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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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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치에 투자 기꺼웠던 1년

<한겨레21> 후원제 시행 1년 동안 후원자 620명 마음 보태
등록 2020-03-18 22:06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21>이 후원제를 출범한 지 1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지면에 소개된 정기·일시 후원 독자들의 얼굴(오른쪽 사진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겉모습은 저마다 달라도 <한겨레21>에 대한 애정은 꼭 닮아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게 힘을 보탰다”며 별일 아닌 듯 말하지만, <한겨레21>에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운 마음입니다.

<한겨레21>이 후원제를 출범한 지 1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지면에 소개된 정기·일시 후원 독자들의 얼굴(오른쪽 사진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겉모습은 저마다 달라도 <한겨레21>에 대한 애정은 꼭 닮아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게 힘을 보탰다”며 별일 아닌 듯 말하지만, <한겨레21>에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운 마음입니다.

만화영화 는 둘리가 빙하를 타고 어느 개천으로 떠내려오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이때 영희와 철수가 둘리를 발견하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봉구 쌍문동입니다. 3월11일 오전 후원 독자를 만나러 둘리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쌍문동을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동네는 이날 만난 후원 독자가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둘리 그림과 조형물로 채워진 둘리뮤지엄을 끼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아늑해 보이는 노란 창틀의 벽돌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대문 앞에 후원 독자 임화섭(42·오른쪽 위 큰 사진)씨가 서 있었습니다. 꽃샘추위에도 한참 동안 기자를 기다렸을 그의 품속에는 두 권이 있었습니다.

알리지 않았는데도 먼저 “첫돌 축하합니다”

올해 설 퀴즈큰잔치 응모 엽서에 임화섭 독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곧 있으면 후원제 도입이 1년이 되네요. 이 너무나도 대견스럽고 고맙습니다. 작지만 큰 용기를 가진 후원금을 보낸 지도 1년이 되네요. 제가 뒤에서 을 열성적으로 응원할게요.” 창간기념호에 맞춰 후원제 1주년을 알리기도 전에 누구보다 먼저 후원제 첫돌을 축하해준 후원 독자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에도 그는 반갑고 따뜻하게 기자를 맞았습니다.

임화섭 독자는 지적장애가 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과 감수성은 누구보다 예민했습니다. “제1254호 (‘한겨레21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기사를 보고 후원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박또박 말하던 그는 잡지 호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했습니다. 누리집에 이 기사가 게재된 2019년 3월25일은 그의 월급날이었답니다. 임 독자는 후원제 시작을 알리는 기사를 보자마자 집 근처 은행에 가서 직접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제조업체에서 누전차단기를 조립하며 번 월급을 쪼개서 보낸 돈이었답니다. 그에겐 “작지만 큰 용기”였습니다.

과 임화섭 독자의 인연은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7년 고등학생 때 우연히 지하철 역사에서 퀴즈큰잔치 홍보 포스터를 본 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퀴즈 응모 엽서를 보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누나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을 읽으면 “공기가 맑아지는 듯”했답니다. 이젠 모바일과 페이스북 등으로 을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됐지만 그의 마음엔 늘 빚이 있었습니다. “후원을 통해서라도 다른 독자분들과 어깨동무하고 싶었어요.” 후원은 정기구독을 하지 않더라도 에 힘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였습니다.

임화섭 독자는 제도권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트랜스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마치고 성별 정정을 거쳐 숙명여대에 합격했지만 끝내 입학을 포기했던 ㄱ씨의 이야기(제1301호 ‘그가 떠나고 그들은 안전해졌나’ 기사)를 보며 함께 마음 아파했답니다. 철거민,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의 사회적 민감성은 후원 독자들과 기자들이 공유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비난받을 때”가 가장 힘들다던 그는 도 후원제를 통해 어려운 시기를 더 꿋꿋이 헤쳐나가길 응원했습니다.

늦게라도 보려고 한쪽 귀퉁이 접어두는 마음

임화섭 독자처럼 을 정기·일시 후원해준 독자는 3월5일 기준 620명에 이릅니다. 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준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처음처럼, 초심을 잃지 않으려면 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후원제를 고심하던 때, 마침 전자우편과 응모 엽서로 후원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줘 제1254호에도 소개된 경북 영천의 곽성순(56) 독자와 충남 공주의 공경숙(62) 독자가 저희의 우문에 현답했습니다. “지금처럼!”

대구, 서울대, 치과의사라는 한국 사회 주류의 이력을 가졌지만 비주류로 사는 삶을 택해온 곽성순 독자는 여전히 종이 매체가 좋답니다. “시대를 못 좇아가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같은 기사를 읽어도 종이로 보면 분명 차이가 있어요.” 후원제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먼저 손 내밀며 “우연히 말려 들어간(?)” 그는 후원하면서 새로운 책임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의와 가치를 몸소 실천해보자는 의지였습니다. 성인이 된 자녀를 보며 김용균 같은 사회초년생의 아픔에 더 공감하고 난민 같은 소외된 이들에게 더 관심 갖는 일상의 변화였습니다.

딸기 농사를 짓는 공경숙 독자는 그새 바빠졌답니다. 수확하는 시기여서 을 읽을 여유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아까워” 빠짐없이 다 읽던 그는 늦게라도 읽으려고 꼭 보고 싶은 기사의 한 귀퉁이를 접어뒀습니다. 꼭꼭 바르게 짚어주는 언론은 뿐이어서 공경숙 독자가 “언제나 믿고 보는” 잡지랍니다. 공정한 사회가 되려면 양질의 매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에 더 투자했답니다. 이는 자신을 위한 투자이기도 했습니다. 한 귀퉁이가 접힌 채 거실 탁자에 놓인 ‘아빠의 아빠, 딸의 딸’(제1302호) 기사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질의 매체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위기감

김인태(63) 후원 독자는 30여 년 전에도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을 만들기 위해 후원제에 동참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창간이었습니다. 주식을 사는 형식이었습니다. “은 믿고 보는 잡지였는데 어렵다고 하니까 더 투자하기로 결심했죠.” 강원도 원주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를 하다가 퇴직한 김인태 독자는 후원 이후 지역 문제가 심층적으로 다뤄져 보람을 느꼈답니다. “수도권 위주의 보도를 이해하면서도 늘 아쉬웠어요. 앞으로도 ‘공장이 떠난 도시’ 르포처럼 다양한 지역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뤄주면 좋겠어요.”

기존 독자를 넘어 ‘후원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인 양현주(50) 독자 역시 김인태 독자와 나이도 직업도 이력도 모두 달랐지만, 후원제가 출범하자마자 참여 의사를 밝힌 심정은 똑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지금 같은 교육 시스템과 사회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양질의 매체가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이었죠.” 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기자에게 그가 되물었습니다. “(후원제가) 처음이니까 생소하고 어색한 게 아닐까요? 후원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단체에도 후원하는 양현주 독자는 후원에 여전히 인색한 사회 분위기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양현주 독자의 바람처럼, 후원제가 무르익을수록 이 후원 독자들과 뭔가를 함께하는 일도 조금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양현주 독자는 지난해 8월 정기·일시 후원 등을 고려해 제한적으로 열린 후원 독자와의 만남 때 함께했습니다. “그냥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마음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더라고요.” 그는 지난해 말 이 전체 후원 독자에게 보낸 달력을 보며 가족과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답니다. “삼 남매도 신기해했어요. 아이들이 커서도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에 맞는 매체나 단체에 기꺼이 후원했으면 좋겠어요. 그 소중한 첫 경험을 과 함께했네요.”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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