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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는 임금도 떼먹는다

등록 2004-04-16 00:00 수정 2020-05-03 04:23

연공서열제에서 젊은 노동자에겐 생산성보다 낮은 임금… 퇴직 당하면 유보된 임금 보상 못 받아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우리나라에서 평생직장이란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사오정·오륙도에 이어 ‘38선 시대’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다. 38살도 못 넘기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라는 뜻이다. 이처럼 고용조정과 정리해고는 그동안 ‘고용’ 불안이란 측면만 부각됐다. 하지만 정리해고와 명예퇴직 현상에는 ‘임금’ 문제가 뒤섞여 있다. 무슨 말일까?

정년퇴직은 노동자 헌신 유도

우리나라 기업들의 임금보상 체계는 주로 연공급 구조다. 외환위기 이후 연봉제와 성과급이 확대되고 직무급·직능급 도입이 늘고 있지만, 근속연수가 늘어날수록 임금 수준이 높아지는 연공서열 임금 비중이 여전히 높은 편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2003년 1월 현재 100인 이상 사업장 4570곳 중 연봉제 도입 기업은 1712곳(37.5%), 성과배분제는 1256곳(27.5%)에 달했다. 하지만 연봉제나 성과배분제에도 아직 호봉제 같은 연공급적 요소가 상당 부분 섞여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나이에 따른 임금 격차는 얼마나 될까? 노동부의 임금구조기본조사를 보면, 제조업 500인 이상 기업에서 관리직 노동자들의 경우 30∼34살 당시 임금을 기준(100)으로 할 때 55∼64살까지는 300 안팎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무직·전문기술직은 50∼59살의 임금이 150∼160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연공서열 임금체계에서 노동자의 임금곡선은 노동생애 전반기에는 자신의 노동생산성보다 낮고, 후반기에는 더 높아진다. 장기적인 고용계약을 전제로 젊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임금보상을 하고, 나이가 들수록 높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지연보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 노동생산성에 상응해 받아야 할 임금 중 일정 부분을 기업이 유보해두고 있다가 근속연수가 높아지면 나중에 지급하는 형태다.

일반적으로 개별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나이가 들수록 상승하다가 어떤 시점에 도달해 정점을 찍은 뒤 점차 하락한다.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기업 특수적 숙련이 형성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지만 노령화될수록 전체 노동자의 평균생산성보다 낮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생산성이 떨어지는데도 기업은 왜 더 높은 임금을 주는 것일까? 무엇보다 기업은 이런 임금 구조를 통해 노동자의 장기적인 헌신을 유도하고 근로감독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노동자들은 게으름을 피워 해고당하면 나중에 받을 상대적 고임금을 상실하게 되므로 항상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기업이 임금 담보분을 활용해 노동자들을 회사에 오래 붙들어두고 노동강도 강화를 강요하는 것이다.

정년퇴직은 바로 이런 임금체계 때문에 존재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 생산성에 비해 덜 받은 임금을 나이 들어서 지연보상받을 경우, 노동자는 정년퇴직 시점까지 근속할 경우에 한해 노동생산성의 합계와 임금의 합계가 일치하게 된다. 나아가 노동자는 근속연수가 늘어남에 따라 생산성보다 더 높은 상대적 고임금을 받기 때문에 회사에 계속 근무하려 할 것이고, 이런 경우 기업으로서는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강제적인 정년퇴직 나이를 두는 것이다.

퇴직 위로금은 정당한 몫

특히 연공서열 임금구조에서 기업은 일정 시점을 지난 노동자들을 도중에 빨리 해고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는다. 왜 그럴까? 특정 시점에서 보면 젊은 노동자들은 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임금 차별’을 받는 대신 생산성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고령 노동자는 ‘우대’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기업한테는 고령자에 대한 우대가 부담으로 인식되고, 따라서 기업의 손익분기점 이하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고령자를 서둘러 퇴출시키려는 압력이 작용하게 된다. 또 규모가 크고 자본집약도가 높은 기업일수록 지속적인 신기술 도입에 따라 청년기에는 노동생산성이 급속히 증가하고, 기술 습득이 둔화되는 중·고령기에는 생산성 하락이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더 일찍 정리해고하려 든다.

반면에 개별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정년퇴직 이전의 조기퇴직과 정리해고는 커다란 임금손실을 의미한다. 즉, 정리해고는 기업이 해당 노동자들의 임금 유보분을 박탈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은 젊은 시절에 상대적 저임금을 감수하고 회사에 헌신하는 대가로 나중에 직접적인 생산성 이상의, 근속기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일해왔다. 하지만 기업이 이런 약속을 파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연공급은 기업의 ‘속임수 모델’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 연구위원은 “기업이 먼저 암묵적인 계약을 파기할 가능성이 있다”며 “기업이 정년에 도달하기도 전에 노동자에게 여러 가지 금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조기퇴직을 종용하는 것은 계약 위반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명예퇴직 때 본래의 퇴직금 외에 명예퇴직수당·명예퇴직금·명예퇴직위로금 등 각종 이름으로 ‘위로금’이 지급되지만, 이는 사실은 노동자가 기업 내에 저축해둔 정당한 몫의 일부를 받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제대학교 이정우 교수(사회복지학과)는 “명예퇴직 수당으로 지급되는 특별급여는 기업이 시혜적 차원에서 제공하는 급여가 아니라 해당 노동자 자신이 기업 내에 유보해둔 임금의 일정 부분을 되돌려받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 1050명을 희망퇴직시킨 삼성생명은 2년치 평균임금을 명퇴수당으로 지급하고, 남은 임직원들이 상여금을 반납해 모은 돈을 퇴직자들에게 위로금으로 나눠줬다. 삼성생명쪽은 “당시 2년치 기본급을 준다는 명퇴 기준을 공시하고 명퇴 신청을 받았다”며 “그 정도 선에서 명퇴 위로금을 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회사 내에 커먼 센스(합의)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회사 사정에 따라 명퇴 위로금을 더 줄 수도 있고 아예 못 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이는 △근속연수 △정년 때까지 계속 근무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기대임금 △입사 이후 기업이 유보해둔 임금분을 정확하게 계산해 개별 노동자들의 ‘적정한’ 명예퇴직 수당을 산출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업들이 명예퇴직 과정에서 ‘지연보상 임금’이란 대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동소득분배율 왜 악화되나

노동소득분배율(국내총생산 중 전체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이 1996년(64.2%)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해 2002년에 60.9%까지 떨어진 현상도 기업이 조기퇴직을 통해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임금을 박탈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은 “기업이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유보된 임금을 박탈해 이윤으로 챙겨가고 있다고 말하는 건 비약이 있을 수 있다”며 “그러나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에 이런 임금 박탈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외환위기 이후 임금상승률이 노동생산성 증가율에 못 미치고 노동소득분배율이 악화되고 있는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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