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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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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밤 이겨낸 해고자들

쌍용차 30번째 희생자 추모 대한문 분향소 르포…

태극기부대 인격 테러에 맞선 명예회복과 복직의 꿈
등록 2018-07-17 17:18 수정 2020-05-03 04:28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7월3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설치된 고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중씨의 분향소에서 김씨의 영정 그림을 들고 조문을 받고 있다. 박승화 기자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7월3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설치된 고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중씨의 분향소에서 김씨의 영정 그림을 들고 조문을 받고 있다. 박승화 기자

시청역 2번 출구. 한 아주머니가 태극기 ‘굿즈’를 판다. 태극기, 성조기, 태극 배지, 티셔츠까지 태극 상품들이 다채롭다. 촛불집회에 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모인 태극기집회. 한때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고, 여전히 토요일마다 100~200명이 모인다. 근거지였던 서울광장에서 쫓겨난 뒤 둥지를 튼 대한문을 그들은 태극기부대 성지라고 이른다.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①대한민국 정부 사과·명예회복 ②손해배상 철회 ③해고자 복직 펼침막이 걸려 있다. 2012년 11월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쌍용차 희생자들을 조문하는 사진도 보인다. 그는 대한문에서 단식 중인 김정우 전 지부장의 손을 잡았고, 해고노동자 가족을 안아 위로했다. 다음해 3월에는 쌍용차 평택공장 건너 송전탑에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농성자들을 만났다.

태극기집회 ‘성지’의 쌍용차 분향소

“이 선을 넘지 마시오.” 폴리스라인이 태극기부대와 쌍용차 분향소 사이에 있다. 경찰 어깨 너머로 태극기부대 천막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보인다. 문재인 정부를 부정하는 친박 태극기 노인들과 박근혜 정부 탄핵에 앞장선 노동자들. 공존과 화해가 쉽지 않은 이들의 위태로운 동거다.

지난 7월10일엔 문재인 대통령이 쌍용차 대주주인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 해고자 복직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했다는 소식이 분향소에 전해졌다. 하지만 해고노동자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공장으로 돌아갈 날만 꿈꾸며 보낸 세월이 9년. 희망고문이 남긴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고 김주중(48) 조합원의 영정사진 뒤로 쌍용차 희생자 30명의 이름과 사연이 적혀 있다. 바로 옆 펼침막. 2009년 8월5일 쌍용차 조립공장 옥상 사진이다. 무장한 경찰특공대가 한 노동자를 발길질하고 있다. 김주중씨다. 쇠똥구리처럼 몸을 말아 쏟아지는 곤봉과 군홧발을 피하고 있다. 그의 손에 식당에서 가져온 솥뚜껑이 들려 있다. 날아오는 테이저건과 볼트를 막기 위해서다. 작은 키, 깡마른 몸, 누구 하나 때려본 적 없을 것 같은 그를 대한민국 정부는 폭도라고 불렀고, 뭇매를 때렸다.

해고자 지선열씨(49)가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본다. 형, 동생 하며 가장 가깝게 지낸 사이다. 지난 6월27일 낮 2시에 온 문자. “형 그동안 고마웠어요. 항상 신세만 지고 가네요.” 비슷한 문자를 받은 부인이 집으로 달려갔지만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 위치를 추적했다. 집 가까운 야산 나무에 그가 매달려 있었다.

2009년 8월 조립공장 옥상에서 연행돼 구속된 김주중은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노조지도부가 모두 감옥에 있는 상황. 선열씨는 사무장으로, 김주중은 교선부장으로 노조 일을 했다. 임기가 끝난 후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이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은 ‘쌍용 출신’을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김주중은 선열씨와 같이 고물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 날 김주중이 며칠만 휴가를 다녀오겠다며 사라졌다. 해고되기 전 동료 가족들과 자주 갔던 독산해수욕장에 갔다.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만취한 그는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었다. 청년들은 그를 때리고 모래밭에 내던졌다. 그는 몽둥이를 주워 달려오는 건달을 향해 내리쳤다. 그런데 조깅을 하던 동네 할아버지였다. 사연을 알게 된 노인이 탄원서까지 써줬지만 그는 3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냈다. 쌍용차 집행유예 때문이었다.

태극기부대의 테러와 인격 살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석방 후 공사장 ‘노가다’로 살았다. 작업을 하다 차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6개월 넘게 치료를 받았다. 고등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새벽에는 화장품 배달을, 낮에는 공사장 노동을 했다. 선열씨는 김주중이 2009년 트라우마로 힘들어할까봐 일부러 노조 활동을 못하게 했다. 집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조사위원회를 찾아가 증언을 하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걱정이 돼 안부를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복직하고 싶다고 했다. 선열씨는 김주중이 2009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중이는 남에게 싫다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친구예요. 선배, 후배들에게도 너무 잘해서, 주중이가 뭘 하자고 하면 바로 달려올 정도였죠. 그런 좋은 친구였는데…” 국가가 폭도로 몰았고, 16억7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 김주중. 그는 죽음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선열씨와 동료들은 김주중의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정리해고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노모를 설득하지 못했다. 대신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공장 앞에서 노제를 지내기로 했다. 7월5일 눈물바다가 되어버린 공장 앞에서 김주중의 형님이 말했다. “더 이상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으면 합니다. 정리해고 문제가 해결되어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명예회복이 되었으면 합니다.”

