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2]
카이로와 바그다드를 넘어 유럽까지 경험과 영감을 안겨준 젊은 유학시절의 방황
▣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 구술정리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시사주간지 기자
그렇게 게걸들린 ‘책읽기’는 내 청소년 시절의 전부였다. 닥치는 대로 책을 집어들던 내게 모든 책들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천박하고 엽기적인 소설들도 내겐 세상을 읽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나는 중국 무협지에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그 무협지들 속에 날아다니는 장수들 싸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부와 제자들 사이에 흐르는 그 죽음을 초월한 ‘충성심’ 같은 것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또는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 나는 그 ‘사제관계’를 인도네시아 교육사업의 정신적 바탕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알 아자르 대학에 정이 떨어지다
같은 시절 내가 읽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해리 트루먼 같은 미국 대통령들 전기도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책읽기를 제외하고 내가 청소년기에 관심을 가졌던 건 영화와 자와의 전통 그림자극?와양 쿠리트(Wayang Kulit)였다. 나는 2~3주에 한번씩 찾아오는 새 영화와 와양 쿠리트를 쫓아 어디든 달려갔다. 책읽기가 정적인 지식을 제공했다면, 영화와 와양 쿠리트는 동적인 영감을 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책읽기는 점점 심각한 분야로 옮겨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넘기면서 다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사회주의 계열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즈음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이 크게 약진하면서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책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워가던 나는 페산트렌(Pesantren·무슬림 학교)에서 더 이상 만족감을 얻지 못했고, 내 눈길은 자연스레 외국으로 옮겨졌다. 그건 내가 비록 아랍어 시구를 줄줄 꿰고 아랍어 문법을 독파했으나 여전히 종교적 통찰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다.
22살 되던 해, 나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이집트 카이로에 정착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들끓던 카이로는 성지순례지로서, 또 학문 중심지로서 그야말로 대단한 도시다. 특히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유럽 대학을 능가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데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학풍을 지닌 알 아자르(Al Azhar) 대학은 학생들 마음을 사로잡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알 아자르 대학은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현대적 이슬람 지식인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알 아자르 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깊은 열망을 지녀왔음에도 한편으론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알 아자르 대학은 이미 몇십년 전 학문적 정점을 지나버려 인도네시아 페산트렌에서 공부한 내게 새로움을 줄 만한 신선함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대학은 내게 아랍어 교정과정을 이수하라는 답답한 학칙을 내렸다. 나는 인도네시아 좀방에서 아랍어로 된 전문적인 이슬람법과 이슬람교리 과목을 이수했지만, 아랍어 학습 자격증이 없었던 탓이다.
그 결과 나는 내 아랍어 능력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아랍어 알파벳 과정에 들어가서 아프리카나 유럽에서 온 초보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배치됐는데 교실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1964년을 대부분 카이로에서 벌어지는 축구경기와 프랑스 영화 보기로 때웠다. 그 나머지 시간은 카페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논쟁으로 지새웠고.
알 아자르 대학이 내게 실망을 준 대신, 위대한 도시 카이로는 많은 경험과 영감도 안겨주었다. 유럽의 르네상스 이전 ‘이슬람의 황금시대’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는 고대 카이로에서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볼 수 없는 이슬람의 역사와 전통을 배웠다. 나는 돌무덤으로 뒤덮인 카이로를 기웃거리면서 현대와 고대 역사를 읽는 직관력을 얻었다. 내가 독서 범위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일도 카이로가 준 선물이었다. 나는 카이로에서 윌리엄 포크너, 헤밍웨이, 에드거 앨런 포, 카프카, 톨스토이 그리고 푸슈킨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과 만날 수 있었다.
‘대사관 일자리’를 얻는 행운
그 무렵 나는 아랍 전역에서 공부하는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조직한 ‘인도네시아학생연합’ 회장으로 뽑혔다. 그 일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얻었다. 내친김에 나는 1964년 친구 무스로파 비스리와 함께 인도네시아학생연합을 위한 잡지를 창간해 정신없이 글을 썼다.
