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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편 역사가들 ‘왜곡의 역사’

청와대와 교육부 지시로 함량 미달 국정 역사교과서 만든 주역들…

집필·편찬 관련 위법·부당 행위 드러나
등록 2018-07-31 16:31 수정 2020-05-03 04:28
제1222호 표지이야기 ‘역사교과서 국정화 조연들 굴종의 역사’ 에 의당 등장했어야 하지만 빠진 주역들이 있다. 청와대와 교육부의 지시를 받아 함량 미달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낸 국사편찬위원회(국편) 소속 역사가이자 공무원들이다.
역사교육의 큰 목적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 데 있다. 국편은 “한국사 연구의 심화와 체계적인 발전 및 국민의 역사인식 고양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두 사실을 고려하면, 국편 역사가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채 ‘탄핵 정부’의 ‘역사 퇴행’을 위해 복무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더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확인한 집필·편찬 관련 위법·부당 행위만 해도 크게 6가지나 된다. △청와대의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 과정 위법·부당 개입 △국편 편사부장 특정인 채용 △국편 편찬 책임기관 부당 지정 △집필진 선정 과정에서 위법·부당 △집필계약 체결과 집필료 집행 과정의 위법·부당 △집필 과정 부당 개입 등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역사학자의 말과 삶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크게 훼손했는데, 국편 책임자들은 “책무를 다했다”며 당당했다. 역사로 현재를 비춰보던 역사가의 거울이 자신의 삶을 비추는 데는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김정배 전 위원장·박한남 기획협력실장

“해방 후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 편찬에 훌륭한 교수와 교사가 이처럼 수십 명이 함께 참여한 적이 없고, 이만큼 국고를 들여서 지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정부와 국회, 국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찬사와 비판을 들으며 균형 있는 교과서를 만든 만큼 국편의 연구원과 직원들의 노고에 고마움의 인사를 올린다. 본인은 이념 편향에서 벗어난 좋은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국가와 국민에게 약속하였기에 완성본을 만든 것으로, 여기까지가 본인 책무의 완성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 조사팀은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서면 답변 내용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래도 한때 고려대 총장과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문화재위원장까지 지낸 원로 사학자였는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 교육부 실무 담당자들마저 완성된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에 대해 “예상은 했지만 그대로 공개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제1222호)고 혹평한 마당에, 국편위원장이 “균형 있는 교과서”였다며 끝까지 견강부회를 굽히지 않은 것이다. 형식적 반성이라도 기대했던 진상조사위 관계자들은 이런 내용이 담긴 답변서를 받아들고 아연실색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전 위원장은 유신 시절 국사 국정화 반대에 가장 앞장선 사학자였다. 첫 국사 국정교과서가 나오기 1년 전인 1973년 6월25일, 그는 에 국정화 반대 기고문을 게재했다. 젊은 사학자 김정배는 “나는 국사가 획일적으로 되는 것에 반대한다”며 “획일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역사 연구의 중요성이 사건의 단순한 기술보다 올바른 이해와 해석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진상조사위에 내놓은 첫 ‘변절의 변’은 “국편위원장 임명 당시 국정화가 결정된 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국정화 추진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이는 상황에서 국편위원장을 수락했음에도 “현대사 부분이 이념의 논쟁에 휘말리는 사실이 안타까웠다”며 “이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 같은) 고대사 전공자가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고 해명했단다.

김 전 위원장의 주장에 근거하면, 그가 처음 국정화 ‘언질’을 받은 시기는 취임 7개월 뒤인 2015년 10월이다. 한 소회의에서 김재춘 당시 교육부 차관이 ‘교과서 정책 방향이 검정과 국정화의 반반에서 국정화로 기울었다’고 얘기했다는 설명이다. 김 전 위원장은 “본인은 검인정 제도를 강화해 심사를 통해 2~3종의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면 수능시험에도 큰 혼란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비서관, 교육부 고위 관료에게도 밝혔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진상조사위 서면 답변에서 “주무장관으로서 역사학계의 권위 있는 학자요 경륜을 갖춘 김정배 위원장에게 역사에 남을 역사적인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소신껏 만들어달라고 전적으로 맡기게 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의 ‘전적인 책임’을 맡은 김 전 위원장은 그러나, 편찬 기준 개발부터 집필진 구성과 교과서 내용 등까지 세세하게 청와대의 개입과 통제에 따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 과정에서 나타난 위법·부당 혐의에 대해 총책임자였던 김 전 위원장의 ‘과오’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국정교과서를 끝까지 “균형 잡힌 교과서” 주장[%%IMAGE4%%]

