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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피해자 유도신문 고통 호소, 재판부

안희정 편파 재판 논란 ④피고인 검증 부재
등록 2018-08-29 12:49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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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나는 사람과 마음이 맞으면 성관계를 맺어요’라는 취지로 이야기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나요?”

“‘젊은 애들끼리 놀면 어떻게 노느냐’고 물으니까 증인이 ‘똑같죠, 뭐. 물고 빨고’라고 대답한 사실이 있나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에게 안 전 지사 쪽 변호인단이 한 질문들이다. 피해자는 모두 “그런 일이 없다”고 답했다. 피해자 법정 신문 녹취서를 보면 안 전 지사의 검찰 진술을 토대로 피해자를 추궁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피해자와 안 전 지사의 증언이 불일치하는 부분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긴데, 법정에서 이것에 대해 검증을 받은 것은 피해자뿐이다. 판사는 물론 검사도 법정에서 안 전 지사에게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맞냐”고 확인할 수 없었다. 안 전 지사가 피고인 신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은 허울뿐

안희정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쪽은 “안 지사 쪽에서 ‘피고인 신문 안 한다’고 했다. 검찰이 ‘우리는 해야 한다’고 했는데 재판부가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신문 안 받겠다는데 검찰이 신문할 수 있는 근거가 있냐, 피고인한테 진술거부권이 있지 않냐’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양정숙 한국여성변호사회 부회장은 “피고인 신문을 하면 검찰과 재판부의 질문을 받아야 하니까 불리할 경우 포기하기도 한다. 성범죄뿐만 아니라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이 신문을 포기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죄형법정주의라는 형사재판의 일반 원칙, 성인지 감수성 등 2가지 원칙을 판단의 고려 사항으로 들었다. 이 피해자의 법정 증언 녹취서 등을 살핀 결과 ‘성인지 감수성’은 구색일 뿐 재판 과정에서 거의 무시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법원이 성폭력 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양성평등기본법(제5조 1항)을 판결문에 인용했다.

피해자는 판결이 날 때까지 검찰 3차례, 법원 1차례 등 모두 4차례 자신의 피해 경험을 반복해 질문받았다. 7월6일 비공개로 진행된 피해자 신문에서 그는 12시간여 동안 변호인들로부터 ‘안 전 지사를 좋아한 게 아니냐’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가족이 위중한 상황에 있는데, 도청에 별일이 없었는데도 (가족에게) 안 가지 않았냐’는 등 인신공격성 질문도 받았다.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을 변론하는 변호인들이 이런 질문을 쏟아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12시간 동안 변호인단이 쏟아낸 무분별한 질문은 단 한 번도 판사의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폭력 판례 분석과 연구 경험이 있는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 피고인 변호인이 도를 넘어 신문하면 재판장이 제지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제29조)은 피해자의 인격이나 명예가 손상되거나 사적인 비밀이 침해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고, 피해자가 편안한 상태에서 진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조사 및 심리·재판 횟수는 필요한 범위에서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피해자는 ‘변호사들의 태도가 처음, 두 번째, 세 번째 반복해 물으면서 유도신문하는 게 지치고 힘들다’고 항의했으나 재판장은 “특별히 증인을 공격하는 내용 같지 않다”며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폭력 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 분석 수사 지원 경험이 많은 범죄심리 전공 ㄱ교수는 “유도신문할 수 있는데, 그게 피해자의 성폭력 진술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성폭력 범죄는 첫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1차, 2차, 3차, 4차 진술할 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을 무시했다”며 “휴대전화 폐기, 합의에 의한 성관계 아니라고 했던 안 전 지사의 입장 번복 등도 같이 심리했어야 한다. 안 전 지사 쪽은 과장, 왜곡, 허위 진술 여부를 따질 수 있는 심리 분석도 받지 않았다. 성범죄가 아니라 무고죄에 대한 재판이 된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1명에 대한 법정 증언 분량(331쪽)은 안 전 지사 쪽 증인 8명의 법정 증언 녹취서 분량(356쪽)에 맞먹는다.

차혜령 변호사는 “재판부가 ‘피해 진술 못 믿겠다’며 무죄 판결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다만 법원이 성폭력 피해자 인격권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성폭력 피해자 인격권 보호 의무는 재판 절차가 또 다른 성폭력 범죄의 재현이 되지 않고 공정하고 타당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필수적인 절차”라고 말했다. 양정숙 부회장은 “보통 성범죄 사건 피해자 증인신문 때는 가해자는 다른 방에 가서 음성으로 청취하게 하는 등 피해자와 공간 분리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피해자 증인신문 때 안 전 지사가 차단막으로만 분리된 채 같은 법정에 있었다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성폭력범죄 등 사건의 심리·재판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규칙’을 보면 피해자 증인신문시 비디오 등 중계장치를 이용할 수 있다.

‘피해자 보호’ 의무 다 했나

1심 재판부는 법정에서 증인신문도 하지 않은 안 전 지사의 진술은 수긍했다. 스위스 출장에서 성폭행 당시 ‘피해자가 슬립을 입고 맨발로 호텔 객실로 왔다’는 것도 “피해자의 복장에 관한 피고인의 주장이… 일고의 가치가 없어 배척할 정도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장은 피해자 신문 때 “스위스에 무슨 옷 가져갔고, 지사 방에 갈 때 무슨 옷 입고 갔는지 기억해보라”고 했다. 다른 판사는 바지냐 치마냐, 셔츠냐 티셔츠냐를 집요하게 묻기도 했다. “잠옷 같은 거 가져가지 않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피해자는 당시 “냉장고 바지 같은 거 챙겨서 간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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