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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는 왜 고향을 바꿨을까

등록 2004-10-15 00:00 수정 2020-05-03 04:23

장쩌민과 동향이란 점이 부담으로 작용…영재로 자라 친민정책 강조하는 정치가로 부상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1992년 10월19일, 제14차 공산당 당대회 폐막 직후 장쩌민은 내외신 기자들에게 새로 뽑힌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특별히 후진타오를 가리키며 “저 젊은 사람은 아직 50살이 되지 않은, 올해 49살의 후진타오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로부터 불과 12년 뒤 그 ‘젊은이’는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오늘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2004년 9월19일 중국공산당 16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6기 4중전회)의 폐막 직후 당 중앙위원들 앞에 선 후진타오 주석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다. 중국공산당 16기 4중전회 폐막 직전 장쩌민은 드디어 군사위 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선언했다. 15년간의 장쩌민 시대가 막을 내리고,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시대 지도자’로 불리는 후진타오의 시대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다.

진짜 고향에 한번 들를만도 한데…

2003년 8월 중순, 중국 장쑤성 타이저우시 중심에 자리한 타이저우 중학교 교정은 마침 건물 개·보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송나라 시대 큰 교육자로 이름을 떨친 후안딩(胡安定)의 조각상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는 작고 아담한 교정이지만, 타이저우 중학교는 벌써 100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내에서 전통이 깊은 명문 학교 가운데 하나다. 이 학교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는 현재 중국 국가주석인 후진타오의 모교라는 점이다. 그는 이곳 타이저우에서 태어나 1959년 칭화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고향인 타이저우에서 살았다. 그의 부모는 이곳 타이저우에서 차(茶) 가게를 운영했다.

“최근 몇년 동안 외국 기자들이나 높은 관리분들이 자주 우리 학교를 들러요. 아마도 후진타오 주석님이 다녔던 모교라서 그럴 거예요. 그래서 요즘 학교를 새로 단장하고 있어요. 국가주석님의 모교인데 체면 깎이면 안 되잖아요. 사실 지난해 말 100주년 개교기념을 앞두고 학교쪽에서도 은근히 후 주석님이 한번 ‘행차’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직접 오시지는 않고 축하한다는 친필서한만 보내왔어요. 그래도 이곳 고향 사람들은 언젠가는 후 주석님이 고향을 방문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근데 왜 후 주석님이 자신의 고향을 이곳 타이저우라고 하지 않고 안후이성 지시현이라고 하는지 알아요?”

혼자 경비실을 지키고 있던 타이저우 중학교의 경비원은 여름방학이라 학생들이 없는 학교가 심심했던지 직접 학교 안내를 자처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신나게 들려준다.

중국 정부 요인들의 공식 이력서를 보면 후진타오의 고향은 타이저우가 아닌 안후이라고 쓰여 있다. 때문에 외신보도에서도 종종 그의 고향을 안후이라고 ‘오보’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타이저우 사람이다. 후진타오 모친의 고향 역시 마찬가지다. 안후이성 지시현은 후진타오의 조부모를 비롯해 조상들이 살았던 곳으로, 후진타오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후진타오가 그의 이력서란에 자신의 고향을 굳이 타이저우라고 하지 않고 조상들의 고향인 안후이성 지시현이라고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극히 ‘정치적’인 배경을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고향이 같기 때문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조부모들의 고향도 같다. 장쩌민은 장쑤성 양저우가 고향인데, 타이저우 역시 1996년 이전에는 양저우시에 속했다. 때문에 1996년에 타이저우가 양저우 관할을 벗어나 시급 도시로 독립했을 때도 타이저우시 관료들 사이에서는 말들이 무성했다고 한다. 대(代)를 달리하는 최고통치자들의 고향이 연달아 같은 것을 그다지 좋지 않은 일로 여겼던 중국인들의 인식 때문에, 장쩌민과 고향이 같았던 후진타오는 자신의 고향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안후이성 지시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후진타오가 살았던 옛집 골목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매우 예절 바른 아이였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다녔지”라며 지금도 어릴 적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한다.

