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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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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 피 뽑으실래요?

등록 2003-07-31 00:00 수정 2020-05-02 04:23

젊은 부부 사이에 부는 제대혈 보관 열풍…과연 업체들의 홍보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요즘 젊은 부부 사이에선 제대혈 보관신청 열풍이 불고 있다. 그것이 마치 아기에 대한 부모의 의무나 사랑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추세다. 과연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제대혈을 보관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더불어 제대혈 기증에 관한 사회적 논의도 확산되고 있다.

임신 3개월인 김영숙(30·서울 중랑구 면목동)씨는 최근 산부인과 의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제대혈은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진료를 마친 뒤 의사가 ‘출산 뒤 제대혈을 보관할 거냐’고 묻더군요. ‘제대혈이 뭐예요’라고 되물었다가 졸지에 시대흐름에 뒤떨어진 한심한 엄마가 됐어요. 병원 문을 나서는데 간호사가 ‘엄마들 중에 제대혈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제대혈 안내 책자를 건네주더군요. ”

15년 보관에 100만~130만원

첫아이 출산을 두달 앞둔 회사원 이찬희(31)씨도 제대혈 때문에 아내와 말싸움을 벌였다. “아내가 10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제대혈은행에 제대혈 보관신청을 했다고 하기에 ‘꼭 해야 하느냐’고 한마디 했지요. 아내는 ‘남들은 남편이 먼저 보관신청도 한다는데 당신은 아기에 대한 관심이 없다. 담뱃값만 절약해도 우리 아이 제대혈 보관비용은 된다’며 섭섭해하더군요.”

요즘 출산을 앞둔 젊은 부부 사이에서 ‘제대혈’(臍帶血) 열풍이 불고 있다. 제대혈의 ‘제대’는 탯줄이다. ‘배꼽 제(臍)’와 ‘띠 대(帶)’의 제대는 아기의 탯줄을 뜻하며, 이 탯줄에서 채취한 혈액이 제대혈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한달 평균 태어나는 신생아 4만명 중 15%가량인 6천명의 부모가 제대혈 보관신청을 하고 있으며, 2~3년 안에 보관신청자가 30%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분위기는 마치 제대혈을 보관하는게 아기에 대한 부모의 의무나 사랑의 징표처럼 되고 있다. 제대혈은 보통 15년 동안 보관하는데 비용은 대략 100만∼130만원 선이다. 서울 강남지역 산부인과의 경우 지난해까지 20%가량의 산모들이 제대혈 보관을 신청했는데 올 들어 30~40% 안팎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대혈은 주사기로 태반과 탯줄의 혈관에서 뽑는다. 제대혈 보관신청을 하면 분만 뒤 의사가 제대혈 채취를 한다. 일부에서는 제대혈은행 직원이 혈액을 채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분만을 맡은 산부인과 의사가 직접 한다. 의사가 탯줄을 소독한 다음 산모의 혈액이 제대혈과 섞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중력에 의해 흘러내리는 탯줄의 혈액을 채취하거나 항응고제가 처리된 주사기로 탯줄 정맥을 찔러 제대혈을 뽑는다. 다음으로 태반이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오면 태반에 남아 있는 혈액까지 채취한다. 이때 세균감염을 막기 위해 소독을 하고 태반 정맥을 통해 혈액을 뽑는다. 이렇게 얻은 제대혈을 제대혈은행에 가져가 냉동보관한다. 이런 방식으로 갓난아기나 산모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략 5분 안에 제대혈을 채취할 수 있다.

