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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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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와히드5] 32년 독재 끝… 대통령이 되다

등록 2004-06-18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5 (마지막)]

개혁 주도 대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4인회담… 원기 회복하고 국민각성당 후보로 선거유세 강행군

▣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 구술정리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시사주간지 기자

1998년 5월22일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하루 뒤 나는 시력을 잃어 절망감에 빠졌다.

의사에게 뇌졸중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눈의 염증과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게다가 나는 단 몇분만 앉아 있어도 메스꺼움이 생겨 균형감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기력을 잃었고 혼수상태를 오락가락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몸무게가 15kg이나 빠질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NU 정당’ 아이디어를 승인하다

나는 음악으로 나를 위로하면서 음악으로 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머리맡에 놓인 베토벤과 모차르트 그리고 당둣(말레이-인도네시아풍 대중가요)이든 로큰롤이든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수하르토 퇴진이라는 위기 정국은 나의 모든 것을 시험했다.

6월 중순에 접어들자 새로운 정당들이 홍수를 이뤘다. 합법적인 등록을 했건 말건 수많은 정당들이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나들라툴 울라마(NU) 내부에서도 여러 그룹들이 생기면서 나의 후원을 얻고자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는 당초 NU를 끼고 정당을 만들겠다는 생각들을 근심스럽게 여겼던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NU라는 종교조직과 정당을 연계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믿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7월 들어 생각을 바꿨다. 만약 NU가 정치에 깊이 참여하겠다면, 차라리 거대한 NU 회원들을 통해 정당을 하나 만드는 것이 혼선을 방지하고 내부 통합을 이루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NU는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였고, 창당과 상관없이 NU 이름을 내건 여러 가지 정치적 움직임들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NU 정당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승인했다. 수하르토 잔당인 골카당(Golka)을 물리치고자 나는 거대한 NU 회원조직을 가동하기로 결심했다. 나와 NU 동료들은 국민각성당(PKB)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형식상 국민각성당 지도자로서 아무런 직책을 갖지 않았다. 대신 연합개발당(PPP)에서 오랜 정치적 연륜을 쌓아온 마토리 압둘 잘릴(Matori Abdul Djalil)을 지도자로 뽑아 전면에 내세웠다.

나는 NU가 골카당을 물리치려면, 분파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이들에게 국민각성당의 문을 활짝 열고 사회 각 분야 대표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11월에 접어들자 개혁운동을 주도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달갑잖은’ 영웅들인 아민 라이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그리고 나에 대한 ‘참을성’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학생들은 모든 사안을 자신들 손에 두자는 결정을 내렸다. 11월10일, 특별국민협의회(MPR)의 4일간 특별회의가 열리기 바로 전날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지지해온 개혁파 3인을 소환했다. 대학생들은 내 건강과 상관없이 남부 자카르타 치가뉼에 있는 내 집을 회담 장소로 정했다. 그리고 대학 도시로 소문난 족자카르타에서 학생들의 개혁운동을 지지하던 술탄도 그 회담에 참여했다.

그렇게 개혁주의자로 불리는 4명은 회담 뒤 이른바 ‘8개항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8개항은 별로 새로운 내용을 담지 못함에 따라 학생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예컨대, 군부가 6년 뒤 국민대표회의(DPR)에서 철수해 정치무대를 떠난다는 조항 같은 것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현실정치와 학생들의 열정이 쉽사리 타협점을 찾지 못한 회담이었다. 학생들은 당연히 4인회담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다만 우리는 회담을 통해 하비비 대통령에게 어떤 경우에도 선거를 지연시키지 말 것을 경고했고 동시에 과도정부를 인정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사실 4인회담은 그런 성명서들보다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개혁주의자 4명(논란 여지가 많지만)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자체가 큰 의미였다. 그건 동맹도 동반자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첫 출발인 것만은 분명했다.

하비비와 동티모르, 그리고 초토화

1999년 1월 내게 경종을 울리는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군부와 민병대들이 새로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 탓이다. 수많은 국내 문제들로 골치를 앓던 하비비 대통령은 1월27일 동티모르인들에게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의하면서 동티모르 자치를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나는 인도네시아가 새 정부를 구성하기도 전에 과도정부를 이끄는 하비비 대통령이 동티모르 국민투표 결정을 내린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인도네시아가 정치 개혁을 하기 전에 동티모르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면 군부가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를 지원해서 동티모르에 치명적인 혼란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반대했다. 결국 내 염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위란토 장군 진영에서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를 동원해 동티모르를 불지르고 학살하는 이른바 ‘초토화정책’을 시행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각성당 내부와 시민들 사이에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점점 높아갔다. 그러나 창당 때부터 나를 대통령 후보로 여겨온 국민각성당은 마지막 순간까지 후보 지명을 유보했다. 그 무렵까지 내가 구토 증세와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3월이 지나면서 내 병세는 크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들어 나는 완전히 원기를 회복했다. 18개월 전에 뇌졸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4월 중순까지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선거운동 연설을 했지만, 4월 말부터는 서서 1시간 넘게 연설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좋아한 나로서는 선거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이동하면서 잠을 잘 수 있는 여행을 휴식처럼 즐겼기 때문이다. 내겐 고리타분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일보다는 여행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자동차나 비행기에 앉아 5~50분 정도 눈을 붙였다가 다음 선거운동 지역에서 연설하는 일정을 나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32년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쫓겨난 뒤, 1999년 10월20일 최초로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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