공부 빼곤 노래와 춤을 좋아해

1959년 칭화대학교 수리(水利)학과에 입학했을 당시 후진타오는 당시 칭화대 수리학과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학생이었다. 입학 때 나이가 불과 17살이었다. 칭화대 입학 이후 그의 이력서 앞에는 줄곧 ‘가장 젊은’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붙어다녔다. 1982년 39살로 가장 어린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면서 중국 정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1985년 42살 나이로 구이저우성 서기로 부임했을 때도 전국에서 가장 ‘어린’ 성 서기로 소개되었다. 1992년 7명의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뽑혔을 때 역시 가장 나이 어린 ‘젊은이’였고, 1998년 55살의 나이로 국가 부주석직에 오를 때는 역사상 가장 ‘젊은’ 국가부주석이었다. 나이뿐 아니라 얼굴도 젊어 보였던 후진타오는 칭화대 재학 시절 동급생들로부터 ‘어린 동생’ 취급을 받았지만, 성적은 누구보다도 뛰어나 칭화대 내 특수 영재교육반에서 특별교육을 받았다. 후진타오의 부인인 류융칭도 그와 같은 과 동기생이었다.

칭화대 시절, 후진타오는 ‘무도반’ 동아리 활동을 했다. 다소 내성적이고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후진타오의 성격에 비추어보면, 그가 노래 부르고 춤추는 무도반 활동을 했다는 것은 재밌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무도반 등의 예술반 활동을 해왔으며 그가 공부 외에 가장 좋아하는 것 역시 춤과 노래였다고 한다. 칭화대 재학 시절에는 칭화대 내 예술단 단장을 지내기까지 했으며, 중요 행사 때마다 직접 무대에 올라 가무공연을 했다. 그의 전기문을 쓴 전기작가들은 그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그는 공연무대를 통해 대중들과 가장 친숙해지는 방법을 터득했고 지도자들에게도 더 손쉽게 자신을 알릴 수 있었다. 무대는 그에게 또 다른 정치예술을 습득하게 한 장소였다”고 평한다. 구이저우성 성장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친민정책’을 강조하고 있는 후진타오의 ‘지도자 예술’은 칭화대 시절 무도반 활동에서부터 배양된 것이다.

1985년 구이저우성 성장으로 재직할 때 그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상적인 지도자란 “대중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민주를 사랑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냉정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좋은 지도자는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는데, 그가 말하는 생활을 사랑한다는 뜻은 “사업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면서 스포츠와 문학 예술을 사랑하고 생활 속의 모든 바람직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이러한 허심탄회한 성격과 관료주의적 오만함이 없는 평민적인 이미지는 당시 구이저우 대학생들이 그를 일컬어 “가장 매력 있는 공산당 간부”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덩샤오핑을 비롯해 호야오방 당 총서기 등 당의 원로들로부터도 ‘미래 지도자감’으로 낙점을 받아놓고 있었다.

중국은 참신한 정치가의 모습을 원한다

후진타오 앞에는 ‘가장 젊은’이라는 수식어 외에 ‘새로운 세대 지도자’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고 있다. 장쩌민 시대까지는 보통 1세대, 2세대, 3세대라는 말로 각기 다른 지도세대를 구분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들어서는 제4세대라는 말 외에 ‘새로운 세대’라는 수식어가 덧붙여진다. 어떤 이는 이것은 단순한 수사라기보다는 과거 리더십과의 ‘고별’이자 21세기형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지난해 초 홍콩에서 출판된 라는 책에서 저자는 그를 향한 중국인들의 갈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중국 인민들은 후진타오에게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것’을 보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한명의 참신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16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6기 4중전회)에서, 은퇴하는 장쩌민 옆에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후진타오의 ‘새로운’ 시대는 이미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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