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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21] 술 못 마시는 죄

등록 2009-04-07 14:55 수정 2020-05-02 04:25
술 못 마시는 죄

술 못 마시는 죄

난 술을 못 마신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만큼 못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소주 한 잔을 놓고 남들이 열 병 정도 먹는 시간을 들여 마셔도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어지럽다.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인 듯해서 입사 초기엔 이를 악물고 노력해봤지만 부모로부터 타고난 유전적 요소를 부인하려는 시도에 하늘이 노했는지 위경련으로 병원에 실려가야 했다. 그 뒤론 아예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으로 인정받기까지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인정만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럭저럭 술자리가 두렵지 않다. 또 이젠 술 마시는 것보다 받은 술을 처리하는 기술이 늘어서 한참 뒤에야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걸 깨달은 사람에게서 배신자란 소리를 종종 듣는다.

술을 못 마시다 보니 술 먹는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불합리한 것을 많이 느끼는데, 그중에서도 두 가지만 보자.

먼저 회비를 내는 자리에서다. 항상 불만스러운데, 내가 아무리 죽자고 안주를 먹어도 저들의 술값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주발은 배부르면 멈추는데 술이란 것은 도대체 배부르단 소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마시면 마실수록 많이 먹는 것 같다. 술값 내주는 회비도 억울한데 그것을 초과할 때 내는 갹출의 억울함이란. 그렇다고 난 안 마셨으니 못 내겠다고 하는 건 ‘난 짠돌이, 좀팽이’라고 만방에 고해 사회생활을 포기하자는 것과 같다. 차라리 일본인들처럼 개인이 마시는 잔 수만큼 각자 계산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약간 심각한 상황인데, 술을 못 마셔도 강권만 하지 않으면 거의 술자리 마지막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경험적 통계치로 전체 인원의 1할 정도 되는, 대책 없이 만취하는 자들의 표적이 됐을 때다. 꼭 신체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언어에서도 마찬가진데, 상대방은 취중이지만 난 거의 맨정신이라서 알코올이라는 완충작용 없이 고스란히 뼛속 깊숙이 전해진다. 물론, 술이 깨고 나면 사과하는 사람과 모르는 척하는 사람 그리고 진짜로 모르는 사람까지 있지만 어느 경우든 나는 당신이 어제 한 행동을 알고 있는데 어쩌랴. 그냥 소소한 사안이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난밤 내가 당한 게 있는데 다음날 말 한마디로 잊어버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가. 그렇다고 술 먹고 벌어진 일을 시시콜콜 따지자니 나만 속 좁은 사람이 될까봐 따지지도 못한다. 결론은 술 못 마시는 죄로 말을 못한다는 것.

아… 그러고 보니 다 내 잘못이다. 술에 인자한 사회에서 술 못 마시는 내가 죄지 술 잘 먹는 니들이 무슨 죄니? 여기까지 얘기하는데도 누가 또 말하는 듯하다.

“네가 안 마셔서 그래. 왜 안 늘어? 다 늘어. 내 친구 중에도 한 잔도 못 마시는 애가 있었는데 어쩌고저쩌고….”

글·사진 윤운식 기자 blog.hani.co.kr/yws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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