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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부’ 이주호의 교과부에선 무슨 일이

2011년 8월 이주호 장관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용어 변경’ 독단 고시…

교육과정 시안 개발 정책위원 24명 중 21명 사퇴 항의
등록 2018-07-31 16:36 수정 2020-05-03 04:28
2011년 11월16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주요 대학 총장과의 오찬에 앞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보고를 받으며 걷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2011년 11월16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주요 대학 총장과의 오찬에 앞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보고를 받으며 걷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2011년 8월9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새로운 역사과 교육과정을 고시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 개정 작업도 본격화했다. 모두 2009년 교육과정 총론 개정에 따른 후속 조처였다.

교육과정 고시 직후, 이 교육과정 시안 개발을 책임졌던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정책위)는 수정고시를 강하게 요구했고, 위원 24명 중 21명이 사퇴로써 항의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교육과정은 교과서 내용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통상은 역사교사와 역사학자들로 이뤄진 연구진이 꾸려져 시안을 개발하며, 장관이 또 다른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교육과정심의회를 두어 자문한다. 장관은 대체로 두 기구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해 법적 권한을 행사한다. 장관은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을 지켜야 할 헌법적 책무도 있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 논란의 시작</font></font>

그런데 2011년에는 장관이 결재 과정에서 핵심 개념을 일방적으로 바꾸었다. 오랫동안 역사교과서에서 별 문제 제기 없이 쓴 ‘민주주의’란 단어를 이때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논란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 4년차, 이주호 장관 시기 교과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명박 교과부의 역사교육과정 개발 과정은 유난했다. 시안 개발을 교과부 산하단체인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맡았고, 법적 자문 기구인 교육과정심의회와 별도로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추진위)를 만들었다. 2010년에는 역사교과서 검정을 국편이 담당하도록 바꾸었으니, 교과부가 검정교과서를 강력히 통제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2011년에는 역사교육이 국민적 관심사였다. 일본에서는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고 독도가 일본땅이란 내용을 비중 있게 실었다. 한국에서도 새 역사교과서가 처음 사용됐다. 상반기 내내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제기됐고, 일부 언론은 편향성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 교육과정 개발은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2011년 2월15일 교과부는 추진위를 발족했다. 위원장은 훗날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할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이 맡았다. 그가 추천한 오성(세종대)·전상인(이화여대) 교수가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는데, 두 사람 모두 그해 5월 창립한 한국현대사학회 회원이었다. 곧이어 국편은 산하에 정책위(위원장 오수창)를 구성해 시안을 개발했다.

2011년 4월22일 이주호 장관은 이태진 국편 위원장과 이배용 추진위원장을 대동해 역사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새 교과서와 관련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키울 수 있도록 긍정적인” 내용 요소를 강화하거나, 국가정체성을 분명히 다룰 수 있도록 집필 기준을 강화한다는 내용도 공표됐다.

추진위는 여러 차례 열렸다. 일부 위원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바꾸자거나,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이 벌인 독립운동을 비중 있게 쓰자거나, 통일 노력만큼이나 북한의 도발 등 남북 대립 상황을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위원이 이에 반대했다.

교육과정 시안은 교사와 교수들이 중심인 정책위에서 개발됐다.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전공별 연구 협의진의 검토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마련된 정책위의 초안은 6월30일 공청회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정책위는 이날 나온 지적을 참작해 최종 시안을 마련했고, 국편은 7월4일 이를 교과부에 제출했다. 교과부는 이 시안을 추진위(7월18일), 사회과 교육과정 심의회(7월19일)에 제출해 자문을 받았다.

이로써 교육과정 고시와 관련한 절차는 장관의 결재만 남겨둔 상태였다. 두 회의에서 이렇다 할 문제 제기가 없었으니, 시안 개발진이나 다른 자문위원들도 최종 시안대로 고시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국현대사학회가 교육과정 시안을 대폭 개정하자며 별도의 시안을 교과부에 냈고, 교과부는 이를 다시 국편에 보내 반영 여부를 검토하도록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추진위원회의 때 자유민주주의 논의 안 돼</font></font>

당시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역사 학회 수가 50개가 넘고, 그중에는 수십 년을 활동한 유수의 단체가 많다.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는 2011년 5월20일 창립한 단체(회장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현대사 연구 결과를 담은 전문적 학술대회나 학술지를 간행한 적이 없었다. 위원 중 상당수는 2004년 이래 역사교과서 좌편향 논란을 주도했으며,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펴내는 데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던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었다. 참가 회원 가운데 전문 역사학자 수도 매우 적었다.

정책위원들은 교과부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국편위원장은 7월26일 ‘한국현대사학회 교과서 위원회 이명희 위원장님께’라는 편지에서 의견을 밝히는 한편, 국편 편사부장과 추진위 위원장단, 교과부 담당자, 한국현대사학회 관련자와 만나 내용을 조율하도록 했다.

