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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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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방 짊어지고 자연으로 가자스라

장비·식량 넣고 걷는 ‘백패킹’ 새 트렌드

트레일 코스·합법적 야영지 뒷받침 필요
등록 2019-08-26 11:21 수정 2020-05-03 04:29
백패커들의 배낭. 3박4일 트레킹에 10㎏ 남짓의 식량과 장비를 넣는다. 김진수 기자

백패커들의 배낭. 3박4일 트레킹에 10㎏ 남짓의 식량과 장비를 넣는다. 김진수 기자

배낭 하나로 족하다. 자연과 숲에서 배낭 하나로 숙식을 해결하며 걷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백패킹이다. 최근 아웃도어(야외 활동)의 새 영역으로 백패킹을 즐기는 이가 늘고 있다. 백패킹은 2010년부터 국내에 등장해 최근 5년 사이 퍼지고 있다. 자신이 짊어진 배낭 속에 장비와 삭량을 넣고 걸으면서 야영하는 것이다. 오직 배낭과 도보로 자연을 즐기는 자연 탐방 활동이다. 백패킹은 야영을 기본으로 한다. 대상지는 꼭 산을 고집하지 않는다. 자연 속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만 합법적인 야영이 가능한지 고려해야 한다.

‘수직적’ 등산보단 ‘수평적’ 트레킹

요즘 백패킹은 자연을 즐기려는 30~40대의 삶 형태나 욕구에 맞아떨어진다. 잠자리와 먹거리가 1인용이 기본이다. 예전 등산 문화에서 야영은 서너 명이 함께 텐트를 쓰고 식사는 코펠 하나를 함께 쓰는 공동체 생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백패킹 문화는 장비를 철저히 혼자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텐트·침낭·식기·버너 등 야외 활동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1인용으로 쓴다. 백패커들은 하루 15㎞ 남짓 걷는 3박4일 트레킹을 10㎏ 내외 배낭을 지고 나선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기술 발전으로 장비가 가벼워져 자연에서 또 다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기 어려웠던 이들도 백패킹 대열에 합류했다.

백패킹 문화가 열리기 이전에 야영은 대부분 산에서 했다. 이제는 산은 물론이고 섬과 해변 등 자연경관이 좋은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고 싶어 한다. 백패커들 사이에 성지가 몇 군데 있다. 인천 옹진군 굴업도, 겨울에는 대관령 인근 선자령, ‘영남 알프스’라는 울산 울주군 신불산 평원 등이다. 하지만 선자령에서 야영은 불법이다. ‘영남 알프스’도 허가된 야영장은 아니다. 백패커들은 예측 가능한 야영 공간과 활동을 염원하고 있다.

2005년 전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던 등산과 오토캠핑 열풍은 정점을 찍고 완만한 내리막을 걷고 있다. 백패킹은 기존 등산의 ‘수직적 오름’보다 훨씬 열려 있는 ‘수평적 걷기’를 지향한다. 아울러 오토캠핑의 엄청난 장비와는 거리를 둔다. 오토캠핑은 제대로 즐기려면 거의 집 한 채를 옮겨놓은 듯한 정도의 장비가 필요하다. 아울러 야영지에 자동차가 주차돼야 가능하다. 이에 비해 백패킹은 훨씬 환경친화적 방식으로 자연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한다.

​중견 백패커 고수연씨가 말했다. “도시 속 일에 매몰된 직장인들에게 주말에 탈출할 방법 중 백패킹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백패킹은 다른 아웃도어와 레저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 초보자도 트레킹 방법과 장비 사용법을 익히면 쉽게 즐길 수 있는 아웃도어다. 백패킹 문화는 계속 넓혀지지 않을까 싶다.”

탐사 중간에 쉬는 백패커의 모습. 김진수 기자

탐사 중간에 쉬는 백패커의 모습. 김진수 기자

머문 곳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

백패킹은 북미와 유럽,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아웃도어가 발달한 나라들에서 보편적인 야외 활동으로 정착됐다. 최근 직장인과 청년들 사이에 관심이 높아지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외에 수많은 트레일(산길·오솔길) 코스가 있다. 백패킹을 기본으로 하는 트레킹 문화는 미국과 스위스에서 가장 발달했다.

미국은 PCT(Pacific Crest Trail·태평양 산마루 트레일)라는 서부 장거리 트레일 코스가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4300㎞ 이어졌다. 이곳을 사람들은 백패킹 방식으로 걷는다. CDT(대륙 분수령 트레일)을 비롯해 다양한 트레일 코스가 미국 전역에 펼쳐져 있다.

​미국은 1968년 제정된 ‘국가 트레일 시스템’ 법령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트레일을 관리하고 있다. 총길이가 8만㎞에 이른다. 미국의 백패킹 문화는 LNT(Leave No Trace·흔적 남기지 않기)를 기본 지침으로 한다. LNT는 1991년 미국 산림청과 전국의 아웃도어 학교가 협력해 만들었다. 자연 활동에서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한 권고이자 수칙이다. 공정여행과 책임여행의 아웃도어 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위스는 알프스 자락 곳곳에 다양한 트레일을 조성해 자국민은 물론이고 외국 관광객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트레일 노선과 야영장 등 정보가 국가와 광역·기초 지자체 등 위계에 맞게 잘 짜여 있고, 이 시스템이 인터넷으로 공유된다.

등산장비를 주로 생산 판매하던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백패킹에 주목하고 있다. 몇몇 중견기업은 백패커를 주고객으로 설정하는 마케팅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백패킹은 등산보다 텐트와 침낭 등 기본 장비가 더 필요하다.

백패커가 늘어나는 만큼 고민도 깊어진다. 배낭을 메고 자연으로 들어가서 야영할 곳이 마땅치 않다. 국립공원을 비롯해 많은 산림 지역에서 야영이 금지돼 있다. 백패킹을 즐기는 개인이나 동호인들의 최대 관심은 안전한 야영지다. 일부는 자기만의 야영지를 개척해 조용히 즐기기도 한다.

백패킹 전문 여행사 ‘여행의 명수’의 김명수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백패킹 문화의 확산은 합법적인 야영이 가능한 트레킹 코스가 확대되느냐에 달렸다. 지금처럼 대부분의 자연 지역에서 야영이 금지된다면 백패킹 열기는 10년이 안 돼 수그러들 것이다.”

야영장은 목적이 아닌 수단

​국내에 야영장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오토캠핑을 위해 만들어졌다. 텐트 치고 먹고 마시는 것 외에 달리 할 만한 활동이 거의 없다. 백패킹에서 야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트레킹이 기본이다. 그래서 트레일 코스 중간중간에 야영장이 있어야 효과적이다. 콘크리트가 아닌 맨땅에 화장실과 수도꼭지 하나 있으면 충분하다.

장거리 트레일 코스가 없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산림청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여러 차례 검토는 했으나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트레일 코스 중간에 숙박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트레일 코스를 조성할 만한 지역은 대부분 인구가 고령화해서 민박이나 식당 운영이 녹록지 않다.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 올레길도 더는 확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국내에도 장거리 트레일 코스가 생겨 배낭 하나 젊어지고 일상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백패커들은 염원한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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