집필료 과다 집행(1인 평균 2500만원) 등 집필·편찬 과정에서 확인된 위법·부당 사례 가운데, 역사학계가 김 전 위원장에게 가장 크게 분노한 지점은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집필 과정 부당 개입’이다.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과 한 통화에서 “학자라면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일,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남의 글을 동의도 안 받고 막 고치는 일”이라며 “청와대 지시를 받고 집필진의 글을 뜯어고친 행위는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교육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은 2016년 9월6~8일 국정 역사교과서 개고본 초고(편찬심의회 심의본인 ‘원고본’을 심의해 검토 의견을 전달한 뒤 집필진이 수정한 원고)의 현대사 부분을 집중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한 검토 의견을 넘어, 내용을 상세히 수정하고 이를 교과서 문장으로 만든 수정·보완 권고사항을 작성했다. 이른바 ‘올바른 역사교과서 개고본(초안) 수정 보완 권고서’였다. 이 수정·보완 권고사항은 9월12일 국편 역사교과서 편수실로 전달됐다. 추진단의 수정·보완 권고사항은 교육부의 자체 권고였으므로 집필진과 협의 없이 임의로 수정할 근거는 못 된다.

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편수실에 ‘원고본 이후의 원고는 국편에서 먼저 수정하고 집필진의 검토와 허가를 받으면 된다’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집필진이 반발하자, 김 전 위원장이 직접 집필진을 여러 차례 만나 설득했다. 결국 편수실은 추진단 검토 의견에 대해 “중학교 역사 9단원 검토 의견 총 90건 중 수용 90건” “고등학교 한국사 7단원 검토 의견 총 208건 중 수용 198건(부분 수용 7건, 미수용 3건)”으로 수정한 개고본 가수정본을 필자와 사전 협의 없이 작성했다. 진재관 당시 국편 편사부장은 조사팀에 “집필진의 원고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전 위원장이 국정교과서를 끝까지 “균형 잡힌 교과서”라고 주장하는 배경엔 국편이 수정한 내용이 개고본보다 낫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듯하다. 사실 개고본은 김 전 위원장이 집필진을 설득하려고 준비한 메시지에서 “‘독재 미화, 특정 종교 편향, 친기업·반노동, 교육과정 및 집필 기준 미준수, 학습 요소 및 학습량 과다로 학습 부담 가중’ 등으로 국회·언론·학계·교육 관계자 등으로부터 집중 공세를 받을 것이 예상된다”고 밝힐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예를 들어 편수실의 ‘올바른 역사교과서 현대사 개고본 수정 결과 보고’를 보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의 성과와 새마을운동 등에 관한 긍정적인 업적이 부각되어 있으며, 특히 독재정치의 배경에 북한의 대남도발과 안보위기를 기술하여 미화 소지”가 있다거나 “대기업 및 재벌의 긍정적 역할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 부정적인 문제점에 대한 기술이 소략하고, 외환위기 원인 분석 및 노동 관련 기술이 정부나 기업의 입장에서 서술”됐다고 지적됐다.

하지만 국편의 수정으로 국정교과서 내용이 교육과정과 편찬 기준을 준수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되지 않았을뿐더러, ‘최악’을 모면했다고 남의 원고를 동의 없이 뜯어고친 형식상의 위법성이 조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편찬 주무기관으로서, 청와대의 ‘집필진 내리꽂기’에 순응해 애초 제대로 교과서를 쓰기 어려운 인사들로 집필진을 구성한 ‘국편의 원죄’를 반성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2015년 10월12일 교육부가 국정화 행정예고를 하자, 전국의 대학 역사학 교수들과 역사 교사들의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움직임이 확대됐다. 국편은 2015년 11월4~9일 집필자를 공모했다. 총 56명(교수·연구자 37명, 현장 교원 19명)이 응모했고, 교수·연구원 5명과 현장 교원 11명을 집필자로 선정했다.

