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 환영 리셉션이 열린 9월2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한국 남자 단체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한 김경문 야구대표팀 감독(50·두산 베어스)이 행사장에 들어서다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56)과 맞닥뜨렸다.
눈인사를 건네는 김 감독에게 로이스터 감독이 일부러 다가가 통역 커티스 정을 통해 인사말을 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축하한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숱한 축하를 받아온 김 감독은 그냥 형식적인 치하로 지나치지 않고 일부러 발길을 멈추고 답례했다. “과찬의 말씀이다. 롯데가 너무 잘한다. 경기 잘 보고 있다.” 27년 프로야구판에 변혁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국적과 나이는 다르지만 닮은 부분이 더 많은 두 감독의 교감 장면 중 하나였다.
2008년 프로야구의 최대 사건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롯데의 돌풍이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외국인 감독으로 부임한 로이스터 감독은 최고의 열성팬을 지닌 ‘만년 꼴찌’ 롯데를 전반기까지 상위권으로 이끌며 제2의 야구 붐을 일으켰다. 야구 인생 처음으로 공식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김경문 감독은 한국 야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으며 전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올해 한 시즌 최다 관중 동원을 기대하고 있다. 올 시즌 프로야구는 전체 일정의 82%가량을 소화한 9월3일 현재 445만여 명의 누적 관중을 기록했다. 이런 추세를 유지한다면 시즌 종료 때 총 관중 수는 542만여 명에 이를 것이란 계산이 나온다. 프로야구 최전성기였던 지난 1995년의 540만6374명의 한 시즌 최다 관중 기록을 넘어서는 수치다.
13년 만의 쾌거의 중심에는 로이스터 감독과 김경문 감독이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9월3일 현재 119만여 명의 홈 관중 동원으로 1995년 LG 트윈스가 세웠던 한 시즌 최다 홈 관중 기록(126만4762명)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는 롯데의 선전이 없었다면, 기록 달성 꿈은 애당초 엄두도 못 냈을 터다. 또 야구대표팀의 올림픽 9전승 금메달의 감동 드라마가 없었다면 후반기까지 이토록 뜨거운 열기를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두 감독은 국적도, 피부색도, 언어도, 지나온 자취도 너무 다르지만 관중을 열광케 하는 야구 스타일만큼은 퍽도 닮았다. 둘은 모두 ‘공격적인 야구’ ‘재미있는 야구’를 지향한다.
2004년 감독으로 데뷔해 5년째 두산을 이끌고 있는 김 감독은 화끈한 공격 야구를 표방하면서 2번이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재미와 성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야구를 적극적인 공격 중심의 선 굵은 미국식 ‘빅볼’과 세밀한 작전 중심의 섬세한 일본식 ‘스몰볼’로 굳이 나누자면, 김 감독은 지난해까지 김성근(SK)·선동열(삼성)·김재박(LG) 감독 등 스몰볼 스타일이 대세를 이루던 야구판에서 김인식(한화) 감독과 함께 ‘빅볼’로 차별화를 확실히 했다.
김 감독의 공격 야구는 베이징올림픽에서도 활짝 꽃피웠다.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국제대회에서 희생번트로 1점을 뽑는 데 집착하지 않고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과감한 강공 작전으로 오히려 대량 득점에 성공했다. 이는 마운드 운영의 미숙으로 중반 이후 실점을 많이 하면서도 끝내 1점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50년간 미국에서만 야구를 해온 로이스터 감독은 당연히(?) 전형적인 ‘빅볼’을 추구한다. 최근 한국 야구에 적응하면서 번트, 계투 작전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는 빈도가 늘고 있지만, 적극적인 타격으로 점수를 뽑으려는 미국식 스타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다.
뚝심으로 대변되는 ‘믿음의 야구’도 닮았다. 두 감독은 자신의 야구 스타일을 확고히 밀어붙이면서 한번 선택한 선수는 계속 기용한다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놨다. 감독이 개입하기보다는 선수에게 주로 맡기는 경기 운영 방식도 ‘믿음’의 다른 표현법이다. 이는 곧 공격 야구와도 궤를 같이한다. 8개 구단에서 가장 타순의 변화가 없는 구단이 바로 두산과 롯데다.
벌써부터 흥미진진한 롯데-두산 맞대결그러나 두 감독이 가장 많이 닮은 점이자 한국 프로야구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결정적 장점은 바로 ‘변혁 마인드’다. 두 사람의 모토가 모두 ‘변화’이고 실행 원칙은 ‘타협 불가’다. 힘만 세던 두산 타선을 5년 사이에 젊고 빠른 팀으로 180도 변모시킨 김 감독은 대표팀에서도 세대교체와 금메달 사냥을 동시에 성공시켰다. 로이스터 감독은 취임 일성이 “롯데를 변화시키기 위해 한국에 왔다”였다.
어느 사회·조직에서나 그렇듯 변화에는 진통이 따랐다. 김 감독은 두산의 체질 개선 과정에서 베테랑 프랜차이즈 스타인 안경현·홍성흔을 내치는 것으로 비쳐져 팬들의 원성을 샀고, 좋은 성적에도 구단과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도 너무 젊고 빠른 선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는 견제를 받았다. 로이스터 감독은 ‘훈련량=성적’이라는 오랜 관념이 뿌리박힌 한국 야구 문화에서 파격적으로 효율 훈련과 자율 훈련을 고수해 “남들 훈련할 때 편히 쉬고 얼마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나 보자”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관철해 기어이 사람들의 수긍을 이끌어냈다. 믿음 못지않은 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두 지도자의 리더십이 똑같지만은 않다. 로이스터 감독이 메이저리그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서 선수들에게 게임을 즐길 것을 강조하는 여유의 리더십이라면, 김경문 감독은 짧고 평범한 선수 경력으로 성공한 ‘잡초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치열한 생존 경쟁을 강요하는 절박함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변화를 향한 고집은 전혀 다른 외형과 환경의 두 감독을 ‘야구’라는 언어로 교감하게 했다.
9월2일 환영 리셉션에서 각별히 인사를 나눴듯 두 사람은 시즌 내내 서로 호감을 표현해왔다. 로이스터 감독이 맞대결에서 패하고도 먼저 손을 내밀며 “좋은 경기 했다”고 경의를 표했고, 김 감독은 로이스터 감독의 유니폼을 들고 찾아가 친필 사인을 부탁했다. 대표팀을 두고 말이 많을 때도 로이스터 감독은 “선수도 감독도 뛰어나기 때문에 금메달도 가능하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두 감독이 이제 플레이오프 직행권이 걸린 2위 자리를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 대결을 벌이게 됐다. 후반기 연승을 몰아친 롯데가 3위로 올라서 두산을 턱밑까지 바짝 추격한 것이다. 화끈한 감독의 두 팀 간 맞대결은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3연전을 했다 하면 한쪽의 완승 또는 완패를 되풀이했다. 전반기까지 15번 맞붙어 8승7패(두산 우위)의 호각세였다.
어느 팀이 이겨도 좋다. 한국 프로야구에 큰 변화의 물길을 트고 있는 두 감독의 뚝심 있는 공격 야구 맞대결은 승부를 초월해 팬들을 더욱 즐겁게 할 따름이다. 그들이 달굴 올해 가을 야구 잔치는 야구계에 길이 남을 ‘제3의 사건’이 될지도 모르겠다.
김동환 기자 hwany@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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