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의 세대교체와 ‘예쁘고 똑똑한 선수 키우기’에 돌입한 안익수 감독
▣ 조범자 기자 anju1015@hanmail.net
“‘장미 한 송이’가 뜨면 상대팀이 다 죽는다며?” “‘여자 박주영’ 박희영은 또 어떻고? 페널티 지역에서 걸렸다 하면 그냥 골이래.”
한국 여자축구에 꽃 피는 봄이 왔다. 많은 축구팬들이 심심찮게 여자축구를 화젯거리로 올리며 “요즘 한국 여자축구 볼 맛 난다”며 희색이다. 이유?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각종 축구전문 인터넷 게시판에는 “답답한 축구로 실망감만 안기는 남자축구보다 여자축구가 훨씬 재미있다”는 글이 오르고, 축구팬 사이에 여자축구 보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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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대표팀으로 갈수록 경쟁력 높아
변화의 시작은 올 1월부터였다. 안익수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평균연령 22살의 ‘젊은 팀’으로 확 바꿔놓았다. 그 결과 비록 국제 경험은 적지만, 젊고 실력 있고 개성 넘치는 어린 선수들이 대거 태극마크를 달았고 주전 자리를 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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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한 송이’는 대표팀에서 ‘여자 박지성’으로 불리는 이장미(23·대교)와 간판 공격수 한송이(23·충남 일화)다. 설봉중-장호원고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장미 한 송이’의 위력을 발휘하더니,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팀을 거치면서 만만찮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5월 아시안컵 여자축구대회에서 한국이 5년 만에 일본을 꺾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탠 박희영(23·대교)과 차연희(22·대교)는 어느새 대표팀 기둥이 됐다. 차연희가 흔들고 박희영이 쏘고. 바로 대표팀 득점 공식이자 필승 카드다.
‘안익수호’가 출발부터 신바람을 낸 건 아니었다. 첫 대회인 2월 동아시아연맹컵 선수권에서 중국, 일본, 북한에 내리 패하며 꼴찌로 대회를 마쳤다. 하지만 5월 아시안컵대회에서 5년 만에 일본을 꺾는 이변을 연출했고, 6월 피스퀸컵 국제여자축구대회를 통해선 세계 정상급 강호들을 상대로 한층 짜임새 있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린 선수들이 조금씩 커가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빠르고 간결한 패싱 게임, 골을 향해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축구, 상대 수비진의 뒷공간을 노리는 예리한 스루패스, 그리고 매서운 자신감. 축구팬들은 남자 대표팀에게 갈구하던 ‘웰메이드’ 축구의 묘미를 비로소 여자 대표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안익수 감독은 세대교체의 모험을 하면서 몇 번이고 강조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2∼3년 후의 우리 아이들을 봐주세요. 분명 의미 있는 발전이 있을 겁니다. 지금 대표팀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팀이며, ‘희망’을 만드는 팀입니다.” 2011년 월드컵과 2012년 올림픽을 겨냥해 한땀 한땀, 한올 한올, 촘촘하고 단단하게 짜고 엮어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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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관계자들이 더욱 가슴 설레는 건, 연령대가 낮은 대표팀으로 내려갈수록 실력과 경쟁력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보다 권하늘(위덕대), 김수연(한양여대), 심서연(여주대)이 있는 19살 이하 대표팀이, 또 그보다는 지소연(위례정보고), 여민지(함성중)가 있는 17살 이하 대표팀이 세계 수준에 더 가까이 접근해가고 있다.
짧은 머리·체벌 금지, 학습지 제공
여자축구를 성장시키기 위해 한국여자축구연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국제대회 성적 포기’였다. “금메달을 접자”는 것부터 시작했다. 대신 여자축구 선수들을 늘리는 걸 1차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숙제는 ‘예쁘고 똑똑한 선수 키우기’. 축구 잘하는 선수? 운동신경이 좋은 선수? 다 필요 없었다.
유영운 여자축구연맹 사무국장은 “2006년 피스퀸컵 국제여자축구대회 때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의 미국 대표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모든 선수가 아주 예뻤고, 정말 즐겁게 공을 찼다. 이제까지 여자축구 선수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멍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당장 내 딸아이에게 여자축구를 시키고 싶도록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예쁜 선수’로 키우기 위해 선수들에게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자르지 못하도록 했다.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 운동에 방해되지 않는 한 머리도 기르고 예쁘게 부분 염색도 하고 외출할 땐 가급적 화장도 하며 ‘천생 여자’처럼 꾸미도록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행동거지가 남자 같으면 즉각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안익수 감독은 “남자친구가 ‘내 애인이 여자축구 선수’라고 자랑할 만큼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똑똑한 선수’를 만들기 위해선 초등학교 선수들에게 학습지를 보급했다. ㈜대교눈높이가 4년 전부터 각 초등학교 여자축구 선수들에게 영어와 한자 학습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교사 방문도 무상 지원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연맹 가운데 여자축구연맹이 유일하다.
또 초등학교 감독들에게 체벌을 일절 금지시켰다. 하루 훈련 시간도 2시간30분을 넘지 못하게 했다.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모든 학교 수업을 받도록 권고했다. 대다수의 감독들이 “연맹이 미쳤다”고 성토했다. 훈련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곧 경기력 저하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축구연맹의 의지는 단호했다. “내 딸처럼 키우자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요즘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애지중지 키우는 귀한 딸에게 거칠고 힘든 운동을 시키겠냐는 얘기다. 눈앞의 성적보다는 많은 선수를 발굴하고 키우는 게 몇백 배 중요한 과제였다.
그 결과 의미 있는 성과가 보였다. 농구와 배구 등 거의 모든 종목이 갈수록 초등학교 선수들이 줄어 애를 태우고 있는 반면 여자축구를 하겠다는 꼬마 선수들의 수가 감소세 없이 꾸준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예전엔 육상, 하키, 핸드볼에서 전향한 선수들 일색이었던 반면 이젠 처음부터 여자축구로 시작한 선수들이 100%를 차지하고 있다.
“10년 내로 세계 정상에 오를 것”
여자축구연맹은 현재 1500명에 불과한 등록선수가 5년 내엔 1만 명으로, 10년 뒤엔 4만∼5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성적 역시 현재 FIFA 랭킹 23위의 한국 대표팀이 2년 안에 15위권에 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어린 선수들의 국제경쟁력을 감안한다면 5년 내 세계 4강 진입도 절대 꿈이 아니라고 했다.
이의수 여자축구연맹 회장은 자신한다. “두고 보라. 10년 내 한국 여자축구가 세계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수많은 종목에 걸쳐 세계 스포츠 무대를 들었다 놓는 한국 여자 선수들인데, 그것도 한 명이 아닌 11명이나 뭉쳤는데. 슬그머니 그의 호언을 믿고 싶어졌다.
‘뻥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남자축구가 답답한가. 그럼 여자축구로 한번 눈길을 돌려보자. 하지만 이후에 대한 책임은 절대 지지 못하겠다. ‘만들어가는 축구’의 묘미에, 진정한 축구의 매력에 흠뻑 취해 빠져나오기 힘들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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