고교 한국사 최종본 ‘현대’ 부분 오류 ‘10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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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3일 김정배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오른쪽)이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 방향과 집필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겨레 김태형 기자

2015년 11월3일 김정배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오른쪽)이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 방향과 집필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겨레 김태형 기자

2015년 11월13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편사부장, 외부 위원 3명으로 구성된 집필진 선정위원회가 열렸다. 외부 위원 3명은 손승철 강원대 교수, 허동현 경희대 교수, 강규형 명지대 교수로 보수 성향 사학자 일색이었다. 그러나 집필진 공모 전인 2015년 10월22일 국편 명의의 보고 자료를 보면, 이미 집필진 구성원의 약 40%가 확보돼 있었다.

진상조사위가 확인한 결과, 2015년 10~11월 국편을 통해 진행된 집필진 섭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김 전 위원장이 교육부의 예비 명단을 참고하고 인맥을 통해 일차적으로 집필진 후보자 목록을 작성했다. 이를 청와대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에게 보고하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올려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낙점된 명단은 다시 청와대 김한글 행정관을 통해 국편에 전달됐다. 비밀리에 섭외된 집필자들은 ‘초빙 필진’이라는 이름으로 국정 역사교과서를 집필했다. 전체 집필진 37명(중도 사퇴자 포함) 중 21명이 초빙 명목으로 선정됐다. 현장 교원 필진 11명을 제외하면, 교수·연구원 집필진 26명 중 21명이 초빙이었다.

편찬 관련자들은 조사팀에 “국편과 청와대가 협의해 집필진을 구성했다”거나 “청와대 교문수석과 위원장이 협의해 집필진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김 전 위원장은 “집필진 선정에 있어 교수의 경우 국편이 담당했고, 교사는 국편이 잘 모르기 때문에 교육부가 담당했다. 교문수석은 집필진 선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김 전 위원장이 집필진 선정과 관련해 (황교안) 총리실과 협의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박덕호 당시 편수실장은 교육부에 명단을 주어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으나, 김 전 위원장이 “총리실에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여러 사람이 알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초빙된 집필진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우선 김 전 위원장과 관련된 고려대 교수·고구려재단 이사장과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재직시 연구자, 고대사 전공자, 원로 교수 그룹이다. 과거 국편에 재직했던 인물들의 초빙에는 박한남 기획협력실장이 관여했다. 나머지는 한국현대사학회·낙성대 경제연구소·자유경제원 등 보수 성향 학회와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들이다.

특히 현대사 분야 집필진은 김 전 위원장 스스로 “현대사 분야는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므로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각계의 의견을 들으며 집필진을 섭외했고, 이념의 균형성을 중시했다”며 직접 전화하거나 만나서 설득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법학·정치외교학·군사학·북한학·경제학 등 타 전공자만 포함되고 정작 역사나 역사교육 전공자가 포함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물의 수준은 7개 주요 역사단체로 구성된 역사교육연대회의가 집계한 고교 한국사 최종본의 ‘현대’ 부분 오류 ‘103개’라는 수치로 확인된다. 당시 연대회의는 고교 한국사에서만 사실 오류 23개, 부적절한 서술 29개, 편향 49개, 비문 2개를 확인한 바 있다.

“국편의 입장에서 다른 대안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정책이 여론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합법적인 정책 결정에 따라 업무를 수행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공무원은 국가가 정책을 결정하면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애를 쓰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진재관 전 편사부장

진재관 전 편사부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꾸짖듯 국정교과서가 “합법적인 정책 결정”이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 편사부장은 자신의 채용 자체가 ‘특정인 채용 위법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다.

