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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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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는 죽을 지언정…

등록 2004-04-08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로 살아 여전히 말레이시아 정치를 이끌고 있는 마하티리즘

■ 콸라룸푸르=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 유니스 라오(Eunice Lao)/ 전 기자

“아냐 아냐 아냐. 난 이미 오래 전에 물러나기로 결심했어….”

22년 동안 아시아 현대사를 풍미한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는 결국 흐느끼고 말았다. “부디, 부디 우리 곁을 떠나지 마세요.”

2002년 10월 갑작스레 은퇴 의사를 밝힌 마하티르 총리 앞에서 그를 따르던 수많은 이들이 눈물로 호소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 한편의 ‘신파극’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마하티르 없는 말레이시아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 그러나 족벌주의?

아시아 최장기 집권자 가운데 한명인 마하티르는 국제통화기금(IMF) 편입을 거부한 채, 초유의 ‘자본 통제’라는 실험을 통해 1997년 경제위기를 돌파해내면서 자신의 통렬한 제국주의 비판이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확인시켰다. 마하티르가 내세웠던 민족주의 경제관이 논쟁거리를 남겨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말레이시아 경제개발을 추동했다는 점에서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박정희의 재벌 키우기를 모델로 삼아 국영재벌인 프로톤(자동차)과 페트로나스(원유·가스)를 세워 외국 경쟁자들에 맞선 마하티르는 집권 22년 동안 ‘잠꾸러기’였던 말레이시아에 세계 최고층의 쌍둥이 빌딩을 세워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정치적 압박감으로 숨을 헐떡이던 말레이시아 시민들은 경제위기를 넘어 5.2% 성장을 기록하고 2003년 10월 사무실을 떠나는 마하티르에게 찬사를 보냈다.

“마하티르는 자신의 업적이 정점에 있을 때 떠났다.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 사회가 아직도 그를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 떠났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마하티리즘(Mahathrism)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정치학자 파리시 누르(Farish Noor)의 말처럼, 국가 독립성과 현대적 이슬람주의 그리고 경제개발로 정의할 만한 마하티리즘이 말레이시아를 끌어온 동력이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 마하티르의 전설도 영원할 수 없는 듯, 요즘 말레이시아에서는 마하티르 ‘해부’가 한창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말라야대학의 순다람(Jomo Kwame Sundaram) 교수 같은 이들이 날카로운 칼을 들이댔다. “마하티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을 자신의 최대 경제 업적으로 삼았으나, 결과적으로 그 경제정책은 민족주의 수사학에 지나지 않았다. 쓸모없기는 국제통화기금의 조언과 마찬가지였다. 마하티르의 최대 강점은 동시에 최대 약점이었다. 그는 오만스럽고 독단적이었다. 그는 말레이시아 경제를 본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여러 처방전을 무시했다.”

순다람 교수는 마하티르 경제정책의 최대 취약성으로 ‘족벌주의’를 꼽았다. “정부는 불필요한 거대 인프라 개발과 정당성이 부족한 계획들을 마하티르 족벌에게 무더기로 발주했다. 독점적 지위와 금융지원을 통해 자란 말레이시아 기업들은 내부 경쟁을 거쳐 국제 경쟁력을 높여온 한국과 대만에 비해 큰 취약성을 지녔다.”

역사학자 쿠 케이 킴(Khoo Kay Kim)은 마하티르의 최대 약점으로 분배 정의 왜곡을 꼽았다. “그의 민족주의 경제개발은 허상이다. 20년 동안 신경제정책(NEP)은 산업개발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뿐, 사회복지와 농업 부문을 무시했다. 비록 1970년대 49%에 이르던 빈곤층이 1990년대 15%로 줄었다고는 하지만, 같은 기간 도시와 농촌간 그리고 인종간 수익 불균형은 더욱 확대됐다.”

그동안 금기였던 마하티르 ‘비판’은 이제 시민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안정도 좋지만 숨통을 열어주지 않던 그 세월은 답답하고 따분했다.” 예술가 장피밍처럼 마하티르의 ‘압박 정치’를 고단하게 여겨온 대부분의 시민들도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혀 놀랍지 않은 내각!