이영호 동아대학 의과대 소아과학교실 교수는 “산모의 탯줄과 태반에서 약 100㎖ 정도의 혈액이 나오는데 이 속에 들어 있는 조혈모세포의 숫자나 기능이 골수 500~1000㎖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제대혈을 냉동보관해뒀다가 필요한 때에 녹여서 이식에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대혈은행쪽은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 빈혈, 악성종양, 유전성 질환의 치료를 위해 골수이식을 하는데 골수의 조혈모세포를 이용하는 골수이식과 같은 치료방법으로 제대혈의 조혈모세포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제대혈 이식의 장점으로 △제대혈의 조혈모세포는 골수의 조혈모세포보다 미성숙한 상태라 타인에게 이식했을 때도 거부반응이 적고 △골수은행을 통해 골수를 이식하는 데 평균 6개월이 걸리지만 제대혈은행을 이용하면 빠르면 10일에서 한달 정도면 이식받을 수 있는 점을 꼽는다. 또 골수이식은 다른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지만, 아이가 크면서 백혈병 등에 걸리면 가족 제대혈은행에 보관해둔 자기의 제대혈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세운다.

제대혈을 꺼내쓸 가능성은 얼마?

백진영 아이코드 조혈줄기세포연구소 소장은 “탯줄혈액 이식은 백혈병을 비롯한 악성 혈액질환과 각종 암, 선천성 대사장애, 면역장애 질환 및 이외에도 수십 가지의 질환에 치료 대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의약의 발전에 따라 백혈병과 같은 혈액질환뿐만 아니라 알츠하이머나 치매, 간질환, 파킨슨병 등의 치료에도 사용 가능하다. 아울러 선천성 유전적 결함에 의해 발생되는 중증질환인 선천성 면역결핍증의 치료 등에도 응용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채취한 제대혈을 어떻게 보관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7월24일 오전 서울의 한 종합병원 제대혈은행을 찾았다. 제대혈이 보관된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살균 처리된 모자·장갑·신발을 신고 멸균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도 보관장소로 들어가기 전에 자외선과 바람 등으로 전신 소독을 했다.

연구실에서는 멸균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병원에서 가져온 제대혈을 검사하고 조혈모세포를 분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바이러스, 미생물, 조직적합성검사, 매독감염 여부 등 냉동보관의 적합성 여부를 검사하고 조혈모세포의 분리·정제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관적합성 판정을 내린다.

보관접합 판정을 받은 제대혈에서 종이컵 5분의 1가량인 25cc의 조혈모세포만을 분리해 디스켓 같은 키트에 담는다. 키트를 2시간가량 얼린 뒤 고유번호를 매겨 냉동저장고에 보관한다. 산소통처럼 생긴 저장고의 뚜껑을 열자 물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섭씨 영하 196도로 보관하기 위해 액화질소를 기체 상태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대혈은행에서는 김치냉장고 1.5배가량 크기의 냉동저장고에 제대혈 5500개를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제대혈에 관심이 있는 부부라면 막상 어떤 업체에 맡겨야 할지 혼란스럽다.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로 ‘제대혈’을 입력하면 운영 중인 제대혈은행들이 나온다. 일단 각 제대혈은행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내용을 훑어보고 제대혈은행 비교사이트(http://cafe.daum.net/cordblood) 등에서 각 업체별 가격·보관방법 등을 참고할 수 있다. 한 제대혈은행 관계자는 “제대혈 냉동보관 기술이 업체마다 다르긴 하지만 상당 부분 공개되어 있고 나름대로 국제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해 보관기술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대혈은행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는 사랑의 선물’이라며 만의 하나 내 아이가 크면서 백혈병에 걸렸을 때를 생각해보라며 제대혈 보관을 권한다. 하지만 제대혈이 일부 업체에서 과잉 홍보하듯이 출산준비물이나 만병통치약은 아닌 듯 싶다.

아이가 백혈병 등에 걸려 보관된 제대혈을 꺼내쓸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1년에 소아암과 백혈병 등에 걸리는 아이의 확률은 10만명 중 14명꼴이다. 우리나라는 한해 평균 400명가량의 아이가 백혈병 등에 걸리고, 이 중 60~70%는 항암제로 치료가 가능하다. 남은 30~40%가량의 환자 중에서도 골수이식으로 치료하는 아이를 빼면, 실제 제대혈 치료를 받게 될 가능성이 있는 아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제대혈에는 이식에 사용될 줄기세포 양이 충분하지 않아 15살 이하(50kg)에 주로 사용된다.

