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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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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뜨다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의 총선/ 인도네시아]

시민들 무관심 속에 민주투쟁당-골카당 접전… 4월 총선은 7월 대선의 징검다리일 뿐

총선으로 술렁이고 있는 건 한국만이 아니다.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 아시아는 선거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3월20일 총통 선거를 치른 대만은 아직도 유혈충돌의 불씨가 가시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도 4월 초순에 총선을 치른 뒤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4월 말에는 인디아가, 5월에는 필리핀의 총선이 계속된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살펴보자. -편집자



자카르타=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4월5일 자카르타엔 비가 내렸다. 하늘도 하루 종일 침침했다. 시가지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 그 유권자만도 1억4천만명에 이르는 인도네시아 총선은 그렇게 심심하게 끝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손가락에 잉크 자국이 남아 있는, 말하자면 투표를 한 사람은 딱 1명뿐이었다. 시민들은 선거를 비웃었고 일찌감치 관심을 껐다.

‘부패하지 않은 장성 출신’이라는 이미지

지루한 개표가 계속되는 가운데, 6일째를 맞은 4월11일 밤 10시30분 현재,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의 민주투쟁당(PDI-P)이 20.49%에 해당하는 1432만7966표를 얻어 악바르 탄중 국민대표회의 의장이 이끄는 수하르토의 유산인 골카당(Golkar Party)의 1416만8662표를 아슬아슬하게 앞서고 있다. 두 당의 차이는 0.23%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에서 압두라만 와히드 전 대통령의 국민각성당(PKB)이 12.96%, 함자 하즈 부통령의 연합개발당(PPP)이 8.32%,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정치·안보조정장관의 민주당(Democratic Party)이 7.49%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미 선거 전부터 골카당의 우세를 점치는 여론조사와 분석은 다양하게 나돌았다. 민주투쟁당이 지난 총선에서 거뒀던 33.5%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골카당이 근소한 차이로 제1당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 있는 상태다.

게다가 현재 득표율과 상관없이 민주투쟁당은 발리와 말루쿠 같은 4개 지역에서만 앞선 데 비해 골카당은 수마트라, 칼리만탄을 비롯한 24개 지역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있다.

시민들이야 관심이 있건 말건, 개표 첫날부터 정신없이 바빠진 이들이 있다. 대통령 후보자들이다. 이들은 총선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대통령 선거 채비를 서둘렀다. 7월5일로 잡힌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 직접투표로 대통령을 뽑는데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 3% 이상 표를 얻은 정당만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다는 새로운 정치환경 탓에 후보자들은 ‘암중모색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합종연횡기’로 접어든 기운이다.

그 핵심에 선 인물이 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전 정치·안보조정장관이다. 와히드 대통령과 메가와티 대통령한테 미운털이 박혀 두번씩이나 쫓겨난 적이 있는 유도요노가 ‘스타’로 등극하리라고 예상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유도요노의 화려한 등장은 이번 총선의 최대 이변이었을 뿐 아니라 차기 대통령 선거를 읽는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유도요노는 바빠졌다. 그이 곁에는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충성심이 부족하다며 유도요노를 장관직에서 쫓아냈던 와히드 전 대통령은 총선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먼저 그이를 찾았다.

유도요노의 최대 강점은 수하르토의 군인정치 시대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육군대장 출신이면서도 부패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신선한 ‘이미지’에 있다. ‘군’과 ‘이슬람’을 장악하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유도요노는 군 출신으로 정점에 있는 위란토 전 최고사령관과 당장 좋은 비굣거리가 되었다. 위란토가 비록 대중성은 높지만 동티모르 인권유린과 부패 혐의를 받아온 ‘구닥다리’라면, 아직까지 상처를 입지 않은 유도요노의 강점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것이다.

게다가 유도요노는 인도네시아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승리 조건인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다. 시민들이 수하르토에게 압박받는 인상을 지닌 메가와티를 건졌던 것처럼, 유도요노가 메가와티에게 버림받은 인물이라는 ‘신파적’ 상상력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결국 유도요노는 이번 총선을 통해 메가와티, 와히드, 악바르 탄중을 비롯한 모든 대통령 후보자들이 노리는 ‘금광석’으로 떠올랐다. 이쯤 되자 평소 입이 무거웠던 유도요노는 차기 ‘대망’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이번 총선을 통해 드러난 결과를 놓고 본다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모든 후보자들이 ‘대통령-부통령’ 짝짓기에 나설 것이다. 원한 맺힌 관계 ‘와히드-메가와티’ 짝만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볼 수 없겠지만.