노조 간부들은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리기로 했다. 그런데 대한문은 포악하기로 악명 높은 태극기집회 사람들이 매일 집회신고를 내고 주말마다 집회를 하고 있었다. 7월3일 각오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기자회견 소식을 들은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는 회원들에게 집결 지침을 내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태극기집회 성지를 빼앗으러 왔다고 했다. 150명이 모여들었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쏟아냈다. 분향소를 포위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낮부터 시작된 테러와 인격 살해가 자정을 넘어서도 계속됐다.

대한문 분향소를 봉쇄하고 사람과 음식물 반입을 제지하고 있던 할머니는 일흔이 넘었다고 했다. 집이 인천인데 귀가를 포기했다. 원래 애국당 집회에는 나가지 않는데, 노조가 대한문을 빼앗으러 온다고 해서 나왔다고 했다. 그들은 ‘문재인을 당선시킨 쌍용차 시체팔이들이 박근혜 때도 아니고 노무현 때 죽은 사람들 분향소를 차린다고 해서 나왔다’고 했다. 남의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태극기집회 지도부가 떠들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누군가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물을 전달하자 할머니는 괴력을 발휘해 젊은이를 밀쳐냈다. 스피커에선 군가 ‘양양’과 박정희가 녹음한 국민교육헌장이 번갈아 귀청을 때렸다.

인천 할머니를 포함해 4명에게 쌍용차 희생자들은 노무현 정부 때가 아닌 이명박 정부 때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려줬더니 악다구니를 쓰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졌다. 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다 상사의 갑질 때문에 쫓겨났다는 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은근히 자식 자랑을 하는 모습이 여느 노인과 다르지 않았다. 주동자들의 눈을 피해 휴대전화 배터리와 물, 햄버거와 김밥을 몰래 넣어주기도 했다.

화제가 박근혜로 옮아가니 나란히 앉은 노인 네 명의 이야기가 녹음기처럼 똑같다. 박근혜가 무죄라는 신념은 사이비종교보다 강했다. 부패한 문재인이 수조원의 비자금으로 불법 당선됐다고 했다. 가짜뉴스의 숫자들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그녀들은 공중파, 종편, 신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어서 유튜브를 본다며, 우종창이라는 티브이조선 출신 언론인의 이름을 꺼냈다.

태극기부대 ‘애국 우파’라는 이들에게서 하루 동안 들은 광기 어린 욕설과 모욕은 평생 들었던 숫자보다 많았다. ‘시체팔이, 관장사, 쌍용상조’ 같은 인간의 입에 담을 수 없는 배설물이 쏟아졌고, 쌍욕과 저주, 성폭력과 인권유린이 난자했다. 손톱으로 여성의 얼굴을 할퀴어 피가 뚝뚝 떨어졌고, 채증하는 변호사에게 가래 뱉은 커피를 쏟아부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시민 50여 명은 10시간 넘게 감금당해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인간의 존엄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불법 현장을 경찰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7월4일 동이 터올 무렵, 인권운동가 명숙이 마이크를 잡고 반인권 반노동 반여성 폭력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불법을 용인하는 경찰을 규탄했다. 밤새 발만 동동 구르던 시민들이 모여들어 항의하기 시작했다. 야수처럼 날뛰던 이들이 움츠러들었다. 새벽 6시 시민들이 태극기부대와 경찰을 밀쳐내고 분향소로 들어갔다. 인권유린 현장을 방치하던 경찰이 뒤늦게 병력을 동원해 길을 텄다.

24시간 만에 분향소가 제대로 차려졌다. 국가와 기업의 폭력에 살아남은 해고노동자들이 야만과 광기의 밤을 이겨내고 아침을 맞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이 간간이 이어진 태극기부대의 공격에 맞섰다. 태극기 노인의 표창원 의원 폭행사건, 주말 태극기집회 난동을 겪으며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는 자리를 잡았다. 시민과 정치인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고, 저녁마다 문화제가 열린다. 쌍용차 해고자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올해는 정리해고제 도입 20년, 내년은 쌍용차 정리해고 10년이다. 동료와 가족 30명을 보내야 했던 상주, 10년 동안 상복을 벗지 못한 쌍용차 김득중 지부장이 말한다. “저희가 10년을 싸운 이유는 하나입니다. 회사가 어렵다고 사람을 함부로 해고하는 사회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함께 살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외침에 화답한 시민들이 오늘도 대한문을 지키고 있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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