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제한 여권을 가진 시간여행자.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과 즐거움이 함께했던 인생 수업을 마치고 본향으로 복귀합니다.”
서울대 의대 소화기내과 정현채(63) 교수가 미리 쓴 ‘나의 묘비명’이다. 지난해 10월 죽음에 대해 강의하면서 작성했다. 정 교수는 2007년부터 480여 회 죽음학 강의를 하며 ‘죽음학 전도사’ 역할을 했다. 그에게 ‘죽음 준비’가 현실로 다가왔다. 올해 1월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8월 말 조기 퇴직한다. 정년퇴직 예정일보다 2년 앞당겨졌다.
펄펄 끓는 폭염이 이어지던 8월8일, 은 정 교수를 만나러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 의대 간연구소를 찾았다. 빈 책장과 캐비닛, 상자에 담긴 책과 서류들. 정 교수는 연구소에 있는 책과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8월 말 퇴직과 함께 암 수술도 예정돼 있다. 한쪽에 ‘입원실에 가져갈 것’이라고 적힌 상자가 놓였다. “다음주에는 입원해야 한다. 10~12시간 정도 걸리는 암 수술을 받아야 한다. 대수술이다.” 힘든 수술이지만 수술 결과가 좋으면 회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죽음학 강의 최대 수혜자는 나 자신”</font></font>떠날 준비를 하는 정 교수는 2년여 동안 준비한 책 (비아북 펴냄)를 8월 중순께 세상에 내놓는다. 10여 년 해온 죽음학 강의 내용을 풀어쓰고 보완한 것이다. 책이 마무리될 즈음 암 진단을 받아 “암 환자의 시각으로 다시 퇴고해 죽음에 대해 더욱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죽음학 강의 내용을, 강의자가 아닌 암 환자로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제까지의 익숙한 삶에서 새로운 변혁으로 이끄는 ‘신의 한 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암이 찾아왔을 때, 그는 여느 환자들처럼 억울해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일단 암이라는 질병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평범하고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돌연사하지 않은 것, 밥을 먹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기도를 한다.
이런 긍정적인 삶의 자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정 교수는 “‘죽음학 강의 최대 수혜자가 나 자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강의를 하지 않고 죽음에 천착하지 않았으면, (암 진단을 받고) 방황했을 것”이라 했다. 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됐다. “생로병사를 경험하는 과정이 사는 것이고, 이 모든 걸 온전히 경험해야 비로소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font></font>사람을 살리는 일이 직업인 그가 죽음에 관심 갖게 된 것은 2003년 즈음이다. 그전까지는 병원에서 환자들의 죽음을 많이 봤지만 죽음이 나와 관계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50대 초반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라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 무렵 부인이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의 책 을 건넸다. 정신과 의사인 로스 박사는 죽음학 연구의 대가로 꼽힌다. 그는 죽음을 번데기가 나비로 환생하듯이 우리의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 교수는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이라는 로스 박사의 이야기에서 경이로움이 느껴졌다”고 했다. 이후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의사인 과학자의 시각으로 죽음을 알고 싶었다. 의학저널 이나 의과학 전문학술지에 실린 근사 체험 논문 등을 찾아 본격적으로 죽음을 공부했다.
“죽음이 벽이 아니라 문”이라는 걸 알게 된 정 교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고 언젠가 맞을 죽음을 준비했다. 더욱이 심장 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본 터라 자신은 평소에 미리미리 죽음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해왔다. 8년 전부터 퇴임 준비를 했다. 40여 년 전 의과 대학생 때 필기했던 노트, 30년 전 전임강사였을 때 월급명세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 등을 병원에 있는 의학역사문화원에 보냈다. 언제라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도록 계속 정리 작업을 해온 것이다.
2007년부터 병원, 죽음학 모임 등에서 죽음학 강의를 했다. 많은 사람이 죽음을 제대로 직면하고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충실히 살다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죽음학은 인간의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타나톨로지’(Thanatology)라고 한다. 인류학, 의학, 철학 등 여러 학문이 혼재된 학문으로 아직도 연구가 한창이다. 정 교수는 죽음학 강의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영화에 나오는 죽음의 모습, 사후 세계가 있는가, 어떻게 자살을 예방할 것인가 등을 이야기한다. “2007년 12월 죽음학회 학술대회에서 첫 강의를 했다. 강의 주제가 ‘의료 현장에서 보는 죽음의 여러 모습’이었다. 그 강의를 들은 분들이 다시 강의 요청을 해와 계속 강의하게 됐다. 이렇게 강의를 오래 할 줄 몰랐다.”(웃음) 죽음학 강의는 퇴직 이후에도 계속할 것이다. 올 연말까지 잡힌 강의만 7~8개 정도 된다.
정 교수가 죽음학 강의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시선은 곱지 않았다. 병원 동료들이 ‘먹고살기 바쁜데 왜 죽음에 천착하느냐’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니냐’고 했다. 의료계에서는 죽음을 의료 실패로 보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피하는 분위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각막 기증과 무명옷, 해양장</font></font>죽음학 강의를 하는 정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죽음 준비를 해왔다. 부인과 함께 임종기에 인공호흡기 장착 등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원래는 장기 기증도 하려 했는데 암에 걸려 이건 못하게 됐다. 각막 기증은 할 수 있다.”
