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도 여행 중에 지도교수님의 고향집에 들른 일이 있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고향땅을 지키며 지내시는 교수님의 어머님을 뵙는 순간, 어떤 깨달음이 느껴졌다. 외로움도 이쯤 되면 호사스러운 일이겠구나, 삶의 무상함에 달관하며 지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당시 나는 SBS 에 출연하고 나서 온갖 악플에 시달리며 연애나 결혼, 삶과 외로움에 대해 복잡한 심경이었는데, 그 시골집의 할머니 앞에서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쉴 새 없이 사랑·외로움 타령을 해오던 내게 정작 필요한 것은 남자나 짝이 아니라 나 자신의 속물성에 대한 진단이었고, 이 삶에서 왜 이토록 엄살을 떨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 규명이었다.
을 보는 당신은 순수한가
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통했는지를 이야기하려면 출연자·시청자·언론사·제작진, 이들의 처지를 따로 살펴봐야 한다. 우선 출연자들은 ‘과연 짝을 찾으러 나온 것이 맞느냐’는 의심의 눈초리 속에서 전 국민에게 짝으로서의 자격을 평가받게 된다. 연예인 되려는 거 아니냐, 옷이나 책 팔러 나왔느냐 하는 홍보 논란, 짝 찾는 사람이 왜 방송에서 나대느냐 하는 진정성 논란이 그것이다. 과연 그들은 왜 에 출연하게 되었을까. 나는 지난 9월14일∼10월5일 방송된 13번째 이야기 ‘노처녀·노총각 특집’에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은 8월5∼11일 일주일간 남녀 출연자 14명이 모여서 촬영했다. 당시 싱글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있던 나는, 다른 사람의 연애 과정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나에게도 근사한 짝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출연을 결정했다. 내가 모든 출연자를 인터뷰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출연자들 모두 짝을 찾고 싶어서 나온 것이 맞다. 다만 그 이면에 다른 속셈이야 왜 없겠는가. 애정을 찾는 태도를 순수한 것으로, 다른 목적을 사심으로 말한다면 모든 출연자는 속물적인 동시에 순수한 사람들일 테다.
을 재미있게 시청하는 시청자도 있겠지만, 일부 시청자는 ‘악의적 시선’으로 출연자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기 일쑤다. 포맷 자체가 리얼리티를 표방한 관음증적 프로그램이라 치더라도 시청자의 가학적 평가는 이미 도를 넘어섰다. 인신공격과 ‘신상털기’는 으레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진정성’ 논란인데, 일부 출연자를 향한 ‘연애나 사랑, 결혼에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는 평가를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헛웃음이 난다. 언제부터 이 사회가 사랑이나 결혼에 진정성을 이야기했단 말인가. 실상 의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자=내숭=외모=성형’ ‘남자=지위=돈=이벤트’가 현실에서의 그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생존과 직결되는 ‘속물성’에 관한 한 온 나라, 전 국민이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한술 더 떠 ‘신상털기’ 논란을 중계·증폭하는 언론사들의 속물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악마의 편집’은 당연한 귀결
이 모든 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는 제작진이 존재한다. ‘시청률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은 일주일 동안 출연진들을 들들 볶아서 ‘꺼리’를 찾아내야 한다. ‘악마의 편집’은 당연한 귀결이다. 어쩌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나 같은 출연자가 문제일지 모른다. ‘여자 1호’로 출연한 나에게는 ‘100번 연애해본 여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전에 노처녀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때때로 출연했지만 그때 ‘100번 연애’라는 상징적 이야기는 내 사생활이 아니라, “여자도 연애를 ‘많이’ 할 수 있다”는 주장의 한 대목으로 쓰였다. 그런데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이 말은 내 정체성이 되어버렸고, 그저 ‘결혼 결격녀’로 낙인찍혔다. 함께 출연한 한 남자는 ‘양다리 걸치는 남자’라는 악플에 시달렸지만, 실제 옆에서 보기에 그는 여러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남자였다. 카메라는 모를 수도 있었겠다. 여자들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담지 못했다면 그건 없었던 일이 되니까 말이다. 촬영 기간 내내 카메라는 연애라는 사생활을 좇지만, 연애의 미묘한 상황을 담지는 못한다. 선택적으로 담겨진 사실이 적나라하게 편집될 때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인물과 사건이 만들어진다.
제작진의 ‘조작’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진은 다만 ‘심리실험’을 극대화하고 ‘센세이셔널한 이슈’를 중심으로 편집할 의무에 충실하다. 출연자들은 24시간 카메라에 노출된 상황, 거의 발가벗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합숙 상황에서 이런저런 ‘헛소리’와 ‘망발’을 하게 된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촬영 일정과 마음 맞지 않는 사람들에 치이다 보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껄이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를 여과 없이 편집하는 의무를 지닌 제작진을 탓하기보다는 리얼리티와 다큐멘터리의 엄청난 차이에 무지하던 내 자신을 탓하는 편이 좋겠다(이런 프로그램 자체의 속물성에 관대해질 수만 있다면 출연을 권한다).
너도나도 엄살을 떨고 있는 꼴
출연 뒤 내게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니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당연한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속물적 목적으로 출연을 결심하고, 시청자나 언론사들은 자신의 속물성을 들킬세라 출연자와 제작진을 혹평하고, 최대한 속물적 편집을 감행하는 은 그야말로 속물적 시대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밥벌이가 고단한 세상, 연애·결혼·출산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세상에 대해 너도나도 엄살을 떨고 있는 꼴이다. 이 마음에 호소해 각자의 속물성을 과격히 노출하거나 남의 속물성에 실컷 욕이나 퍼붓자는 ‘당대성의 발로’가 이다. 내겐 적어도 한 가지 효과는 있었다. 시골집 할머니를 만났던 때처럼, 시시각각 나는 대체 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대체 왜 짝을 찾는지, 왜 짝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지, 왜 짝을 찾아주려 하는지를 한결 담대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모니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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