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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선택은 ‘동반성장’

등록 2005-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공동체적 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이라는 키워드…중소기업 자금 지원 등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향해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양극화 구도에서 처진 아랫동네 내지는 좀 소외된 사람들이 글로벌 체제라든가 지식기반 체제에서 제대로 자생력을 가질 수 없는 그쪽에 정부가 어떻게 하든지 힘을 쏟아서 같이 당겨서 글로벌 체제에서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과 같이 갈 수 있도록 당겨주는 것, 이것이 동반성장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앞으로 집중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태클해나갈 것이다.”

‘성장 통해 파이 키운다’ 효과 없어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이 2월17일 참여정부 2년을 자평하는 기자간담회에서 한 이야기다. 최근의 일부 경기 호조세와 관계없이 양극화 해소와 동반성장쪽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옮겨간다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 경기 호조세는 주식시장 회복을 비롯한 일부 요인에 따른 것”이라며 “경기 회복 가능성이야 반가운 것이지만 지금의 경제구조에서는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일부 계층에만 혜택이 돌아갈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인식은 경기 회복의 온기가 중산층과 서민을 비롯한 모든 계층에 고루 돌아가도록 하는 근본 처방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이런 생각을 토대로 어떤 정책을 준비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이끄는 ‘양극화 해소와 동반성장 태스크포스’는 최근 ‘동반성장의 길’을 주제로 한 종합보고서를 마련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경제의 양극화 추세가 시장 기능에 의해 자동 조절될 것인지, 아니면 정부의 정책 전환이 필요한 것인지”를 검토하도록 한 노 대통령의 내부 지시에 따른 1차적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태스크포스도 같은 지시에 따라 별도의 정책 대안을 연구해, 1월 말 대통령 보고를 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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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이정우 태스크포스’의 보고는 일단 ‘성장을 통해 파이를 키워야 분배할 거리도 생긴다’는 ‘적하(滴下) 효과’(trickle down effect)가 우리 경제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을 전제한다. 수출 확대가 내수 확대로 이어지지 않고, 대기업의 호황이 중소기업에도 파급되지 않으며, 일부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한 가운데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진 최근의 현상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견해는 ‘성장 → 분배 → 성장’의 상생 메커니즘이 붕괴됐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따라 ‘이정우 태스크포스’는 ‘참여경제의 해법’ ‘공동체적 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새로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참여경제의 해법’은 시장에 가혹한 경쟁 원리가 작동하되, 탈락자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구제한다는 기존 신자유주의 원리와 선을 긋는다. 대신에 시장 원리와 공동체 원리를 동시에 확대한다는 독특한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외국 모델과 비교한다면 유럽 나라들과 미국의 중간쯤 경로를 지향한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동원 체제에 기반한 성장에서 이해당사자의 참여에 기반을 둔 성장으로 전환하자는 아이디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독일·프랑스 등 ‘강중국’ 지향

분야별 정책에서는 우선 금융 부문이 중소기업과 서민에게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하지 못해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그리고 계층간 양극화를 가중한 측면을 ‘이정우 태스크포스’는 중시했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진행한 결과, 살아남은 대형 금융기관들의 수익 구조는 호전됐지만 ‘경제의 혈맥’ 기능이 약화된 것으로 우려돼왔다.

이에 따라 이들은 정책 대안 중 하나로 중소기업 전담 공적 금융기관 신설을 제안한다. 외국 사례로는 일본의 ‘공고’(公庫)를 들 수 있다. 일본에는 중소기업금융공고를 비롯한 5개 정부계 중소기업 전담 금융기관이 운영 중이다. 이들 기관은 정부 차입금 등을 재원으로 민간 상업은행이 맡지 못하는 고리스크 신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금융기관의 지역 재투자를 유도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미국에는 지역에서 모은 예금의 일부를 지역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 대출에 사용하도록 하는 지역재투자법(CRA)이 있다. 이런 취지와 우리 현실을 감안해 우체국이 지역 중소기업 대출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안이 제안됐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우체국 예금이 1997년 9조3천억원에서 2003년 33조3천억원으로 급증했다. 국가 지급보증에 따른 안정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체국은 예금만 받지 대출 기능이 없던 것을 앞으로 지역대출 기능도 일부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만, 우체국이 자체 여신 심사인력 등을 갖추느라 ‘복잡을 떨기’보다는 예금 중 일정 금액을 지역의 일반 금융기관에 예치해, 그 자금을 중소기업에 지원하도록 하는 ‘우회로’가 제안됐다.

산업정책에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강중국’(强中國) 지향 전략이 제시되고 있다. 첨단 핵심부품·소재 산업을 육성하고 섬유, 의류, 식품 등 전통 주력산업의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제조업의 생산구조를 다변화하자는 아이디어다. 학계·재계에는 핀란드, 아일랜드, 스웨덴처럼 정보기술(IT)을 비롯한 특정 산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수출 대기업을 중시하는 ‘강소국’(强小國) 전략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정우 태스크포스’는 한국은 유럽 강소국보다 5~12배가량 인구가 많아 소수 산업·대기업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대기업·중소기업 관계로는 하도급법을 2회 이상 위반하는 대기업에 정부조달 참여를 제한하는 방안 등이 제안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원·하청 관계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고 결과를 공표함으로써, 평판이 나쁜 대기업이 불이익을 받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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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태스크포스’는 이 밖에도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연대임금 구축 △교육·훈련 기회 불평등 해소 △근로소득보전세제(EITC) 도입 △고소득 자영업자 과표 양성화 △주식 양도차익 과세 범위 확대 △기부 문화 활성화 등을 두루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제안들은 기존의 정책 기조를 적잖이 수정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당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모델’을 주창하고도, 실제 집행되지 않아온 개념을 뒤늦게나마 정책으로 구체화한 성격도 담겼다.

소지역 단위 사회적 합의 제안

그러다 보니 ‘참여경제 해법’은 대기업 또는 보수층과 대기업 노동운동 세력을 비롯한 양쪽 모두의 저항에 부닥칠 가능성도 일부 예견된다. 보수층은 “또다시 좌파 정책으로 가자는 거냐”며, 대기업 노동운동 세력은 “일방적 양보를 강요하려는 거냐”고 의심할 수 있다. 정책 추진을 위해 사회적 합의, 그리고 합의를 담은 사회협약 따위가 필요하면서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이정우 태스크포스’는 소지역 단위에서 사회적 합의를 성공시킨 다음(소규모 타협, 김대중 정부의 ‘big deal’에 비교해 ‘small deal’) 성과를 확산시키는 방법도 검토 중이다. 이를테면 울산의 자동차산업 지역에서 △대기업-하청기업 문제 △정규직-비정규직 갈등 △공장 이전에 따른 위협 등을 함께 해결하는 지역발전협약을 맺어본다는 것이다. 협약에는 대기업·중소기업의 노사와 비정규직 대표, 시민사회, 지역 언론 등이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청와대는 조만간 관계 장관회의, 또는 국가경쟁력회의 등을 소집해 다른 제안들과 함께 이런 보고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앞으로의 논의 향배가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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