사전장례의향서도 작성했다. “삼베 수의 대신 화학섬유가 안 들어가는 무명옷을 입으려 한다. 화장을 할 거니까 공해 물질이 덜 나오게 하기 위해서다. 화석연료를 많이 안 쓰도록 나무 관 대신 종이 관으로 할 거다. 장례식에 쓸 연주곡 위주 음악을 모았는데, 200여 곡 된다. 장례식은 해양장으로 하고 싶다. 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1㎞ 떨어진 부표까지 가서 유골을 뿌린다고 한다. 이게 환경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례인 것 같다.”
유언장도 이미 작성했다. 유언장은 가끔 내용을 보완하거나 고쳐 쓰기도 한다. 유언장에 남길 물건도 정리해서 썼지만, 그보다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두 딸에게 말해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유언장 끝부분에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후로 읽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티베트 앞부분을 요약해놓았다. 막 육신을 벗어난 영혼에게 당신은 이제 이승을 떠났으니 가족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면서, 빛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고 빛 속으로 들어가라는 내용이다.
정 교수는 예전부터 ‘구체적 죽음’을 준비해왔다. 그는 2014년 김건열 전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와 유은실 서울 아산병원 병리과 교수와 펴낸 책 의 ‘나는 이렇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에서도 그 내용을 밝혔다. “우리 육체는 죽으면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우리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고 생각한다. 저희 부부 기일에는 제사를 지내지 말고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며 같이 살던 때를 얘기하고 기념하라고 두 딸에게 얘기했다. 그래도 마음이 쓸쓸하면 우리가 좋아했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거닐어도 좋고, 작은 꽃다발 하나씩 준비해서 서로 건네줘도 좋겠다고 했다.”
정 교수는 가족과도 죽음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죽음은 정 교수 가족의 자연스러운 대화 주제다. 부인과는 언젠간 올 사별의 날과 장례 과정도 미리 이야기했다. 두 딸과도 10여 년 전부터 죽음에 대해 대화해왔다. “얼마 전에는 큰딸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고 해서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정 교수는 죽음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이 40살 넘으면 죽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노년기에 들기 전에, 병들기 전에 일찍 죽음을 직시하여 자신만의 죽음관을 가졌으면 좋겠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면 오늘 하루를 허투루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훌륭한 죽음의 6가지 조건</font></font>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병원에서 목격한 죽음의 모습은 비참하다. 죽음을 맞는 게 아니라 죽음을 당한다. “말기 암 환자가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의식이 나빠지면 대형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 기관절개술을 받는다. 이후 환자는 가래 뽑는 소리, 인공호흡기와 모니터에서 나는 소음 등으로 어수선한 환경에서 지내다가 수십 년간 함께 살아온 가족에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사회에는 좋은 죽음의 모델이 없을까. 정 교수는 그런 모델을 찾기 위해 부고 기사를 꼭 챙겨 본다. 그런데 부고 기사에는 주로 죽은 이의 업적에만 초점이 맞춰 있다. “부고란에는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대단한 일을 했는지만 있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을 맞았고 무슨 말을 남겼는지 그런 게 없다. 아쉽다.”
정 교수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는 2000년 미국 내과학회지 (Annals of Internal Medicine)에 실린 논문 ‘훌륭한 죽음을 찾아서: 환자, 가족 그리고 의료진 간의 합의 도출’에 나오는 훌륭한 죽음에 대한 여섯 가지 조건을 말했다. “통증 완화, 명확한 의사 결정, 가족과 의료진이 같이 죽음을 잘 준비하기, 훌륭한 마무리를 위한 갈등 해소. 이 네 조건은 누구나 다들 다른 곳에서 들어본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가지가 무척 중요하다. 타인에게 기여, 그걸 통해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훌륭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200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국 영화배우 폴 뉴먼을 훌륭한 죽음의 모델이라고 손꼽는다. 요리를 좋아했던 폴 뉴먼은 친환경식품 회사를 세워 회사의 모든 수익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약물중독으로 아들이 죽은 뒤에는 마약퇴치 운동도 했다.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상기하며 살고 있는 정 교수는 ‘카르페 디엠’(현재에 충실하라)을 실천하고 있다. 그중 미국의 완화의료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가 저서 에 쓴 네 가지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고맙다고 말해야 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또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미안했다고 용서를 구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마음속에서라도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할 일은 되도록 빨리 용서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을 대할 때 한마디라도 격려의 말을 하고 그 사람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고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마주하는 죽음</font></font>정 교수는 죽음에 임하는 자세를 다큐멘터리 (2012)의 정기용 건축가에게서 배운다고 한다. 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축가 정기용의 일생을 담았다. “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죽는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세상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 무엇인지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다시 곱씹어보고 생각해보고 그러면서 좀 성숙한 다음에 죽는 게 좋겠다. 한마디로 위엄이 있어야 되겠다. 밝은 눈빛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이 말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정기용 건축가의 위엄이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죽음 앞에 위엄 있는 자세를 갖고 싶다.”
정 교수는 그동안 그래왔듯, 앞으로도 죽음 준비를 단단히 해나갈 것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삶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font color="#008ABD">글 </font>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 </font>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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