취재 과정에서 제대혈은행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의료인 5명에게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제대혈을 보관할 거냐’고 물었더니 3명은 보관하겠다고 하고 2명은 보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보관하지 않겠다는 의료인들도 가족 중에 혈액질환을 앓았거나 앓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 보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의료인은 “제대혈 보관의 활성화는 바람직하나 업체끼리의 과당경쟁으로 제대혈 보관이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미국에서는 소수인종이나 가족 중에 혈액질환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이 제대혈을 보관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사 채취비 두고 리베이트 논란도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내 아이가 혈액질환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 출산을 다섯달 앞둔 김인영(31·서울 마포구 신수동)씨는 제대혈을 보관할 예정이다. “차를 가진 사람들이 자동차보험료를 내지만 교통사고가 안 나는 게 제일 좋은 것 아니냐. 마찬가지로 제대혈도 ‘아기보험’으로 생각한다. 백혈병 같은 난치병에 걸릴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막상 내 아이가 걸린다면 어떻게 하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최상이지만 만약 나쁜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는 게 보험이다. 제대혈 보관도 보험과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 들어 종합병원, 벤처기업 등이 제대혈보관 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10여곳에서 제대혈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한 제대혈 보관업체의 매출액은 2001년 15억원, 2002년 140억원, 2003년 500억원(예상) 등으로 급증했다. 해마다 2배 이상씩 커지는 제대혈 시장을 두고 업체끼리의 경쟁이 치열하다. 각 업체들은 채시라·이재룡·남희석·이을용 등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를 통한 홍보와 각종 이벤트, 보관비용 깎아주기 등에 나서고 있다.

그러다보니 업체들 사이에서는 “치료·연구 기능은 없고 보관만 하는 일부 벤처 제대혈은행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제대혈은 냉동생선이 아니다”,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다”, “일부 업체가 병원과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주고 있다”는 등의 뒷말이 나돌고 있다. 제대혈을 채취하는 의사에게 주는 ‘채취비’를 두고 리베이트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일부 업체가 100만원이 넘는 보관료 중 50만~60만원을 산부인과 의원과 병원에 영업비용으로 뿌리고 있다는 게 논란거리다. 주로 종합병원이나 의료재단 등에서 운영하는 제대혈은행이, 벤처기업들이 세운 제대혈은행을 겨냥해 “보관료가 이렇게 빠져나가면 보관·관리 투자에 구멍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 그 업체가 도산하게 되면 제대혈을 맡긴 부모들만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상 제대혈 보관료가 아닌 다른 분야 사업비용으로 투자될 수도 있고, 벤처기업의 특성상 안정성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벤처기업쪽 제대혈은행은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는 업체라면 과도한 리베이트를 주고 주먹구구식으로 경영을 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효과에 비해 사회적 비용 너무 많이 들어

국내 제대혈 보관시장 확대 추세로 볼 때 2~3년 뒤 12만명의 신생아가 제대혈을 보관한다면, 제대혈 보관시장 규모가 1조2천억원이다. 이 중 1년에 10명 안팎의 어린이가 제대혈 치료 혜택을 받는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에서는 제대혈이 백혈병 등 특정 질환에 제한적으로 효과가 있으며, 제대혈은행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대혈에서 뼈·연골까지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실용화되려면 상당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제대혈의 효능을 강조하던 제대혈은행 관계자들도 “일부에서는 제대혈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기도 한다”는 질문에 하나같이 신중한 입장이거나 물음표를 달았다. 생명과 직결된 제대혈시장이 상업주의에 휘말려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되지 않게 정부나 관계기관의 교통정리가 필요한 때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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