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 장관은 2022년 12월31일까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 확대 등 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을 준비하여야 한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며 국회는 법 부칙 제3조(탄력적 근로시간제 개선을 위한 준비행위)에 이러한 내용을 담았다. 탄력적 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는 주 52시간제 도입과 상관없이 이미 법에 규정된 제도로, 업무량에 따라 노동시간을 늘리고 줄이면서 평균 노동시간을 법정 근로시간에 맞추는 제도다. 현행법은 3개월 이내에서 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을 늘려달라는 경영계의 요구가 부칙에 반영된 것이다.
52시간제 물거품 만드나
이 부칙은 주 52시간제를 시행한 지 6개월도 안 돼 정치권과 정부를 흔들었다. 당장 주 52시간제 처벌 유예기간이 12월 말로 끝나니 유예기간을 연장하거나 보완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경영계의 요구에 정부와 여당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여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처리하겠다 한다. 하지만 노동시장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사회적 합의 없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만 늘리면 ‘합법적인 과로’만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나온다. 이제 첫발을 뗀 주 52시간제를 이전의 주당 최대 68시간의 장시간 노동 체제로 되돌리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탄력근로제는 빙과류·냉난방 장비 제조업처럼 계절에 따라 업무량이 변하거나, 석유화학 공장처럼 특정한 기간에 대규모 정비를 해야 하는 업종, 특정 프로젝트에 따라 업무량이 바뀌는 정보통신기술(ICT) 업종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제도다. 제도 자체만 놓고 보면 노동자도 아침 9시~저녁 6시 근무 형태에서 벗어나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어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기업들의 탄력근로제 활용은 3.4%(종업원 10명 이상 기업 2017년 기준)에 그쳤다. 최대 68시간 노동이 가능한 구조에서 굳이 노동자 대표와 합의해야 하는 탄력근로제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 주 52시간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기업들은 그동안 외면해온 탄력근로제를 좀더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12월7일 국회에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고, 제도 도입에 필요한 노동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해당 근로자 대표 협의’로 완화해달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문제는 현행 탄력근로제 3개월 운영시 노동자가 주당 최대 64시간(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추가 연장근로 12시간)을 일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을 늘리면 주 64시간 일하는 주가 많아질 수 있다. 노동계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가 장시간 노동에 ‘면죄부’를 주고, 주 52시간제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반발하는 이유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면, 노동자는 3개월 동안 주 64시간을 일하고 나머지 3개월을 40시간 일하는 게 가능해진다. 주 52시간제와 탄력근로제가 만나면, 6개월 평균 ‘52시간’만 지키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질병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 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간 주당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면 업무와 발병 간 관련성이 있다고 규정하는 현행 산업재해 인정 기준에 위배된다.
6개월 평균 주 52시간은 의미 없다
지난해 12월 대한항공 자회사 한국공항의 한 직원이 출근하자마자 돌연사했다. 항공기 출발·도착을 지상에서 준비하는 지상 조업 서비스, 수하물 탑재·하역, 항공기 급유 등의 업무를 하는 한국공항은 1개월 단위로 탄력근로제를 운영한다.
공공운수노조 민주한국공항지부가 고인의 노동시간을 분석한 결과, 월평균 50시간을 초과 노동하고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한 날은 월평균 8~9일인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회사 쪽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인 주 12시간(연장근로)을 초과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노조는 추가 인력 채용을 요구하지만, 아직 큰 변화는 없다.
게다가 주 52시간제가 아직 적용되지 않는 300명 미만 사업장은 탄력근로제 기간이 늘어날 경우, 기존 64시간에 주말 16시간(8+8시간)을 포함해 최대 80시간 노동이 가능하다는 우려가 노동계에서 나온다. 또 노조가 있는 기업들은 탄력근로제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줄일 수 있지만, 노조가 없는 중소업체 노동자들은 탄력근로제 운영 기간 확대에 따른 장시간 노동의 피해를 그대로 떠안을 수 있다.
또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 기업이 노동자에게 연장근로수당을 주지 않고 주 52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는데, 이는 노동자의 임금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그동안 장시간 노동에 신음해온 게임업체 노동자, 방송 스태프, 가전제품 수리 노동자들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확대하면 그나마 받던 연장근로수당은 줄고,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유다.
경영계는 미국과 유럽 대부분 나라가 탄력근로제를 도입해 6개월~1년 기간으로 운영하는 것을 예로 들며 우리 역시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계와 전문가들은 그전에 장시간 노동 관행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연평균 노동시간이 1700시간 안팎인 유럽과 연평균 2069시간(2016년)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이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유럽과 한국은 비교 대상 아니다
게임개발자연대를 만들어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김환민 IT노조 직장갑질 TF팀장은 “게임업계만 놓고 보면 탄력근로제가 필요한 건 맞다”면서도 “하지만 평소에 인력을 빠듯하게 뽑아놓고 일이 몰리면 장시간 노동으로 직원들을 갈아넣는 지금의 방식은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는 “중국만 해도 시장의 니즈(필요)에 맞춰 많은 인력을 뽑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야근을 강요하며 지금까지 왔지만 IT 강국이란 말은 옛말이고 오히려 세계에서 뒤처지고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정확한 실태조사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탄력근로제 기간을 늘린다는 것은 주 52시간제 취지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주 52시간제 연착륙을 위해 기업의 부담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분담할지 방안을 모색하는 게 진일보한 논의일 텐데, 오히려 논의가 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부는 탄력근로제 실태조사 결과를 올해가 가기 전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제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 논의는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넘어갔다. 애초 4년간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를 거치자고 했던 탄력근로제 논의가 한두 달 안에 합리적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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