그 결과가 바로 국편이 2011년 7월28일 교과부에 낸 ‘역사교육과정 개정(안) 수정 요구에 대한 검토 의견’이다. 역사교육과정에 나오는 민주주의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큰 변화는 여기서 나타났다. 이 문제는 정책위와 추진위의 회의 11차례 중 한 번도 논의된 바 없었다. 사회과교육과정심의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서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책위가 시안 개발을 모두 끝낸 2011년 7월4일, 한국현대사학회는 ‘2011 역사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안’이란 제목의 공문을 정책위원장에게 보냈다. 국편위원장, 추진위원장, 교육부 장관이 참조자로 명기된 이 공문에서, 한국현대사학회는 그들의 주장을 네 항목으로 간추린 뒤, 교육과정 시안과 추후 개발할 집필 기준에 반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건국과 호국, 뉴라이트의 전형적 서사</font></font>

건의서에는 대한민국은 자유주의국가인데 이를 분명히 하지 않은 결과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문제점만 비판하고 반공정책의 시대적 필요성 및 긍정적 기능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국가정체성을 분명히 명시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자는 언급은 여기서도 없었다.

이 무렵 한국현대사학회 관계자와 교육부 고위 당국자의 협의가 있었다. 한국현대사학회 쪽은 ①역사교육과정 최종 보완 수정 단계에 한국현대사학회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②교육과정 고시와 함께 시작될 집필 기준 개발에 한국현대사학회 참여를 보장할 것, ③편사부장을 포함해서 국편위원에 한국현대사학회 추천 인사를 3~4명 참여시킬 것 등을 요구했다.

교과부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요구 사항을 곧바로 국편에 전달했고, 국편도 이례적으로 빠르게 답을 보냈다. 2011년 7월13일 작성된 교과부 자료에 따르면, 교과부와 국편은 앞의 두 요구를 바로 수용하기로, 세 번째 요구는 현 위원의 임기가 끝날 시점에서 일부 수용하기로 정리했다. 이 협의의 연장선에서, 한국현대사학회는 정책위가 교과부에 제출한 시안에 첨삭하는 방식의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는 곧바로 교과부와 국편에 전달됐다.

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첨삭 실상을 잘 보여주는, 한국현대사학회의 개정 의견서 일부다.

한국현대사학회는 교육기본법을 인용한 ‘추구하는 인간상’에 관한 구절에서, ‘민주 시민’을 ‘책임 있는 시민’으로, ‘민주 국가’를 ‘자유민주국가’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또 현대사의 ‘민주주의’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바꿔 건국과 호국 부국이란 뉴라이트의 전형적 서사를 도입할 것도 제안했다.

2011년 8월9일 교육과정이 고시되자, 정책위는 절차상의 잘못, 다른 교과가 모두 민주주의를 쓴다는 점, 민주주의 개념이 그 자체로 옳다는 이유를 들어 고시된 교육과정을 철회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교과부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국편은 이명희·전인영 교수 등 한국현대사학회 회원을 참여시킨 집필 기준 공동연구진을 꾸렸다. 추진위 회의가 열렸을 때도, 이배용 추진위원장은 이 문제를 논의하자는 추진위 위원들의 요구를 물리쳤고, 추진위원 9명이 이에 항의해 사퇴했다.

뒤이어 이뤄진 집필 기준 개발 과정은 더욱 왜곡된 상태로 진행됐다. 한국현대사학회 쪽 연구진이 참여한 결과, 공동연구진 내부 합의도 어려웠다. 어렵사리 합의된 집필 기준 시안은 전문가들이 대거 사퇴한 추진위에서 다시 왜곡됐다.

결국 집필 기준에서도 민주주의란 단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자유민주주의란 단어가 채웠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 결의안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해석하도록 했고, ‘독재’란 단어도 없앴다.

이는 이전의 교과서나 역사학계의 상식과 완전히 배치됐다. 24개 학회와 단체에 속한 학자 770명은 역사교육과정과 집필 기준을 수정하고, 이주호 장관의 해임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역사교사 865명 역시 실명을 공개하는 성명으로, 역사교육과정과 집필 기준을 고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이미 친일독재 미화 논란이 거세게 불거졌던 교과서 포럼이나 한국현대사학회 관련자들의 주장에 국가적 권위를 부여했다. 교학사에서 펴낸 한국사 교과서 논란으로 뜨거웠던 2013년판 검정교과서들이 이 교육과정과 집필 기준에 따라 개발된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반공의 이름으로 자행한 적폐들 </font></font>

민주주의를 죄다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자고 주장한 이들의 속셈은 이미 한국현대사학회에서 내놓은 건의서나 개정안에 잘 나와 있다. 반공의 이름으로 분단을 정당화하고 독재를 미화하자는 것이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 소동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한국현대사학회 1·2대 회장이 직접 집필한 교학사 교과서를 보면 된다. 그들이 친일 분단 독재를 ‘불가피했다’고 서술하거나 미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교과서들이 친북 좌편향인지에 대한 국민적 심판은 이미 내려졌다고 본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이 의도를 갖고 자행한 적폐를 놓고 자유민주주의 논란이 벌어지는 상황이 안타깝다.

김육훈 서울 독산고 역사교사·전 역사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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