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1월 ‘소프트웨어·디지털 콘텐츠 중심의 IT 클러스터’라는 야심찬 목표로 누리꿈스퀘어가 문을 열었다. 정보통신부와 소프트웨어진흥원이 건립한 지상 22층, 지하 4층 건물 등 총 4개의 건물이다.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도 “누리꿈스퀘어에 외국 유수 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를 적극 유치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현실은 어떨까? 그동안 누리꿈스퀘어의 연구개발타워는 6층부터 16층까지 연구개발 관련 업체의 입주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센터는 단 한 곳도 유치하지 못했다. 누리꿈스퀘어 운영총괄팀 박태근 수석은 “현재 연구개발센터 11개층 중 2개층이 비어 있다.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센터가 들어올까 싶어 비워둔 상태지만 유치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글로벌 기업들은 연구개발센터라기보다 홍보센터쯤으로 여긴다. 지난해 11월3일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가 청와대를 찾아 ‘MS기술센터’를 설치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정부가 바라는 해외 유수 기업의 연구개발센터가 아니라 신제품 테스트와 제품 시연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스티브 발머에게 “외국 기업이 투자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과감하게 규제를 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정보기술(IT)·소프트웨어 시장은 척박하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업체보다 외국 소프트웨어가 더 대접받는다. 정부와 대기업의 소프트웨어 납품 단가 후려치기도 여전하다. 정부가 컨트롤타워 구실을 못하고 있다 보니 업체들은 헤맬 수밖에 없다. 소프트웨어 업체 사람들은 ‘삼중고’를 겪고 있다고 한숨을 내쉰다.
외국 기업을 우대하는 분위기는 정부기관의 각종 행사에서도 나타난다. 중견 소프트웨어 업체 부장의 말이다. “몇 년 전 한 IT 관련 정부 산하기관이 10주년 행사를 했는데 행사 하루 전날에야 ‘그 업체 사장이 참석할 수 있겠냐’고 전화로 물어왔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우리 업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기관인데 이 무슨 경우 없는 일인가 싶어서 확인해봤다. 우리 회사 사장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 기관의 직원들은 빌 게이츠의 축사를 받는 일에만 신경쓰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방문이 아닌 영상으로 받는 축사였다.”
관련 행사 때 외국 업체 ‘짝사랑’이에 대해 한 IT 진흥기관의 행사 담당자도 수긍했다. “좀 규모 있는 행사를 준비할 때면 국내 업체 사람들만 초청하면 모양이 안 난다는 분위기가 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도 외국 기업의 관계자나 외국인을 참석시키면 칭찬을 받는다. 특히 소프트웨어 산업 관련 행사라면 글로벌 기업을 먼저 쳐다보게 된다.”
이런 시각은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 단속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 회원사인 한 소프트웨어 업체 관계자는 “협회든 정부 산하기관든 불법 소프트웨어 사용을 방지하거나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를 지원하는 일보다 단속을 더 공격적으로 한다. 불법 소프트웨어 단속이나 저작권 보호가 말은 참 좋지만, 단속 대상이 주로 외산 소프트웨어다 보니 MS나 어도비 등 외국 기업에 유리한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 쪽은 소프트웨어 종류별 단속 현황을 공개하면서도 업체별 단속 현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불법 소프트웨어 단속이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을 키우기 전에 외산 소프트웨어 시장을 개척해주는 식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정부 부처나 공기업이 나서 소프트웨어 단가를 ‘후려치기’ 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정부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해온 한 업체는 “올해 조달청이 납품 단가를 지난해보다 10%씩 낮추기로 하면서 소프트웨어 납품가도 일제히 낮아졌다. 특히 정부기관마다 재계약을 할 때는 전년 대비 5~10%, 많게는 30%까지 추가로 깎자고 나오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나서 ‘소프트웨어 제값 주기’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이 2005년 조사한 ‘소프트웨어 가격정책 현황 조사’에 따르면, 정부 조달 단가가 표준가격보다 30% 이상 싸게 공급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의 델컴퓨터는 시장을 4개로 구분한다. △가정·사무용 △소규모 사업장 △중·대형 사업장 △정부·교육·보건 시장이다. 그중 다른 시장에서는 할인 행사를 자주 하지만 정부·교육·보건 시장에서는 제값대로 받는다. 미국에서는 정부를 상대로 한 IT 제품 판매가 ‘든든한 시장’으로 형성돼 있지만 한국에선 ‘거저 주는’ 시장인 셈이다.
업계 사람들은 IT와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정부의 ‘컨트롤타워’ 부재도 꼬집는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뒤 정보통신부를 해체시켰다. 명목상으로는 IT 정책을 각 부처에 나눠 정책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옛 정통부 산하기관 관계자는 “정통부와 산업자원부가 합쳐져 지식경제부가 출범하면서 소프트웨어 산업도 ‘삽질 마인드’로 대한다. 삽에다 소프트웨어를 넣는 기술이라도 개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물론 각 부처마다 IT 관련 기관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정부 부처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미래 청사진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백의선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친화적인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변화의 축이 어디인지를 모르겠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 때는 청와대가 축이었다. 변화는 위와 아래가 맞물려야 성공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부처별 통합 프로젝트 없어정부 산하 IT 진흥기관도 통폐합을 앞두고 있다 보니 ‘컨트롤’이 안 된다. 소프트웨어진흥원의 경우 지난해 6월부터 원장 자리가 공석이다. 4대 유영민 원장이 지난해 6월4일자로 물러난 뒤 ‘곧 통폐합된다’는 소문이 돌아 원장 자리를 비워둔 것이다.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선 소프트웨어진흥원은 전자거래진흥원, 정보통신연구진흥원 등과 합쳐져 ‘정보통신산업진흥원’으로 통합된다. 4월 임시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통폐합이 진행될 예정이다. 통폐합이 완료될 때까지 소프트웨어진흥원의 원장 자리는 계속 공석으로 있어야 한다.
한 IT 진흥기관 관계자는 “정부의 ‘시그널’이 중요하다. 정부가 소프트웨어 산업을 중시하는 신호만 보내도 인력이 몰리고 산업이 살아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인식 전환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과거 제조 중심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프트웨어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측면이 여전하다. 미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성공 사례를 되짚어보며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산업 육성에 범정부 차원의 역량 집중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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