그러나 고급 ‘이슬람아랍연구소’에서 공부하겠다던 나는 또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이미 모든 과정을 마친 초보 과목들을 연구소가 다시 수강하라고 요구했던 탓이다. 따분해진 나는 다시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카이로에서 몇년을 보내다가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정식 직원으로 고용됐다. 학생지도자로 발이 넓은데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내 능력을 대사관이 높이 산 셈이었다. 그 무렵 대사관 일자리를 얻은 건 내게 엄청난 기회였다. 무엇보다 학비를 충분히 마련하고, 남아도는 돈으로 책을 사고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도네시아 소식과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965년 말 나는 인도네시아가 좌우익 이념분쟁에 빠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다. 카이로 학생사회도 곧장 사태를 읽었지만 단파방송과 몇몇 방문자들로부터 전해듣는 소식만으로는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아랍 외교 창구이던 카이로 대사관 텔렉스를 통해 들어오는 국내 상황을 아랍어와 영어로 번역하면서 최신정보와 접할 수 있었다. 쿠데타 기도설이 있은 뒤 대사관은 내게 자카르타로부터 받은 훈령을 아랍 유학생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건 수하르토 장군이 주도하는 군부가 인도네시아 국내에서 공산주의를 박멸하고 있으니 여행자나 유학생들이 다시 공산주의 이념을 국내에 감염시키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으라는 내용이었다. 이제 고백컨대, 그 무렵 대사관이 나를 선택한 건 내가 마르크시즘을 이해하고 있는데다 글쓰기 능력을 지녔고 또 학생조직으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학생 사회마저 국내 영향을 받아 이념분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내가 지닌 분별력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이런저런 과정을 통한 카이로 경험에서 나는 비로소 종교와 국가 관계가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극화와 극단주의로 치닫는 절망적인 무슬림 사회를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는 암시를 이집트 사상가 사이이드 쿠트브(Sayyid Qutb)로부터 얻었고, 동시에 나는 알-이크완(Al-Ikhwan·무슬림 브라더후드·1928)의 창시자인 하산 알-반나(Hasan Al-Banna)를 공부했다.
그리고 카이로 시절, 나는 인도네시아 좀방에 있던 누리야(Nuriyah)라는 여성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 끝에 편지를 주고받았다. 쾌활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는 청혼자들이 줄지었다. 마침내 1966년 중반 나는 누리야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당신이 나와 결혼할 것인가!’”
누리야가 답장을 보내왔다. “배우자를 찾는다는 건 삶이나 죽음과 같은 일이다. 그건 신만 아는 일이다.”
그리고 얼마 뒤, 누리야는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왜 어떤 이는 모든 걸 실패해야 하나? 만약 당신이 학문에서 실패했다면 적어도 로맨스에서는 성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급히 누리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누리야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장거리 결혼식을 치렀다. 나는 카이로에서, 누리야는 좀방에서. 그런 결혼식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카이로가 따분하게 느껴질 즈음, 나는 바그다드대학 장학금을 받아 이라크로 옮겼다. 그리고 나는 티그리스 강변 커피숍에 앉아 저녁을 맞는 그 멋진 낭만을 3년간 체험했다. 바그다드 시절 나는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아랍민족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편지로 열매 맺은 결혼
내 청춘의 열정은 바그다드에 이어 유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유럽 대학들이 요구하는 기준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예컨대,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독일 쾰른대학은 독일어는 물론이고 헤브라이어와 그리스어, 라틴어까지 요구했다. 이런 언어적 결함 탓에 나는 독일과 프랑스 대학들을 떠도는 청강생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에 머무는 6개월 동안 나는 ‘인도네시아·말레이무슬림학생’ 조직을 결성했다. 나는 그 무렵 엄청난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유조선 청소 같은 막일을 하며 어렵게 견뎌냈다.
그리고 1971년 외국 생활을 접고 인도네시아로 되돌아와 저술가로 수필가로 조직가로 또 정치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