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발전기 한 대만 불시 고장이 나도 순환단전을 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장관이 지난 8월11일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상황실에서 “전력수급경보 ‘관심’ 단계를 발령했다”는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관심’은 경보 2단계로, 우리나라 전력설비 용량 8551만6천kW 가운데 예비전력이 400만~300만kW일 때 발령하는 경보다. 한마디로, 쓸 수 있는 전기가 적다는 뜻이다. 전국적인 폭염이 이어지면서 전기 사용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늦더위가 이어지면서 엘리베이터·공장 등이 멈춘 2011년 9월15일처럼 대정전(블랙아웃)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나왔다. 전력거래소는 8월12일부터 14일이 고비가 될 것이라고 했다.
<font size="4">전쟁 첫날 줄줄이 멈춰선 화력발전소</font>올여름 들어 ‘관심’ 단계가 발령된 것은 지난 6월5일 이후 두 번째다. 전력수급경보가 발령된 뒤인 지난 6월19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요즘 에어컨을 전혀 틀지 않고 지낸다”며 냉방 자제를 언급했다. 청와대 에어컨도 멈췄다. 대통령까지 전기 걱정에 나선 건, 지난 5월 말 부품 서류 위조 비리로 핵발전소 3기가 멈춰섰기 때문이다. 계획정비 등의 이유로 멈춘 핵발전소까지 합치면, 올여름에는 전체 23기 핵발전소 가운데 최대 10기가 가동을 멈추었다. 매달 전체 발전량의 25~30%를 차지하던 핵발전의 비중이 28년 만에 25% 아래까지 곤두박질친 것이다. 이 때문에 산업부는 일찌감치 매해 전력 소비가 가장 높은 8월 둘쨋주께 예비전력이 100만kW 수준으로 떨어지는 ‘비상사태’를 예감하고 있었다.
전력 대란의 서막이 오른 건, 대통령이 세웠던 청와대 에어컨까지 다시 돌아갈 정도로 폭염이 이어지면서부터였다. 지난 8월8일 서울 최고기온이 32.8℃까지 올라가면서 청와대도 올여름 들어 처음으로 에어컨을 가동했다. 무더위가 사나흘 이어지면 냉방 전력 소비도 급격히 높아지는 게 일반적이다. 잔뜩 달궈진 한반도엔 8월11일 오후까지 연일 폭염이 이어지면서 에어컨 등의 가동을 부채질했다. 결국 산업부 장관이 전기 사용 자제를 당부하는 대국민 담화까지 내놨다.
그러나 ‘위기의 3일’에 맞서던 정부의 대응은 ‘외줄타기’를 보는 듯했다. 전력 대란과의 전쟁 첫날(8월12일)부터 화력발전소가 줄줄이 멈춰섰기 때문이다. 앞서 8월11일 밤 동서발전에서 운영하는 경기도 일산 열병합발전소 가스터빈 3호기(공급력 10만kW)가 갑자기 가동을 멈췄고, 그 다음날에는 당진화력발전소 3호기(50만kW)와 서천화력발전소 2호기(20만kW)가 고장이 났다. 갑작스런 과부하로 나타난 고장으로, 서천화력발전소 2호기를 제외한 다른 발전시설은 정비 뒤 곧바로 재가동됐다. 그런 탓에 정부는 첫날부터 ‘전력수급 비상조치’로 ‘긴급 절전’을 검토하기도 했다. 예비전력이 300만kW 미만으로 떨어져 ‘주의’ 경보가 발령되면, 상황에 따라 미리 계약을 맺은 426개 업체가 설비 등을 멈춰 절전(최소 500kW~최대 8만kW)에 참여하는 제도다. 그러나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이날 증기발생기 전열관에서 결함이 발견돼 한동안 가동을 중단했던 한울(울진)핵발전소 4호기(100만kW)의 재가동을 승인하면서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font size="4">실제는 경보 1단계 ‘준비’ 머물러</font>정부는 절전을 위한 극약 처방도 꺼내들었다. 아예 사흘 동안 공공기관에서 냉방기와 공조기 사용 금지를 지시했다. 대낮의 공공기관 사무실에 불이 꺼지고, 30℃가 넘는 사무실에서 부채질을 하며 업무를 보는 모습이 방송 등을 통해 알려졌다. 그렇게 공포의 사흘이 지나갔다. 애초 최대전력이 8천만kW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경보 1단계인 ‘준비’(예비전력 400만~500만kW)에 머물렀다. 정부와 언론은 “온 국민의 합심된 노력으로 무사히 위기를 극복했다”며 찬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력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가 잘못됐다고 꼬집었다. 마치 ‘보릿고개’를 넘듯, 경제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로 공공기관과 가정 등에 과도한 절전을 강요하면서 전력 위기를 돌파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이번 전력 위기 국면을 이렇게 평가했다. “전력 수요라는 게 고무줄 같은 것이긴 하지만, 현재 정부의 방식은 수요가 얼마나 되든지 공급에 맞추겠다는 프레임이다. 결국 공급 위주의 전력 정책의 파산을 보여준 것으로, 수요 예측·관리 등을 평소 정책적으로 도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최악의 상황에서나 꺼내들 돈을 줘 전력 수요를 줄이는 방식을 사용했다.” 실제로 정부는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통해 민간 자가발전기 가동에 14억원, 기업의 조업시간 조정으로 전력 부하를 줄이는 데 대한 보조금 18억원 등 매일 40억원을 집행했다. 현재 정확한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단순 계산으로 사흘 동안 전력 대란 탓에 약 120억원을 사용한 셈이다.
반복되는 전력 대란이 “단순히 수요 예측의 위기가 아닌 전력 패러다임의 위기”라는 지적도 있다. 조영탁 한밭대 교수(경제학)는 “앞으로 발전량이 아닌 송전선의 문제로 전력 대란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현재 가동을 눈앞에 둔 핵발전소와 오는 2027년까지 11기의 핵발전소를 추가로 지을 것을 감안하면, 올해 같은 위기는 다시 나타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특정 발전단지(울진·월성·고리·영광)에 원전을 계속 짓고 있는데, 전체 발전량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원전 송전망에 작은 문제가 발생하면 전국적인 전력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며 “(특정 지역에 대규모 발전시설을 모아두는 방식은) 원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기술적 영역의 전문가들이라면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전체 전력 사용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도권에도 자체적인 발전시설을 갖추거나, 태양광·가스복합·소형열병합 발전시설 등 다양한 ‘에너지 믹스’(Energy Mix)를 지향해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font size="4"> 에너지 믹스 등 합리적 해법 찾아야</font>박근혜 정부는 올해 하반기 중에 2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 발표를 앞두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오는 2035년까지 어떤 에너지를 얼마나 사용할지를 담게 된다. 현재 발표가 늦춰지고 있는 보고서 안에 원전 비리와 전력 대란의 교훈이 얼마나 반영될지도 관심사다. 내년에도 에어컨 없이 여름을 지내는 대통령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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