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에 비타협적 태도 고집하는 박근혜 대표… 당내 불만 터져나오며 입지 흔들려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12월12일 오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귤 두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휴일에도 ‘조’를 짜서 농성 중인 한나라당 의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표는 1시간 남짓 머물며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는 한나라당의 신념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표가 떠난 뒤 일부 의원들은 “대표가 워낙 강경하게 선을 그어놓으니…”라며 입맛을 다셨다. 한 의원은 “‘간첩 암약’ 발언으로 우리 입지가 좁아졌는데 박 대표는 똑같은 얘기만 반복한다는 불만도 없지 않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덕룡 원내대표실의 불만
12월9일 법사위 농성장에서 두명의 의원이 주고받은 대화의 한 토막이다. “형님, 노동당 발언으로 일이 더 꼬였네” “글쎄, 그러게.” “(지도부가) 실익을 따져가면서 했어야지.” “(박 대표가) 탄력이 없긴 없어.” “가만 보니까 문제를 (손가락을 앞으로 향하게 양손을 펴서 눈가에 대고) 딱 요렇게밖에 못 봐.”
박 대표가 ‘소신’과 ‘정치력’을 조화시킬 첫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7월 대표 취임 직후 국가 정체성 논란을 제기하고 9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몸을 던져서라도 막겠다”고 밝힌 이래 박 대표는 대여 이념 공세에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해왔다. 그러나 법사위 농성에 이어 이철우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한 ‘간첩 암약’ 폭로가 이어지면서 역풍은 거세진 반면 내부 동력은 급속도로 떨어지는 양상이다. 당 전반적으로 ‘피로감’이 심해진 게 1차적인 배경이나, 일각에서는 박 대표의 ‘자질론’까지 제기되는 형편이다.
박 대표가 12월12일 법사위 농성장을 방문한 시각, 김덕룡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철우 의원 노동당 가입 논란에 대해 국회 국정조사를 열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문제를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지만 고문조작설까지 나온 마당이라 이렇게 결론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와 의논한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 전후 원내대표실에서는 적잖은 ‘불만’이 터져나왔다. 박 대표가 짐을 김 원내대표에게 떠넘긴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한 관계자는 “아침에 갑자기 사무총장실에서 기자회견 요청이 들어와 부랴부랴 준비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김 원내대표는 이철우 의원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박 대표의 의지가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원내대표는 정형근 의원이 12월9일 정보위 소집을 요구하자 “문제를 확대하는 건 좋지 않다”고 반대의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김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내 이견이 있지만…”이라는 수사를 여러 차례 붙여, 부담스런 속내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박 대표의 지지대가 돼주던 김 원내대표쪽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박 대표의 당내 입지에 ‘미묘한 균열’을 예고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 당직자는 “박 대표가 ‘노동당 가입’ 폭로에 지도부가 사전 개입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면서 “(지도부가) 지시를 했느냐, 방조를 했느냐는 큰 차이가 없는데 대변인을 통해 해명까지 한 걸 보면 상황을 풀어가는 데 자신감을 잃은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12월9일 인터넷 매체 에서 지도부 지시 문제를 거론하자 대변인실을 통해 항의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박근혜 흔들기’ 쟁점화되나
임시국회로 넘어가며 박 대표의 부담은 더 커졌다. 정기국회 때에는 국가보안법이 예산 부수 법안이 아니라는 논리를 앞세울 수 있었으나, 임시국회 때에는 몸으로 막는 것 외에는 상정을 거부할 논리가 궁색한 탓이다. 예산안 처리와 이라크 파병안 처리가 늦춰지는 것도 ‘국회 보이콧’을 한 한나라당쪽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런 ‘초조감’ 때문인지 12월10일 논평에서는 때아닌 ‘노무현 책임론’이 등장했다. 