서서히 ‘수하르토 악령’ 되살아난다

지금까지 나도는 합종연횡 방정식은 대개 ‘메가와티-악바르 탄중’ ‘와히드-유도요노’ ‘메가와티-위란토’ ‘위란토-아민 라이스’ ‘아민 라이스-유도요노’ ‘메가와티-아민 라이스’ ‘와히드-위란토’ ‘악바르 탄중-유도요노’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유도요노를 정점에 놓는 그림들도 충분히 가능한 상태다. 예컨대 유도요노 대통령과 와히드쪽 인물 부통령으로 결합하는 방식이 이미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위란토가 골카당 내부의 좁은 입지를 뚫고 대통령 후보에 오른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비록 현재 골카당 내부가 악바르 탄중에 호감을 지녔다곤 하지만, 직접선거가 벌판으로 뛰어드는 대중성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위란토의 가능성은 여전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위란토가 나서면 ‘머리’가 하나 더 붙는 꼴이라 더 복잡한 합종연횡 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형태로 그림을 그려보더라도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도 인도네시아 ‘개혁’은 물건너갔다는 결론이 나고 만다. 시민들이 ‘허약한 민간정부’와 ‘섞은 군인정부’ 모두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인도네시아식 ‘절충’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직 대통령 자리를 건 치열한 음모와 배반이 판치는 가운데, 서서히 수하르토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렇게, 총선 결과를 놓고 바로 대통령 선거로 이어가는 정치 구조 속에서 처음부터 총선 열기를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총선은 대통령 선거를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한명이 세번씩 투표했다?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시사주간지 기자
“세번 씻었다.” 4월5일 선거날, 자카르타 사나이 마남(26)은 손가락을 보여주며 자랑스레 말했다. 마남은 첫 번째 투표를 그이 이름으로, 두 번째 투표는 다른 곳에 사는 형 이름으로 그리고 마지막 투표는 또 다른 동생 이름으로 했다.
“우리 가족 모두 등록하지 못해 투표를 할 수 없다. 이웃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레이라(28)의 말처럼, 이 취재한 자카르타 한복판 케본 카창에서는 90%에 이르는 주민들이 등록을 하지 못했다.
“투표함이 용지보다 더 작은데 비밀선거를 어떻게 해. 찍을 때 남들에게 다 보이잖아?”
이번 선거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이미 폭탄을 안고 출발했다. 수하르토 시절 총선위원회(KPU) 장을 맡아 선거 업무를 주관했던 내무부 대신 이번부터 사회운동가와 교사를 비롯한 시민들이 총선위원회를 맡자 관료들이 손을 놓고 지원을 거부했다. 특히 유권자 등록담당기관인 중앙통계위원회는 발도 떼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들은 호별 방문에서 사람이 없으면 무조건 ‘무인지대’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30%를 웃도는 시민들이 등록을 하지 못했다.
투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지역에 따라 많게는 4장씩 투표용지를 받아들었다. 유권자들은 24개나 되는 정당 이름들 속에서 국민대표회의(DPR), 주의회(DPRD I6), 지방자치의회(DPRD II), 지역대표회의(DPD)를 동시에 선출하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시민으로 구성한 총선위원회가 선거 계획·조직·투명성에서 그전 선거들보다 나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번 선거가 부패나 족벌주의 그리고 공모로부터 자유로웠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시민들 사이에는, 지난번 총선을 담당했던 총선위원회 관련자들이 줄줄이 감방으로 갔듯이 이번 총선위원회 관련자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렇게 총선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부패 냄새를 풍겼고 시민들은 선거의 정당성 자체를 의심해왔다. 이번 총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시민단체들의 몸놀림이 바빠지는 가운데, 이번 총선에 참여한 24개 정당 가운데 19개 정당이 재선거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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