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13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의 한 돼지농장, 농장주가 돼지 다섯 마리의 이상 증상을 발견했다. 발열이었다. 13일과 15일 이틀 동안 주사제(대사촉진제)를 처방했다. 나흘째인 16일 모두 폐사했다. 폐사한 돼지의 부검 결과를 확인한 수의사가 다행히 아프리카돼지열병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농장주는 그날 밤 곧바로 아프리카돼지열병 의심신고를 했다.”
김현일 옵티팜 대표(수의학 박사)는 최근 펴낸 소책자 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처음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았다. 김 대표는 돼지·닭의 질병 진단 전문가로 농림축산식품부의 아프리카돼지열병 전담팀에 전문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초 신고 농장과 수의사의 행동은 탁월했다. 농장주는 돼지가 열이 나고, 피부가 이상해지고, 이유 없이 폐사했을 때 신고해야 한다는 지침을 지켰다. 어미돼지가 폐사하자 수의사에게 알렸고, 수의사의 빠른 대응은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첫 번째 위험을 막았다.”
그는 “돼지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가고 부검 결과 비장이 커져 있는 특이한 사례를 발견했지만, 수의사가 이를 아프리카돼지열병과 바로 연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9월16일 밤사이 아프리카돼지열병 감염을 확인한 농식품부도 돼지 및 관련 인력과 차량 이동을 전국적으로 중지하는 스탠드스틸(Standstill)을 즉시 발령했다.
최초 대응은 완벽했지만농장주와 수의사, 정부의 최초 대응은 ‘완벽’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를 막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2010~2011년에 돼지 350만 마리를 앗아가고 3조원 예산을 공중으로 날렸던 구제역 사태의 공포가 한반도를 휩쓸고 있다. 불과 한 달 사이, 바이러스는 경기도 파주와 연천, 김포에 이어 인천 강화를 초토화했다. 10월16일까지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진 판정을 받은 돼지 농가가 14곳 이어졌고, 살처분된 돼지가 15만 마리를 넘어섰다. 4개 시도에서는 지역 내 모든 돼지(30여만 마리)를 살처분하거나 수매해 도축하고 있다. 북한 접경 지역을 ‘돼지 진공’ 상태로 만들어 그 아래 남쪽에서 사육되는 돼지를 지키겠다는 고육지책이다.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연천 등지 돼지 농가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의 추가 발병 경고문제는 바이러스의 종적이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점이다. 처음 어디로 들어왔는지, 어디까지 얼마나 퍼져 있는지, 지금까지 확인된 게 아무것도 없다. 정현규 도드람동물병원 대표(수의학 박사)는 “9월17일 파주의 첫 신고 농장이 최초 발생 농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 돼지열병 증상이 발현되지 않은 잠복기 동안에 다른 농가로 이미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바이러스가 확진된 지역의 돼지를 아예 몰살시키는 초강력 살처분 정책을 이어가는 것도, 실상은 바이러스가 어디까지 어떻게 퍼져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사방 도처에서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바이러스 유령을 그때그때 뒤쫓아가기에 급급한 형국이다.
세계동물보건기구(OIE) 산하 아프리카돼지열병 표준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스페인 호세 마누엘 산체스 비스카이노 박사는 10월14~17일 방한해 경기 북부 접경 지역을 돌아봤다. 그는 14일과 16일 과 진행한 두 차례 인터뷰에서 “추가로 더 발병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감염된 멧돼지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멧돼지 수도 너무 많다. 20만~30만 마리가 한국의 북쪽에서 남쪽 끝까지 빈틈없이 산재해 있다. 멧돼지가 산에서 산을 이어 전국을 오염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최초 발병 원인을 모르는 상태다. 감염 지역의 농장 돼지들을 모두 없애고 접경 지역 멧돼지들을 통제한다지만, 앞으로도 멧돼지 감염 사례는 계속 나올 것이다.”
산체스 박사는 지난 6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당시 인터뷰에서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 가능성이 가장 큰 다음 나라는 타이와 한국”이고, 한국의 경우 “북한에서 내려오는 야생 멧돼지가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 전파 매개체”라고 짚은 바 있다.
처음 북한의 멧돼지 전파 가능성을 경고했다. 접경 지역을 돌아보니 어떻던가.
멧돼지가 휴전선 철책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하지만 파리나 쥐 같은 다른 야생동물이 멧돼지 사체와 접촉해 남쪽으로 바이러스를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쪽으로 건너온 다음 트럭 바퀴나 사람에 묻어서라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농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북한에서 감염된 멧돼지가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한강을 수영해 넘어왔을 수도 있다. 2~3㎞ 강폭은 멧돼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가능성은 있나.
중국에서 바이러스에 오염된 채 건너온 돼지고기다. 산에서 먹다가 남은 것을 버리면, 멧돼지가 그것을 먹고 감염될 수 있다. 그 멧돼지가 다시 농장의 돼지로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식이다.
