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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왕 | 타이] “그 앞에서 의문을 품지 말라”

등록 2004-11-18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네트워크]

세계에서 가장 안정감 있는 군주 가운데 하나인 푸미폰왕의 통치 비밀은 무엇인가

▣ 버틸 린트너(Bertil Lintner)/ 타이 특파원

타이에서 12월5일보다 화려한 축제일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해온 타이 왕 푸미폰 아둔야뎃의 생일을 뜻한다. 사람들은 왕을 위해 불교 사원에 향불을 피우고, 또 선조 왕들의 동상에도 긴 참배 행렬을 이룬다. 이 세상에서 타이 국왕처럼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경우도 드물다. 푸미폰왕은 아마도 아시아에서 가장 비범하고도 신격화된 마지막 군주며, 또 세계에서도 가장 안정감 있는 군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왕과 군주제를 놓고 타이에서는 ‘공화제’ 운동도 ‘의문’이나 ‘비판’도 결코 없다.

왕, 대혼란을 잠재우다

1782년 창건한 차크리 왕조의 제9대 왕인 푸미폰을 타이 사람들이 숭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차크리 왕조의 초대 왕은 1767년 버마군의 침공을 받아 폐허가 된 북쪽 아윳타야에서 수도를 방콕으로 옮겨왔다. 무엇보다 타이 사람들은 사나운 버마군의 침공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9세기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지가 되었지만 타이는 예외였다. 그런 사실을 놓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차크리 왕조의 왕들, 특히 몽쿳왕과 타이 현대화를 주도한 그의 아들 출랄롱콘 왕의 외교술 덕으로 돌렸다. 그 왕들은 서양의 교사와 기술자들을 초대해 타이 개발을 지원했지만, 타이의 독립성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타이 왕들의 통치는 1932년 청년 장교들과 개혁주의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2년 뒤 푸라차디폭왕이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군주제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다만, 절대군주제에서 표면상 유럽식 모델인 입헌군주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왕의 영향력은, 지난 1992년 선거 없이 총리 자리에 오른 수친다 장군을 거부하며 방콕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운동을 군부가 유혈 무력으로 진압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당시 푸미폰왕이 수친다 장군과 민주화운동 지도자 참롱 스리무앙(전 방콕 시장)을 소환해서 중재에 나서자 곧장 방콕의 대혼란은 끝났다. 그 무렵 군부와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두 충돌세력 대표들이 푸미폰왕 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장면이 방송과 신문을 뒤덮었다. 그 사진은 타이 군주의 힘을 드러낸 상징적인 그림이었다.

만약 푸미폰왕이 서거하면…

타이는 1932년부터 수많은 군사 쿠데타가 이어지면서 헌법이 바뀌어왔지만 대혼란과 심각한 사회적 격변이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런 타이에 만약 군주제가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날 타이는 라틴아메리카의 ‘바나나 리퍼브릭’(banana republic·과일 수출과 차관으로 버티는 중남미 소국을 경멸조로 부르는 말)이나 아시아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와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고 말해왔다.

곧 77살이 되는 푸미폰왕은 1946년 그의 형인 아난다 마히돌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뒤, 지금도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대중 속에서 거론되지는 않지만 타이 군주제의 장래에 대한 의문이 나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확실한 것은 몇 가지뿐이다. 만약 푸미폰왕이 서거하면 타이 사회 전체가 거대한 슬픔에 휩싸일 것이라는 점과, 또 누가 차기 국왕이 되든 그 결정은 푸미폰왕의 그림자가 지배하는 추밀원(樞密院)에서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군주제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렇게 타이에서는 몇몇 사람을 빼고 나면 왕에 대한 숭상 없는 자신들의 국가를 상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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