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가장 짧다는 센터로서 한국 프로농구 최고령 기록 이어가는 이창수 선수
▣ 김동환 기자 hwany@sportsworldi.com
“너 키가 몇이냐?”
“186cm요.”
“학교는 어디야?”
“군산고등학교 배정받았는데요.”
더벅머리 소년의 어눌한 대답에 남루한 베이지색 점퍼를 입은 중년 아저씨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1985년 2월의 차가운 어느 날 오전 전북 군산시 한 안경점 앞길에서 소년 이창수(39·울산 모비스)는 그렇게 농구 인생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길거리 캐스팅’이었다. 그 소년이 23년이 지난 지금 한국 프로농구에 작은 이정표를 하나 세우려 한다.
군산고 입학해 농구부에 ‘길거리 캐스팅’
이창수는 지난 5월14일 자유계약선수(FA)로 모비스와 연봉 1억1천만원, 옵션 1500만원 등 1년간 총액 1억2500만원에 계약했다. 1969년생인 이창수는 2008∼2009 시즌을 뛰게 됨에 따라 한국 프로농구 최고령 선수 기록을 이어가게 됐다. 동시에 해가 바뀌는 시즌 중반쯤 그는 첫 40대 농구선수가 된다. 말이 마흔이지 농구에서 마흔 살은 축구나 야구 같은 다른 구기 종목의 쉰 살과 맞먹는다. 단시간에 워낙 많은 체력을 소진하고 무릎과 발목 등에 부상 위험이 큰 특성 때문이다. ‘농구 대통령’으로 불렸던 허재 KCC 감독도 서른아홉 살이던 2004년 코트를 떠났고, 불세출의 슛쟁이 이충희 전 오리온스 감독도 코트를 평정했지만 세월의 벽은 넘지 못했다.
그러나 이창수는 해냈다. 실업 및 프로에서 17년간 줄곧 주전과 식스맨 사이를 오가면서 버텼고, 국가대표팀이라고는 2003년 ABC 대회에 딱 한 번 출전해본 것이 전부이고, 상이라고는 2005∼2006 시즌 식스맨상 수상이 유일한, 철저히 ‘비주류’였던 그가 해냈다. 그것도 수명이 가장 짧다는 센터를 평생 맡으면서. 게다가 운동선수에게는 치명적인 만성 간염을 몸에 달고 살면서.
군산고 입학을 며칠 앞둔 1985년 2월의 그날 우연히 길에서 최홍묵 군산고 코치를 만나 다짜고짜 “농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이창수는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작고한 아버지 고 이출로씨가 1960년대 실업농구 농협에서 포워드로 활약한 선수였던 것이다. 그 길로 집에 뛰어가 어머니에게 농구를 시켜달라고 했을 때 어머니는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한참을 멍하니 고민했다. 결국 “네 피를 속일 수 없다면…”이라며 허락하고 말았다. 무명 선수이던 남편의 허망한 인생을 바로 옆에서 애태우며 지켜봤기에 그것을 아들에게 대물림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 열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게다.
그날 오후 곧바로 농구부 숙소로 찾아가 입회 신청서를 내면서, 소년 이창수는 군산고 입학과 동시에 농구선수가 됐다. 그러나 뒤늦게 기본기부터 배워야 했던 그가 고등학교 3년 만에 엘리트 선수로 성장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완의 대기’ 이창수를 오늘날 ‘불혹의 대선수’로 클 수 있게 한 것은 최부영 경희대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이른바 ‘마이너리거’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빛이 살아 있는 이창수를 1학년 때부터 주축 센터로 집중 단련시켰다. 경기를 제대로 못하면 서울 잠실체육관이나 장충체육관에서 경희대까지 뛰어오게 하는 등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한 최 감독 아래서 이창수는 갖은 지옥훈련을 참아내면서 ‘싹수’를 키웠다.
아들은 ‘농구 인생’ 비껴가면 좋으련만
이제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창수는 말한다. “아들 원석이에게 농구를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 이상 크고 장래 희망에 ‘농구선수’라고 써 내는 아들을 무슨 수로 말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석이가 좀더 커서도 농구를 해야 되겠다고 한다면 나도 허락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90년 농구대잔치에서 이창수는 한 경기에서만 25리바운드를 잡아내며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머지않아 서장훈이라는 ‘괴물’ 센터가 등장하면서 깨졌지만, 종전 기록을 4개나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무명 이창수가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알린 사건이기도 했다. 그 경기를 계기로 주변의 관심과 자신감을 얻은 이창수는 일취월장해 1992년 졸업과 함께 당시 최고 명문 실업팀 삼성전자에 입단했다.
김현준, 김진, 강을준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호흡을 맞추며 이창수는 삼성전자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꿨지만, 하마터면 프로농구가 출범하기도 전에 코트를 떠날 뻔했다. 1996년 8월 말 결혼을 3주 앞두고 만성 간염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은 것이다. 복부 통증을 6개월 가까이 참고 운동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담당 의사는 운동을 그만둘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창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병상에서 박차고 일어나 9월16일 2년여 열애한 동갑내기 신부 김영훈씨와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리고 1년 동안 치료와 체력 강화에만 전념했다. 병세 호전으로 1997년 여름 팀에 합류했으나 한 달도 안 돼 간염이 재발하고 말았다. 다시 ‘올 스톱’이었다.
절망감이 극에 달했다. 정말 포기할 뻔도 했다. 그러나 이창수는 또 한 번의 눈물 나는 투병 끝에 1998년 기어이 코트로 돌아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개를 돌리니까 내가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보였다. 모든 것을 참고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아내였다. 행여 내가 스트레스라도 받을까봐 모든 근심과 고통을 혼자 속으로 삭인 여자가 무언으로 나에게 계속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간염이 만성이 돼버린 이창수는 아직도 약을 달고 산다. 하지만 병마를 두 번이나 물리치고 돌아온 이창수는 열정과 집념이 더 강해졌다. 1999∼2000 시즌 전 경기를 뛰며 평균 6.2점 2.9리바운드를 기록해 최고의 한 해를 보냈고, 2000∼2001 시즌에는 첫 우승도 맛봤다. 2002년 FA가 돼 모비스로 옮긴 뒤에도 2·3쿼터에 없어서는 안 될 백업 센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고, 2006∼2007 시즌 모비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난 3월1일 2007∼2008 올스타전에 15살이나 어린 팀 후배 함지훈의 ‘대타’로 출전하면서 역대 최고령 올스타 기록도 남겼다.
궂은일 도맡는 포지션이라 기피 말길
프로 출범과 함께 키 크고 힘센 외국인 선수들의 공세 속에 토종 센터들이 설 자리를 잃고 조기 은퇴하거나 포워드로 전향하는 가운데서도 이창수는 자기 자리를 지켰다. 단 5분을 뛰고 슛 기회가 한 번도 오지 않더라도 이창수는 100kg이 넘는 그들에 맞서 거친 몸싸움으로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했다. 얼굴에는 열 군데도 넘는 꿰맨 흉터와 수차례의 수술로 삐뚤어진 코뼈가 벼슬처럼 남았다.
“솔직히 조카뻘 되는 후배들과 몸싸움을 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게 내 삶이고 운명이다. 화려하지 않고 궂은일을 도맡아야 하는 센터를 요즘 어린애들이 피하려는 추세에서 내가 보여주고 전해줘야 할 것도 많다. 그렇다고 추하게 선수 생활을 연명하고픈 생각은 절대 없다. 내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순간 언제라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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