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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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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에서

12년간 옛 전남도청 기록해온 김향득 사진작가, 그곳에서 전시회 열어
등록 2019-05-27 05:55 수정 2020-05-03 04:29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YWCA)에서 계엄군에 붙잡힌 고등학생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시민군 소식지 를 만들어 등사해놓으면,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뿌리는 ‘투사회보팀 막내’였다. 고교 시절 ‘영어’ 교사였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게 ‘한시’를 배우며 자연스레 의식화가 된 학생이다. 모의고사 비용 학생 전가에 항의해 교내 수업 거부 데모를 주동할 정도로 “방방 뜨고 다녔던” 청소년 리더였다. 워낙 유명했던 터라, 학교에서는 5·18 때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알고 보니 노동청 앞 집단 발포 때 총탄에 맞아 숨진 건 그가 아닌 친구 전영진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무슨 일 있으면 광주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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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한테 “이 새끼 썽썽하네(멀쩡하네)” 소리를 들은 그는 양서협동조합에 들렀다 대학생 형들을 만났다. 집에 가기 미안해서 ‘하룻밤만 묵고 가야지’ 하다가 하루 이틀 사흘이 흘렀다. YWCA 마지막 총격전 때 계엄군이 “총을 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책을 뚫지 못해 살아남았다. 항복하고 붙잡힌 뒤 그해 7월3일 풀려날 때까지 꽁보리밥 ‘요만큼’으로 허기를 채우며 잠도 못 자고 두들겨맞다가 나왔다. 영화 의 존 트래볼타 춤으로 학교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물건’으로 통했던 소년은, 그날 이후 입을 닫았고 화가 늘었다. 대학 졸업 뒤 몇 번이나 광주를 떠났지만 돌아와보면 전남도청 앞이고 무등산이고 그랬다. 김향득(58) 사진작가 얘기다.

옛 전남도청은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김 작가는 물론 광주 시민들의 애환이 서린 역사적인 공간이다. 광주 사람들은 아직도 무슨 일이 있으면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다. 5·18을 기념할 때는 물론이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 때,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서거 추모식 때, 세월호 참사 때, 세월호 참사 100일·200일·300일 때도 모두 옛 전남도청 앞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였다.

전남도청은 2005년 10월 5·18 유족과 시민사회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남 무안으로 이전했다. 이후 ‘옛 전남도청’이 된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조성됐고, 그 과정에서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 14년이 흐른 지금은 공사비만 170억원을 들여 2021년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 사업을 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역사 속에서 내내 수탈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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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는 2007년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비록 이런 상황이 됐지만 이제부터라도”라는 마음으로 옛 전남도청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일에 천착해왔다. 사람들은 “이미 헐었는데 뭐덜라고(뭐하려고) 찍느냐”고 의아해했다. 친한 형님이 “직장생활을 하면 네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렸지만 “도청은 누가 보게요?” 하고는 거절했다. 형님은 “너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며 웃었지만 “아니요, 저밖에 없을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 후 지금까지 구부정한 어깨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며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 등 ‘오월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김 작가는 “왜 도청을 계속 찍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도청은 광주의 심장이었어요. 처음에는 무조건 5·18에 국한해 도청을 찍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1930년대에 지은 이 건물은 광주 근현대사를 그대로 지켜보았어요. 그 역사에서 내내 수탈의 공간이었지요.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80대 이상 어르신들한테 여쭤보니 일제가 이 지역 잠사협회에서 돈을 뜯어 도청 건물을 지었다는 거예요. 도청 한구석에 누에고치를 형상화한 그림이 있고, 계단 올라가는 쪽에도 목화가 피기 직전 그림이 남아 있더라고요. ‘우리 선조들이 수탈당하면서도 자기 기록을 남겼구나’ 싶었지요. 1945년엔 해방 공간이었고, 1950년엔 한국전쟁 상처가 있었고, 1960년 4·19혁명 때는 학생들이 도청 문을 뜯고 들어왔죠. 이 도청이 가장 기뻤던 순간은 아마 1997년 12월19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 때일 거예요. 도청 주변 맥줏집이고 뭐고 다 공짜 공짜 공짜였어요. 그때 사진을 못 찍은 것이 아쉬워요.”

지난 5월20일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는 김 작가와 윤연우(그림) 작가가 참여하는 ‘오월안부프로젝트-오월, 광주에서 보내는 안부’전이 열리고 있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공동기획 전시 ‘전남도청-시간, 장소, 사람 그리고 기억’의 기억 섹션 특별참여전의 하나다. 김 작가와 지인들이 살아남은 이들의 오늘과 광주의 오월 그날을 잇기 위해 마련한 전시다. 전시장에 마련된 김 작가의 전남도청 사진엽서와 윤 작가의 그림엽서에 편지를 쓴 뒤 전시장 우체통에 넣으면 주최 쪽에서 실제 엽서를 부쳐준다.

김 작가는 5·18 사적지와 항쟁추모탑, 항쟁으로 숨진 열사들의 추모비를 찍은 사진을 모아 첫 전시 ‘임을 위한 행진곡 사진전’을 열었다. 서울 서강대 김의기 열사 기념공원, 중앙대 5·18 민중항쟁비 사진 등을 광주에서 전시했더니 반응이 좋았다. 그는 “광주 시민이 ‘서울에도 5·18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김 작가는 그 후로도 ‘풍경이 아름다운 5·18 사적지 사진전’ ‘불편한 진실 5·18 사적지 사진전’ ‘리멤버 4·16~5·18’ 등 80년 5월과 현실을 잇는 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기억 속에 간직되고 복원에 활용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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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는 지금까지 사진을 약 100만 장 찍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세어볼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옛 전남도청이 가장 많은 건 확실하다. 가장 이슈가 된 그의 도청 사진은 2007년 대선이 끝나고 얼마 뒤인 12월30일 울면서 찍은 눈 오는 날의 사진이다. 신문 에도 실렸고, 비록 저작권자도 밝히지 않은 무단 전제였지만 국비 예산 지원 자료집에도 실렸다. 그는 “사진작가가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을 공짜로 가져가려 한다”고 비판하면서도, “내가 사진으로 남긴 (옛) 전남도청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간직되고 복원에도 활용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광주=<font color="#008ABD">글·사진</font>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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