따지고 보면 경제개발과 정치적 압박을 맞바꾸며 위태롭게 달려온 마하티르는 마지막 순간에 씻을 수 없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마하티르는 한때 가장 총애하던 2인자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부총리를 부패와 동성애 혐의로 잡아넣으면서 본격적인 ‘악명’을 얻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프로 안와르’를 민주화 열망으로 전이시킨 시민들을 모질게 후려치면서 스스로 ‘안티 마하티르’ 정서를 살포하고 말았다. 1999년 선거에서는 이슬람 정당 PAS가 ‘안티 마하티르’ 하나만 외치고도 두개 주를 석권할 수 있었고, 더욱이 마하티르는 고향인 케다에서조차 쓴맛을 볼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마하티르의 성공 신화는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다. 언론을 장악한 정부가 만들어낸 과대선전일 뿐이다. 그걸 시민들이 늦게 깨달았다.” 순다람 교수는 마하티르 정치의 허구성을 맹렬히 비난했다.

“나를 미워했던 이들은 이제 내가 정치판을 떠난 마당에 민족전선(BN·여당연합체)을 찍지 않을 까닭이 없다.” 마하티르는 그의 ‘상속자’들을 뽑는 지난 3월21일 총선에서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사람들에게 여당 지원을 호소했다. 마하티르는 또 후임자 압둘라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 총리가 이미 보증받은 지도자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마하티르의 정당인 말레이시아연합국민기구(UMNO)는 마하티르가 뒤로 물러나 앉아 은퇴를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하티르의 업적을 팔 수 있다고 믿었던 UMNO는 PAS와 최대 격전지였던 마하티르의 고향 케다로 그를 불러냈다. 내친 김에 마하티르는 특유의 ‘도발성’을 드러내며 PAS를 공격했고, 그 상속자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두려워하며 다시 마하티르와 거리를 두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무튼 마하티르가 떠난 뒤 처음으로 치른 총선 결과 BN은 전체 의석의 90%를 장악하는 압승을 거뒀고, 그 모든 성과는 팍라(Pak Lah·압둘라 총리를 지칭) 현상으로 귀착됐다. 야당 지지자들마저도 전임 마하티르의 공격적인 독설과 좋은 대조를 보인 압둘라의 ‘비전투적’인 부드러움과 정중함에 표를 던졌다. BN의 승리에는 압둘라 총리가 ‘부패척결’ ‘경제개발’ ‘대안적 진보’ ‘관용적 현대 이슬람’을 담은 이른바 이슬람 하다리(Islam Hadhari·이슬람 통치)를 선언하면서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마음을 모두 움직였던 게 크게 작용했다. 또 압둘라 총리는 새 피를 수혈해 지도력을 바꾸고 개혁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과연 무대 뒤에서 힘을 발휘할까

그러나 압둘라 총리의 새 정부 인물이 드러나자 언론들은 ‘놀랍지 않은 내각’이란 별명을 달아 시민들의 불쾌함을 대신 전했다. 새 내각의 핵심에는 여전히 마하티르의 ‘충성파’들이 포진해 있었고, 마하티르가 심어놨던 대부분 주의 장관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모두 새 인물로 교체하겠다”고 선거 중에 밝혔던 압둘라 총리의 말이 헛소리로 드러났다. 그렇게 첫 시험에서, 압둘라는 마하티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탄로났다. 다만 압둘라가 마하티르에 비해 이슬람 언저리를 좀더 노닐고 있다는 사실만 다를 뿐.

마하티르는 압둘라 내각에 대한 인상을 묻는 과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그러나 어리벙벙한 말을 남겼다. “나도 처음엔 압둘라 총리처럼 부패척결을 주장하며 승리했다. 그러나 부패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그 부패는 계속될 것이다. 부패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그 말이 압둘라 총리가 마하티르의 모든 공과를 계승할 것이라는 뜻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아무튼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본다면 둘은 한몸임이 틀림없다.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라면서 마하티르는 늘 세속적인 행동을 했고, 그걸 이슬람의 가치와 정의라고 말해왔다. 마하티르가 진보적인 이슬람 학자인 압둘라를 택한 건, 자신의 추구했던 현대적인 이슬람 운영 속에서 말레이시아를 개발하겠다는 야망의 연장선일 뿐이다.” 정치학자 찬드라 무자파르(Chandra Muzaffar)는 압둘라의 한계를 지적했다. “우리가 끝없이 말해왔듯이, 이젠 압둘라가 진보적인 이슬람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줄 때가 왔다.”