유럽의 경우는 어땠나.
2014년 유럽 동쪽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했고, 2019년 서쪽 끝 벨기에까지 전파됐다.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 멧돼지가 매개체 구실을 했을 텐데, 5년 만에 수천㎞까지 건너간 것이다. 한국은 멧돼지 서식 밀도가 유럽보다 더 높다. 접경 지역 농장 돼지를 없애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멧돼지 서식처인) 한반도 전체를 하나로 보고, 멧돼지 개체수를 적극적으로 줄여나가는 게 시급하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전파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멧돼지 초기 방어 실패의 원인으로, 농식품부와 환경부의 불협화음도 지적된다. 식량 자원인 농장 돼지를 지켜야 하는 농식품부와 생태계의 일부인 야생동물 멧돼지를 보호해야 하는 환경부의 입장이 충돌했다. 환경부에선 처음부터 멧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전파 매개체일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멧돼지 감염 조사에 소극적인 모습이 곳곳에서 노출됐고, 그때마다 애가 탄 양돈 농가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남은 음식물 사료 공급 중단 조처도 때를 놓쳤다. 농식품부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어를 위해 남은 음식물을 사료로 쓰는 걸 금지하자고 주장했다. 음식물쓰레기를 어떻게든 줄여야 하는 환경부의 입장은 달랐다.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한 뒤인 올 7월25일에야 정부의 부분적인 중단 방침이 결정됐다. 파주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뒤에야 남은 음식물 사료 공급을 전면 금지했다.
김현일 박사는 자신의 소책자에서 “진짜 환경을 지키는 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담았다. “아프리카돼지열병에 대한 경고는 2년 전부터 제기됐다. 중국에서 1년 전에 발병해 심대한 피해를 불러왔고 음식물쓰레기 사료 공급을 전면 금지하자는 전문가들과 농장주들의 주장이 계속됐다. 한국은 2010~2011년에 구제역으로 350만 마리가 넘는 돼지와 소를 땅에 묻은 경험이 있다. 이로 인한 환경오염은 따질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산체스 박사는 “유럽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환경부가 야생동물 보호에 나서면서 한때 멧돼지가 700%나 늘어났고, 방역 차원에서 멧돼지 개체수를 줄이려는 축산 당국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는 “환경부와 농식품부, 그리고 농장주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1960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스페인은 35년 만인 1995년 바이러스 완전 퇴치를 선언했다. 발병 초기엔 5~10㎞ 반경 안의 돼지를 전면 살처분했지만, 방역의 질이 높아지면서 감염 농장 안에서 바이러스에 오염된 돼지만 솎아내는 식으로 살처분 범위를 계속 좁혀 나갔다. 스페인은 이제 아프리카돼지열병을 극복한 모범 사례로 세계 3위의 양돈 국가로 꼽힌다. 산체스 박사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준비가 잘돼 있는 나라인데 완전히 준비되기 전에 발병한 것”이라며 “아프리카돼지열병은 구제역만큼 전염성이 강하지는 않기 때문에 한국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국가에서 멧돼지 개체수를 확실히 줄이고, 농장에서는 멧돼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중으로 농장 담장을 치고 파리 등이 돈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충망 등을 꼭 설치할 것 등을 강조했다. 2~3m 울타리 하나로는 멧돼지의 농장 침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산체스 박사팀의 백신 개발 프로젝트
백신 성공 92% 이르러, 2년 뒤 상용화
백신이 없는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된다. 먼저,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통상의 바이러스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다. 유전자 염기서열이 17만~19만 개로 다른 동물질병 바이러스보다 10~20배 더 많다. 바이러스가 크고 복잡하다는 것은, 면역을 형성하는 부분을 찾기 어렵고 그만큼 백신 만들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생존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역 기능을 수행하는 유전자의 발현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오랫동안 아프리카와 유럽 일부 지역 풍토병으로 인식됐던 것도 백신 개발을 지체시켰다. 상품성이 낮다고 판단한 백신 업체들이 적극적인 개발 투자를 하지 않은 것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백신은 2년 뒤쯤 상용화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호세 마누엘 산체스 비스카이노 박사(사진)팀이 그간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최근 유럽연합에서 1천만유로의 상용화 연구 지원비를 받았다. 산체스 박사는 “멧돼지에 백신을 투여했을 때 바이러스 방어 효과가 이미 92%까지 올라왔고, 농장 돼지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이라면서 “멧돼지용 먹는 백신과 농장 돼지용 주사 백신을 동시에 개발하고 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뤄진다면 2년 안에 백신을 시장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산체스 박사의 백신 개발 프로젝트팀에는 유럽의 여러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국과 러시아, 중국 전문가들이 두루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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