진 편사부장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에서 교육과정 업무를 담당한 연구위원이었다. 역대 편사부장은 주로 국편에 재직했던 연구관들이 공모로 임용됐는데, 2015년 5월 역사 편찬이나 한국사 보급과 관련해 특별한 경력이 없는 그가 오랜 기간(2013년 12월~2015년 5월) 공석이던 국편 편사부장으로 채용됐다. 당시 교육계는 국편에 국정교과서 편찬 업무를 이관하려는 ‘사전인사’라고 평가했다. 진 전 편사부장은 조사팀에 “우연히 교육과정 및 교과서 검정과 관련해 애를 먹고 있고 편사부장 자리가 오랫동안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 공석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신상) 변화가 필요해 응모했다”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상조사위는 조사 과정에서 평가원과 국편의 가교 역할을 위해 진재관을 편사부장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의 차관 검토 내부 문건을 발견했다. 국정화 추진에 깊숙이 개입한 이기봉 당시 청와대 교육비서관도 “다 대통령이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김재춘 차관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안다.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국편·한국학중앙연구원·동북아역사재단 수장들이 밀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돼야 하고, (교육과정을 만들던) 진재관이 평가원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들고 (국편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국편 편사부는 사료 조사·수집·편찬과 한국사 보급을 주된 업무로 하는 부서다. 편사부에 역사교과서 편수실이 공식 조직된 것은 2015년 11월20일로, 진 전 편사부장이 채용될 때인 2015년 5월 편사부는 공식적으론 교과서 업무는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국정화 행정예고 기간이던 그해 10월 사실상 편수조직을 몰래 신설했고, 박한남 기획협력실장과 함께 진 편사부장이 이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화 추진 과정에선 진 편사부장과 박덕호 편수실장이 교육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박성민 부단장 및 팀장·교육 전문직들과 국편 보고 등 상호 협의를 하며 국정교과서 편찬 작업 전반을 조율했다. 이기봉 전 청와대 교육비서관도 “진 부장하고는 독촉 차원에서 연락은 많이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덕호 전 편수실장

진상조사위는 백서에서 “편찬 과정에서 청와대와 정부 각 부처, 국회와의 보고와 연락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을 통해 이뤄졌고, 국편과 교육부 사이의 각종 보고와 연락, 협의는 편수실장과 교육연구사가 전담했다”고 결론 내렸다. 여기서 언급된 ‘편수실장’이 박덕호 전 국편 편수실장이다. 교육부 이러닝과에 있다가 2015년 8월 말께 ‘역사전공자’로 차출돼 국편으로 옮겼고, 국정교과서 편찬 실무를 챙겼다.

국정교과서 편찬 전반에 박 전 실장의 ‘노고’가 깃들어 있지만, 몇몇 굵직한 결정 과정에서도 핵심 역할을 했다. 교육부는 국편에서 만들어진 검정교과서용 집필 기준을 ‘개발진 동의도 없이’ 국정교과서 편찬 기준으로 활용해 논란이 일었다. 관계자들은 박 실장이 검정용 집필 기준을 활용해 편찬 기준을 개발하자는 의견을 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박 전 실장은 “교육부 연구사가 편찬 기준 걱정을 하길래 ‘(검정) 집필 기준을 활용해 (국정) 편찬 기준을 정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줬다”고 인정했으나, 책임은 교육부에 있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편은 집필진을 구성하면서 공모보다 초빙을 우선순위에 뒀다. 공개경쟁입찰을 하지 않고 수의계약으로 연구용역을 맡긴 셈이다. 박 전 실장은 “(기획재정부 예비비) 예산의 성격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교육연구사들은 모르는 일로 저와 국편 총무과, 교육부가 협의했다”고 인정했다. 편수실은 이외에도 집필진을 중학교 역사 1팀, 중학교 역사 2팀, 고교 한국사 팀으로 나눠 집필 용역계약을 체결했으나, 실제로는 시대사별로 집필이 이뤄졌다. 계약상 중학교 역사 집필진이 고교 한국사를 집필하거나 반대로 고교 집필진이 중학교 역사를 쓰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현장검토본이 나왔을 때 교육부 관계자들한테 그만하자고 했다. (수정) 의견이 많이 나왔는데 그걸 다 고칠 수도 없으니 접자고 했다”며 “교육부에서 장관이 최종 발행을 승인하고 연구학교를 한다고 했을 때 이미 우리(국편) 손에서 떠난 것”이라며 허탈해했다고 조사팀 관계자가 전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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