학’이 숨어 있었다. 반공을 내건 국민당이 인민해방군에 쫓겨나면서 비록 ‘이념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버마 국경을 넘어온 국민당 잔당들은 CIA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라오스·버마·타이 국경지대를 끼고 벌어진 ‘마약 전쟁’에서는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다졌다.
국민당 잔당들은 CIA가 지원한 무기와 병력으로 버마 국경지대 소수 산악민족들을 협박해 1950년 초부터 아편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소수민족들이 생산한 아편에서 세금을 뜯어내고 운반을 대행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해나갔다. 국민당 잔당이 CIA 수송장비들을 이용해 몽삿에서 타이 북부 치앙마이를 거쳐 방콕까지 실어나른 마약은 다시 CIA 끄나풀이자 타이 정치를 주물렀던 실권자인 경찰 총수 파오 스리야논다 장군의 보호 아래 홍콩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팔려나갔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의 마약사업
그 과정에서 CIA는 자신들이 앞세운 ‘사우스 이스트 아시아 서플라이스’(South East Asia Supplies Corporation)를 통해 파오 스리야논다 장군에게 대규모 무기를 제공해 해양경찰과 경찰항공대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대신 그이가 국민당 잔당의 ‘마약사업’을 돕도록 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연간 60t에 지나지 않던 인도차이나의 전체 아편 생산량이 베트남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무려 1천톤을 넘었고,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는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마약 생산지가 되었다. 타이는 세계 최대 마약 중계시장으로 떠올랐고. 말하자면,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던 1950년대 ‘국제반공전선’과 ‘국제마약시장’은 CIA의 지원을 받으면서 함께 자라난 쌍둥이었던 셈이다.
“우린 그런 거 손댄 적 없어, 절대로 없어!” 그러나 국민당 잔당과 관계 있는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마약’에 대한 이야기만은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 남녀든 노소든 누구든 마약 ‘마’자만 나오면 손사래부터 친다.
“리원환 장군도 돤시원 장군도 모두 마약에 손대는 이들을 처벌할 정도로 엄격했는데, 무슨 그런 소릴!” 2004년 2월1일 완공한 도이 매살롱의 태북의민문사관(泰北義民文史館)이라는 국민당 기념관에서 안내자로 근무해온 자오셴짠씨는 마약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발끈했다.
물론, 아편 이권을 놓고 국민당 잔당이 둘로 갈라져 돤시원 장군이 이끄는 제5군 소속 1800여명은 도이 매살롱에, 그리고 리원환 장군이 이끄는 제3군 소속 1400여명은 탐 응옵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깊숙한 내막을 물어본들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으며 400여명에 이르는 제1독립부대 스파이를 거느리고 그 두 장군 사이를 중재했던 정보부대장 마쥔궈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그렇게 둘로 쪼개졌던 국민당 잔당들은 샨주에서 새로운 마약 군벌로 떠오른 이른바 ‘마약왕’ 쿤사와 골든 트라이앵글 패권을 놓고 겨룬 1967년 ‘마약전쟁’ 기간 동안 다시 연합했다. 그 전쟁을 통해 쿤사의 협박은 수그러들었고, 국민당 잔당들은 여전히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를 낀 마약 생산과 거래의 90%를 독점해나갈 수 있었다.
‘반공구국전선’ 구호를 외쳤지만, 결국은 ‘마약패권전선’의 깃발 아래 국경 전선을 달렸던 국민당 잔당은 1950년대 내내 버마 정부군과 비밀전쟁을 벌였고, 이어 1960년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에는 미국의 용병으로 대라오스 비밀전쟁(Secret War)에 참전했다. 그리고 다시 1970~80년대에는 타이 정부의 대공산당(CPT) 박멸작전에 비밀리에 투입되면서 냉전 기간을 통틀어 이 세상에서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가장 길고 지루한 ‘비밀반공전선’을 달린 끝에 도이 매살롱에 정착했다.
반공구국전선, 마약패권전선
그러나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평생을 전선에서 보낸 전사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든지, 이제 도이 매살롱에는 어제의 용사들이 한물가고 그 3세들이 빼곡이 메워가고 있다.
현재 버마와 국경을 이룬 타이 북부 도이 매살롱, 팡, 매홍손 지역 그리고 라오스와 국경을 이룬 파탕에는 국민당 잔당으로 평생 전쟁터를 오갔던 이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 국민당 잔당 출신 ‘반공용사’들과 그 후손 5만7천여명이 살고 있는 54개 마을을 타이 사람들은 흔히 국민당 약자를 따 ‘KMT 마을’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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