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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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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너는 내 운명

등록 2008-05-16 00:00 수정 2020-05-03 04:25

‘돌아온 제자’ 박태환과 베이징 올림픽 ‘골든 프로젝트’ 진행 중인 노민상 감독

▣ 글·사진 조범자 기자 anju1015@hanmail.net

‘이 얘기를 어떻게 아버님께 전해야 하나.’

2004년 8월 유난히 더웠던 어느 여름날. 노민상 감독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입도 바싹바싹 말랐다. 몇 시간 전 2004 아테네올림픽 수영 경기 텔레비전 중계 해설위원으로 나가 있던 안창남씨가 국제전화로 전해온 소식 때문이었다.

아테네 올림픽, 실격의 아픔 딛고

“노 선생, 태환이가 실격됐어. 자유형 400m에서 스타트 총소리도 울리기 전에 물속에 들어가버렸거든. 팔 한 번 못 저어보고 나왔어. 태환이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7살 때부터 박태환(19·단국대) 선수를 가르친 노민상 감독은 아버지 박인호씨를 조용히 밖으로 불렀다. 소주나 한잔하자 했다. 박씨는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자마자 노 감독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아무리 텔레비전 중계를 봐도 태환이 소식이 안 나오네요. 별일 없는 거죠?”

노 감독은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실격 소식을 전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씨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죠.” 두 남자는 밤새도록 말없이 소주잔만 기울였고, 같은 시각 아테네의 선수단 숙소에선 한국 올림픽 대표팀 최연소 선수로 주목받았던 열다섯 소년이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금쪽같은 제자의 첫 올림픽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니야, 태환아, 아니야! 왼손이 그게 아니잖아. 이렇게 좀더 밖으로 빼야지. 왼손 신경써!”

2008년 4월25일 태릉선수촌 수영장. 노민상 한국 경영 대표팀 총감독의 표정이 조급해 보였다. 목소리에도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노 감독이 급해진 건 3월1일부터 2008 베이징올림픽 자유형 400m 예선이 열리는 8월9일까지 24주간의 일정을 주간·일간·시간 단위로 촘촘하게 세워놓은 계획이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박태환이 4월 2008 동아수영대회 자유형 200m와 400m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2개나 세운 뒤 기자회견장에서 갑자기 “외박은 나의 힘!”을 외치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휴가를 사흘씩이나 내줬다. 박태환은 날아갈 듯 기뻐했지만, 노 감독은 후회막급이었다.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고 이날 태릉에 들어온 박태환의 몸이 다소 무거워 보이면서 노 감독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러나 노 감독은 “장사를 하더라도 밑지면 안 되잖아요? (예정에 없던 휴가로) 내가 조금 밑졌으니 이제 본전을 찾아야죠. 앞으로 더 심한 훈련이 이어질 겁니다” 하고 슬며시 웃었다.

그들의 두 번째 올림픽이 시작됐다. 첫 번째 올림픽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니, 그때는 잘 키워서 대표팀에 들여보내기만 했지 함께 올림픽에 가진 않았기 때문에 이번이 사실상 첫 올림픽이라 여긴다. 그러면서 노 감독은 말한다. “태환이에게, 이번 올림픽에, 내 목숨을 다 걸었노라”고.

노 감독은 지난 2월26일 그 좋아하는 술을 딱 끊었다. 이날은 ‘10년 제자’ 박태환을 1년여 만에 다시 만난 날이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이었고, 대표팀을 이끌고 먼저 전지훈련 와 있던 노 감독이 손수 차를 몰고 공항까지 박태환을 마중나왔다. 숙소까지 가는 동안 둘은 별말이 없었다. 노 감독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 ‘편하게 자고 내일 오후에 보자’고 말한 게 전부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금주’를 선택했다.

스폰서 문제로 갈등, 10년 콤비 위기

2006년 12월 카타르 도하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의 3관왕(자유형 200m·400m·1500m 금메달)을 조련한 뒤 노 감독은 힘들었던 지난 기억이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났고, 2008 베이징올림픽 계획을 세우느라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정말로 힘든 순간은 그때부터였고, 올림픽 프로젝트도 무용지물이 됐다. 수영용품 스폰서 문제로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면서 그동안의 믿음이 틀어진 것이다. 급기야 박태환은 새 후원사와 새 코치를 택해 촌외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승의 품을 떠난 1년간, 달콤한 열매와 맞닥뜨리기 싫은 슬럼프를 차례로 겪은 박태환은 다시 옛 스승을 찾았다. 생애 두 번째 올림픽을 5개월 남겨둔 때였다. 노 감독은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다음날 오후 박태환을 불렀다.

“너에게 내 생명을 걸었다. 스타 의식을 버리고 자세를 낮춰라. 그리고 묵묵히 훈련을 따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박태환은 훈련 몇 시간 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생님, 제 몸이 아직 안 됐어요.” 오랜만의 강훈련이 벅찼던 것이다. 박태환의 체력과 유연성은 노 감독의 예상을 크게 밑돌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오히려 처음부터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7살의 어린 박태환을 처음 마주한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이때 ‘박태환 골든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 송홍선 박사와 몇날 며칠 밤을 머리를 맞댄 끝에 완성한 것이다. 이른바 ‘금메달 만들기 계획표’다. 이 가운데는 하루에 1만m의 물살을 가르는 지옥훈련인 ‘피크데이’가 있고, 일주일에 1∼2번쯤은 오전 훈련을 쉬는 ‘해피데이’도 있다. 운동생리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훈련으로 최대의 효과를 뽑아내는 작업이다. A4용지 1장이 일주일 분량. 노 감독은 A4용지 24장을 테이프로 다닥다닥 이어붙이곤 보물단지 모시듯 늘 지니고 다닌다.

스타트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3월 열린 한라배 대회에서 박태환은 지구력이 크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기록에 못 미쳤다. 스승과 다시 손잡은 지 20여 일 만의 일이다. ‘박태환, 베이징올림픽 메달 빨간불!’ 성급한 추측이 줄을 이었다. 노 감독은 “다시 함께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안 된 때였다. 어떻게 성적이 날 수 있겠나. 정말 그땐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표현하진 못했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골든 프로젝트’의 첫 성과는 오래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4월 중순 열린 동아대회 자유형 200m(1분46초26)와 400m(3분43초59)에서 2개의 아시아 신기록을 연거푸 세운 것이다. 박태환은 이튿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나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항상 고마움을 표현하진 못했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노민상 감독은 “지금은 한국 수영사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순간이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흥청망청 보낼 수는 없다”며 눈빛을 빛냈다. “준비는 됐다. 뼈대는 세워놓았고, 이제 여기에 어떤 옷을 입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의 말 속에선 자신감과 함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실패로 돌아간 첫 번째 올림픽, 그 뒤에 맞은 찬란한 영광과 이별. 그리고 그들의 두 번째 올림픽. ‘10년 콤비’의 금빛 드라마는 벌써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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