그렇다면 마하티르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처럼 무대 뒤에서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을까? 호사가들은 마하티르가 물러나는 날부터 이 질문을 끝없이 던져왔다.

그러나 이 인터뷰한 말레이시아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아니다”고 확신했다. “압둘라가 마하티르의 은혜를 입고 정부를 떠맡아 단기간에 독립성을 확보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하티르가 현 내각에 심어둔 충성파들을 이용해서 정치를 재단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쿠 케이 킴 교수는 권력을 떠난 이들이 되돌아온 적이 없는 말레이시아의 정치 전통을 마하티르에게도 조심스레 적용했다.

그리고 은 고향 케다주 선거운동 지원에 나섰던 마하티르가 비를 맞는 ‘배은망덕’한, 그러나 ‘명랑한’ 말레이시아 정치를 엿보았다. 지난 22년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졌다. 비 한 방울만 떨어져도 온몸을 던져 마하티르를 에워싸던 그 엄청났던 이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지난 22년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출마자고 고위 공직자고 모두 비를 피해 자리를 뜨는 가운데, 오직 케다주 수석장관과 우산 도우미 한명만이 마하티르를 감싸고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 자동차 퍼다나 리무진(Perdana limousine)으로 쓸쓸히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권력의 최후는 비에 젖었다. 비록 그 권력의 추억을 이용하겠다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권력은 비를 멈추게 할 수도 또 그 비를 피할 수도 없었다.

2004년 4월, 마하티리즘은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는 현실로 살아 여전히 말레이시아 정치를 이끌고 있다. 비록 그 주인공 마하티르는 비에 젖어 전설로 접어들고 있지만.

“압둘라는 마하티르 그늘에 있다”

[인터뷰/ 하디 아왕(Hadi Awang) 말레이시아 이슬람당 대표]

-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당신은 압둘라 바다위(Abdullah Badawi) 총리 아들이 파키스탄 핵 암시장 스캔들에 연루돼 있다고 성토하며 선거전에서 주제로 삼겠다고 했는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결백하지 못해서 사실을 은폐해버렸다는 뜻인가?
= 말레이시아 정부가 핵 암시장과 관련이 있다는 게 아니다. 총리 아들 회사가 탐욕스럽고 어리석게도 충분히 점검하지 못한 채 그런 사업에 손을 댔다는 뜻이다. 그 개인의 잘못이 당혹스럽게도 국가 명예를 더럽힌 꼴이다. 그게 총리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고, 따라서 선거에서 주제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
- 압둘라 바다위 총리 정부와 마하티르 전 정부는 어떻게 다른가?
= 변한 게 없다. 압둘라는 아직도 마하티르 그늘에 있다. 안와르(Anwar) 전 부총리 사안을 보면 알 수 있다. 압둘라는 안와르 구속이 정치적 동기임을 잘 알고 있는데도, 총리가 되고 네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압둘라는 부패 척결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마하티르 주변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잔챙이들만 잡아넣었다.
- 마하티르 전 총리의 22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저항하며 말레이시아 경제를 위한 강력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의 노력과 결정은 독점적인 서구 자본에 맞서 국가를 지켜냈다. 그러나 그는 퇴장하기 전에 강하고 활기 넘치는 민주주의를 진전시켜놓았어야 옳다.
- PAS는 이번 선거에서 참패당하면서 트렝가누(Trengganu)주마저 잃었는데, 기분이 어떤가?
=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패한 까닭은 언론이 정부쪽에 기울어져 있는데다, 경찰이 마을 주민들을 만나지 못하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상적이었다. 지난 1999년 선거 때 투표율이 70%를 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투표율이 거의 90%에 육박한 일만 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우린 선거위원회에 과연 어디서 이런 ‘도깨비 투표자들’이 나타났는지를 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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