임태희 대변인은 논평에서 “정국 파행의 직접적이고 큰 원인이자 꼬인 시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이라며 “노 대통령의 ‘폐지 철회’만이 유일무이한 국회 정상화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당내에서는 소모적인 대치를 중단하고 대안을 마련해 절차대로 하자는 ‘현실론’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 강경파인 홍준표 의원은 12월12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여당에 철회하라고만 할 게 아니라 각자 안을 내놓고 국민을 상대로 설득해야 한다”면서 “정말 국민이 폐지를 원하면 폐지해야 한다”고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홍 의원은 “양당 지도부가 똑같이 외부 압박과 자기들 말에 발목을 잡혀 외통수에 몰렸다”고 싸잡아 비판한 뒤, 박 대표에 대해서는 “영남 보수파의 덫에 걸려 운신의 폭이 없다, 선택의 여지 없게 일을 끌고 간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박근혜 대표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워온 홍 의원의 이런 발언은,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박 대표의 처지가 그만큼 난처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당내에서는 ‘박근혜 흔들기’가 다시 점화되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당장 당론 결정도 쉽지 않아 보인다. 12월13일 의총에서 영남권 의원들은 당론 결정에 유보적이었던 반면, 소장파 의원들은 당론 결정 필요성을 강조해 팽팽하게 맞섰다. 현재 한나라당에는 명칭과 정부참칭 조항도 고치자는 ‘절충안’과 불고지죄만 없애자는 ‘현행 유지안’ 두 가지가 대안으로 나와 있으나, 양쪽의 주장이 하늘과 땅 차이다. 임시국회 상임위 등원 압박이 심해질 경우 당론 결정 과정에서부터 자중지란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안팎으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박 대표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회의론’마저 나오고 있다. 한 소장파 의원은 “계속 비타협적으로 구는 게 어떤 실익이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강경파들이 ‘쑤셔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박 대표의 의지나 철학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내 개정 논의가 진행된 게 몇년째인데, 우리가 아예 먼저 개정하겠다고 치고 나갔더라면 개폐 논의가 생산적으로 진행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한 핵심 당직자는 “누가 봐도 여권쪽에 1차적 책임이 있다”면서도 “다만 박 대표도 소신이 강하다 보니 위기 대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박 대표의 측근들은 “당 대표를 떠나 정치인으로서 소신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라며 박 대표의 ‘일관된 태도’를 강조했다.
국보법 유지 의사 굽힌 적 없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에 대한 박 대표의 생각은 2000년을 기점으로 대폭 바뀌었다. 199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의 필요성을 언급하자, 박 대표는 “간첩을 알고 있는데도 신고할 의무를 폐지하는 것이 과연 분단 조국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냐”며 불고지죄 부분까지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1999년 11월에는 김종필 총리 상대 본회의 질의에서 “이미 수차례 개정한 국가보안법에 인권침해의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법 자체보다는 운영상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개정을 반대했다. 박 대표의 이런 완강한 태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당내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이 불붙으면서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다. 박 대표는 2001년 1월 와의 인터뷰에서 “근본적으로 폐지는 반대하지만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는 등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문제 있는 부분은 수정이 가능하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개별 조항에 대해서는 “달라진 환경에 맞게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수준 정도”라면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2002년 5월 방북 뒤에도 남북 화해·공존은 부쩍 강조했지만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기존의 유지 의사를 굽힌 적이 없다. 한 핵심 관계자는 “국보법에 관한 박 대표의 생각은 ‘필요하면 수정할 수 있다’고 밝히는 ‘딱 거기까지’일 뿐 의외로 보수적”이라며 “대북 정책과 국가보안법 문제를 박 대표는 별개로 여긴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12월13일 의총에서 “여당이 폐지안을 거둬들이고 협상을 하자고 할 것을 대비해 우리 안을 정해 주머니에 넣어두자”고 말했다. 폐지안 철회 이전에는 당론 결정이 무의미하다는 기존 태도에서 한발 물러선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지적을 수용한 결과다. 문제는 박 대표의 소신과 정치력의 조화 속도에 견줘, 당 안팎의 여론은 훨씬 빨리 변화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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