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엘류 경질 이후 비민주적 행정으로 비난 봇물… 정몽준 회장 1인을 위한 협회 운영 도마 위에
김창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kimck@hani.co.kr
“축구협회를 탄핵한다.”
지난 5월12일 한국과 이란의 2004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A조 경기가 열린 서울 월드컵경기장. 이날 ‘붉은 악마’ 응원단의 일부는 ‘축협(축구협회) 탄핵’이라는 피켓을 들어올려 축구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표팀 서포터스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의미 있는 메시지 응원으로 눈길을 끌었던 붉은 악마가 한국 축구의 사령부인 축구협회에 불만 가득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재임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반대 세력의 ‘저항’에 느긋하게 대응을 해오던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이날 아래로부터 터져나온 ‘탄핵’ 문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회장님 뜻따라 감독 경질 도박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이 사건의 배경에는 움베르투 코엘류 대표팀 감독 경질과, 이후 빚어진 축구협회의 일련의 행태와 관련이 있다. 축구협회는 3월31일 대표팀이 몰디브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0 : 0으로 비기자 코엘류 감독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기술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일부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식의 얘기를 흘렸고, 여론도 “카리스마가 없다”는 이유로 코엘류 감독의 능력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코엘류 감독의 경질을 주도한 것은 감독 선임과 영입의 권한을 가진 기술위원회가 아니라 협회 상층부였다. 지난해 10월 오만, 베트남전 패배 뒤 코엘류 감독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조중연 축구협회 부회장은 “지금 이 체제로 가다가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며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72시간’밖에 훈련하지 못했던 코엘류 감독은 결국 중도 하차했다. 그러나 윗분의 뜻이 중요한 축구협회 행정에서 ‘코엘류 이후’의 대비책이 있을 리 없었다. 축구협회는 당장 계약 파기로 코엘류 감독에게 남은 4개월치의 급여(20만달러 이상)를 지급해야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금전적 손실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명장이라며 70만달러 이상의 연봉을 들여 영입한 코엘류 감독한테 축구 노하우를 뽑는 작업도 중도 폐기됐다. 무엇보다 7월 아시안컵 대회를 앞두고 사령탑을 비운 도박에 가까운 결정을 했음에도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형식적으로’ 코엘류 경질의 책임자인 김진국 기술위원장마저 “지금은 할 일이 많아 나중에 이사회에서 신임을 묻겠다”며 피해갔다.
어떻게 이런 ‘핵폭발’급 충격에도 축구협회는 무던할 수 있을까? 비판적인 축구인들은 정 회장 중심의 축구협회를 문제의 발원지로 지목한다. 한마디로 정 회장의 뜻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정서에 민감한 ‘정치인’인 정 회장으로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처럼 대중을 열광시키지 못하는 코엘류 감독이 싫었을 게 분명하다. 이런 뜻을 정확히 파악한 조중연 부회장은 칼을 빼들었고, 허깨비 기술위원회는 뒤치다꺼리만 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코엘류 감독 경질 이후 처음 열린 협회 이사회에서 기술위에 면죄부를 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축구협회의 한 이사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동료인데 어떻게 쉽게 자를 수 있느냐?”고 말했는데, 이는 정 회장의 의지를 충실히 관철한 사람들한테 무슨 죄가 있느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 회장의 절대권력은 5월10~12일 이틀 사이에 벌어진 ‘김진국 기술위원장의 사임 → 조영증 새 기술위원장 선임과 사퇴 → 이회택 기술위원장 임명’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기술위원회는 대표팀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한국 축구의 전략 기지로 대표팀 축구의 100년 대계를 짜는 곳이다. 마땅히 기술위원장의 선임은 오랜 고민과 토론을 거친 뒤 다양한 후보군에서 최상의 인물을 선택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가 돼야 한다.
정보와 인력 독점한 ‘절대권력’
그러나 정 회장은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했다. 이회택 위원장 지명 때는 이사회에서의 호선이라는 절차도 무시하고 이사도 아닌 국제국장, 사무총장 등과 머리를 맞대고 위원장을 바꿔치기했다.
이 과정에서 협회의 공식기구는 유명무실해졌다. 정 회장은 최고의결기구인 26명 이사회 가운데 한명이지만 26분의 1이 아닌 1의 권력을 행사한다. 회장이 원하면 코엘류 감독이 희생되듯 여론에 따라 내부 희생양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특히 축구협회의 핵심부서인 기술위원회의 처지는 매우 구차해졌다. 기술위원회가 독자적으로 감독 영입 작업에 나서지 못하고, 정 회장의 비서국이나 다름없는 국제국이 넘겨준 10명의 후보 리스트를 발표한 것은 떨어진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정 회장의 권력은 정보와 인맥의 독점에서 나온다. 대표팀간 경기 섭외, 외국인 감독 선임, 정 회장의 국제축구연맹(FIFA) 활동 등 굵직굵직한 정보는 모두 국제국을 통하는데, 고급정보는 가삼현 국제국장 → 정몽준 회장 직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데 이견이 없다. 정 회장의 오른팔 격인 조 부회장은 노흥섭 전무를 비롯해 기술·경기·심판·상벌·유소년분과 등 주요 부서의 위원장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안음으로써 정 회장 권력의 한 축을 공고하게 해준다.
그러나 1인 중심주의는 비밀주의와 내부 비민주주의 부작용을 동반한다. 협회의 법인화 미루기는 상징적인 예다. 시대의 흐름이 ‘투명성’과 ‘공개’로 가고 있고 정 회장이 취임한 1993년 이래 문화관광부는 스포츠단체의 법인화를 장려하고 촉구하고 있지만, 축구협회는 아직도 임의단체로 남아 있다. 2000년대 들어 한해 협회의 평균 수입·지출의 합산 금액이 평균 500억원을 넘어 대한체육회 53개 단체 가운데 가장 큰 살림살이를 자랑하지만 결산보고서의 전모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는다.
‘협회 사람’과 ‘반협회 사람’의 대립과 균열이 날로 커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협회 내 사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회장한테 쓴소리를 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반대로 축구협회 바깥쪽의 사람들은 “축구협회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다. 특히 회장 1인을 위한 협회 운영이 축구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며 격앙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 목소리는 축구협회 내부까지 미치지 못하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친다. 더욱이 정 회장의 연임 여부는 구조적으로 집행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시·도 축구협회와 중앙에서 선임한 20여명의 대의원 대회에서 이뤄지게 돼 있어, 재야 축구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물론 정 회장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축구협회를 돈 버는 단체로 만들었고, 월드컵을 유치해 성공적인 개최까지 이뤄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업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물러나야” 대중의 변화 열기
그러나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축구 발전을 위해 좋다”는 의견이 나온다. 조광래 FC서울 감독은 “큰일을 해낸 분이다. 그러나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축구인들한테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더 큰일이다”고 말한다. 축구협회 팬 게시판에 올라오는 협회 개혁의 목청도 과거와는 다르다. 기술위원장을 3명이나 교체할 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의 ‘촛불집회’ 정서와 비슷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붉은 악마는 축구협회를 탄핵하자고 나섰는데, 이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판을 요구하는 대중의 바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축구협회 상층부의 엄청난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다. 만약 축구협회가 편한 길을 택한다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대중의 변화 열기에 ‘혁명적’ 상황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축구협회는 자루를 통째로 뒤집어엎어야 하는 총체적인 개혁의 시험대에 섰다. 시대가 바뀌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