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국 국방부 장관 한겨레
1997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의 한 호텔에 베트남전 당시 미국과 베트남의 고위 외교안보 의사결정권자들이 모였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때 국방장관을 한 로버트 맥나마라와 전직 관료·군인, 학자 등 13명이 참석했다. 베트남전은 ‘맥나마라의 전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의 중심인물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응우옌꼬탁 전 외무차관, 전직 장교와 외교관 등 13명이 참석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전 총부리를 맞댄 이들은 6월20일부터 23일까지 3박4일 동안 ‘총’ 대신 ‘말’로 격전을 벌였다. ‘하노이 대화’의 주제는 ‘기회를 놓쳤는가?’(Missed Opportunities?)였다. 두 나라가 전쟁을 피하거나 조기 종결시킬 기회를 혹시 놓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에서다.
대화할수록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상대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벽이 엄청났다. 예를 들어 실패한 비밀평화협상을 두고도 양쪽은 엄청난 인식 차이를 보였다. 1965~68년 미국은 베트남에 7차례 비밀평화협상을 제안했다. 비밀평화협상이 무산된 원인으로 베트남 쪽은 미군의 ‘북폭’을 꼽았다. “협상하는 중에 폭격을 계속하면서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폭탄을 더 떨어뜨릴 것이니까 알아서 해’ 하는 식의 자세로 나온다면 곤란하다”는 주장을 폈다. 북폭하에선 평화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맥나마라 등 미국 쪽은 1965년부터 1968년 사이 양국 지도자의 행동에 따라 평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고, 북베트남 정부가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아 북폭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북폭 중지’가 북베트남에는 선결 조건이고, 미국에는 협상 카드였다.
최근 북-미 대화에서도 대북제재를 놓고 비슷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북한이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자 미국은 선결 조건으로 비핵화 진전을 내걸고 있다.
맥나마라는 하노이 대화 마지막 날 베트남 쪽에 이렇게 말했다.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도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룰 기회가 있었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우리가 상대방의 목적과 의지를 파악하고 장래 전망을 바르게 갖고만 있었다면 협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나도 당신들과 함께 평화를 실현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최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도 맥나마라처럼 기회를 강조했다. ‘놓친 기회’를 후회한 맥나마라와 달리 비건 대표는 1월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북한 관련 연설에서 ‘지금 기회’를 강조했다.
“지난 70년간 계속된 한반도의 전쟁과 반목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싱가포르로 이끌었습니다. 목표를 향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제가 오늘날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이 기회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보여준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연합뉴스
‘하노이 대화’ 마지막 날, 맥나마라는 실패한 미-베트남 비밀평화협상의 최대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협상 담당자라면 상대방이 요구하는 최저 기준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고, 그다음 쌍방의 최저 조건을 이루도록 조정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노력을 게을리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최저 조건과 당신들의 최저 조건이 매우 근접했으며, 또 조정 가능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전 때 미국에서는 아무도 양쪽의 최저 조건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북-미 양쪽의 최저 조건을 확인하고 협상을 가능케 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 의회, 주류 언론, 한국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제재 완화 검토 자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최근 방한한 조엘 위트 ‘38노스’(미국의 북한 전문 웹사이트) 운영자는 2월19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전망에 대해 “낙관도 비관도 말고” 현실적 접근을 주장했다. 그는 1990년대 미 국무부 대북 담당관으로 북핵 협상에 참여한 바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1차 회담보다 실질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데 양쪽이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마다 실질적 성과의 기준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100쪽에 이르는 세부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거나 ‘비핵화가 명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건 극단적이고 가능성 없는 일이다.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한 미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비현실적인 내용이 너무 많다.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한 번에 달성할 수는 없다.”
위트 운영자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일어난 북한과의 모든 일을 세 가지 근거로 평가했다
첫째, 과거보다 지금 상황이 좋아졌느냐. “과거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마지막 시기인 2017년과 비교했을 때다. 과연 상황이 나아졌냐. 당연히 나아졌다.”
둘째, 1년간 평화·비핵화 의제가 진전함에 따라 미국의 국익이 향상됐느냐 타격을 입었느냐다. “미국의 국익이 타격 입었다는 증거는 없다. 향상됐으면 됐지 훼손되진 않았다.”
셋째, 북한의 위협이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방어력이 유지되느냐 줄어드냐. “전혀 줄어든 면이 없다고 생각한다.”
위트 운영자는 “이 세 가지 기준에 대해 우리가 ‘예’라고 대답하는 한, 지금 방법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문제 중 하나는 잘못된 통념”이라며 “흑백의 시각만 있다. 북한이 우려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또 다른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1997년 여름 3박4일간의 ‘하노이 대화’ 이후 맥나마라도 ‘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진짜 동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상대가 적이라도 계속 대화하라’가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말했다.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를 계속하라’는 하노이 대화의 교훈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미국이 되새겨볼 만하다.
카이로스(Kairos)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시간 개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카이로스의 이미지를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고, 손에 칼을 들고 발목에 날개를 단 모습으로 묘사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는 확 잡아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고, 뒤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바람과 함께 최대한 빨리 사라지고, 칼을 든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맥나마라는 ‘전쟁을 피하거나 조기에 끝낼 기회’가 다가왔을 때 긴 앞머리를 낚아채지 못하고 뒤늦게 대머리 뒤통수를 바라봐야 했다. 미국이 1960년대 베트남에서 놓쳐버린 기회를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다시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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