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몇 명이나 제보 들어왔어요?” “승산이 있을까요? 그래도 함께 산재 신청한다면 해보고 싶어요.”
대한항공 전·현직 승무원들의 ‘산재 미투’가 쏟아지고 있다. 대한항공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K씨의 이야기(제1216호 표지이야기 ‘KAL의 황유미’)를 읽고 로 제보가 쏟아졌다. 그동안 산업재해의 ‘산’자도 꺼내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산재를 신청해보고 싶다”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사흘 만에 20여 건 제보온라인에 기사가 실린 6월11일부터 사흘 만에 20여 건의 제보가 들어왔다. 각종 암과 근골격계 질환, 유산 등이었다. 제보자들은 자신과 주변 동료들에게 병이 생긴 이유가 우주방사선 피폭, 발암물질 청소약품, 생체리듬을 깨는 불규칙한 업무 환경, 인력 부족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 등이 결합된 결과라고 말했다.
제보자 중 암에 걸린 전·현직 직원 4명을 우선 심층 인터뷰했다. Y씨(피부암), A씨(유방암), J씨(유방암), W씨(갑상샘암)다. 모두 기사에 실명을 밝히길 원치 않았다. Y씨는 운항승무원(조종사)이고 다른 이들은 객실승무원이다. 이들의 경험에선 많은 공통점이 보였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직업병이 그동안 왜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는지 엿볼 만한 대목도 있었다.
Y(54)씨는 공군 장교로 근무하다 전역하고 2001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유럽과 미국 등 장거리 노선을 많이 다녔다. 2006년 북극항로 취항 뒤로는 미주 노선에서 북극항로를 탔다. 2008년 허리 부위에 피부암(악성 흑색종)이 발병했다. 수술 뒤 건강 악화로 “피부암보다 무서운 우울증”이 왔고 2015년 퇴사했다.
“회사가 피폭량 알려준 적 없다”A(32)씨는 2011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2013년 유방암이 발병했다. 1년 휴직 뒤 복직했지만 과로와 기내 물건 판매로 인한 스트레스, 우울증 등으로 2016년 퇴사했다. J씨도 대한항공에서 일하다 유방암에 걸렸다. A씨와 J씨는 모두 “의사가 ‘브라카 유전자’(BRCA·유방암을 일으키는 변이 유전자)는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W씨는 1999년 입사해 2016년 갑상샘암에 걸렸고 2017년 퇴사했다.
네 사람은 공통적으로 북극항로를 다닌 경험이 있다. 지구에서 고위도·고고도로 갈수록 우주방사선이 점차 강해지는데, 북극항로는 그 정점에 있다. 북극항로를 한 번 지날 때마다 승무원들은 흉부 엑스선 검사를 한 번 하는 만큼의 방사선량을 쐰다. 대한항공은 뉴욕, 워싱턴, 시카고, 애틀랜타, 토론토 등 미국이나 캐나다 동부에서 한국으로 올 때 북극항로를 이용한다.
A씨와 J씨, W씨 세 명의 경험담은 거의 똑같았다. “다른 항로를 다닐 때랑 달라요. ‘아, 오늘 폴라(북극항로) 왔구나’라고 할 정도로 특유의 증상이 있어요.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 코피가 나요. 물 먹은 스펀지처럼 피곤하고 하혈한 적도 있어요.”
운항승무원인 Y씨는 “피곤했다”라고만 이야기했다. 북극을 지날 때 오로라를 본 건 그가 유일하다. “하얀색 오로라가 펄럭이는데, 뭔가 귀신에 홀린 듯했죠.” 오로라가 궁금하다고 기자가 말하자 “궁금해하지 마요. 방사능 덩어린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북극항로를 다닐 때 방사선에 피폭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W씨가 말했다. “기장 중에선 방사능 수치 측정기를 사서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분도 있었어요. 나중을 위해서라면서요. 어떤 분은 10원짜리 동전을 속옷에 끼고 있으면 피폭이 덜 된다며 동료들에게 나눠줬어요. 저도 해볼까 했는데 바쁘고 피곤해서 결국 못했어요.”
하지만 네 사람은 공통적으로 “회사가 피폭량을 알려준 적이 없다”고 했다. Y씨는 대한항공이 북극항로를 처음 다니기 시작하던 2006년 무렵 사내에서 북극항로와 우주방사선에 대한 교육을 받긴 했다. “안심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기존 항로나 북극항로나 피폭량은 똑같으니 괜찮대요.” J씨는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자신들이 직원들 피폭량을 관리하고 있다면서요? 희망자한테는 알려줬다면서요? 직원들은 전부 금시초문인데!”
승무원보다 피폭량 적은 방사선사 산재 인정피부암·유방암 등 승무원의 암 발병률은 일반인보다 높다고 알려졌다.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소(NIOSH)는 2017년 연구소 누리집에 올린 글을 통해 항공 승무원이 흑색종 같은 피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높다고 밝혔다. NIOSH가 2017년 6월 발표한 ‘여성 승무원의 유방암 연구’를 보면, 여성 승무원 6093명 중 344명이 유방암에 걸려 일반인보다 유병률이 37% 높았다. 2009년 덴마크 직업병 판정위원회는 야간 근무가 ‘2군 발암물질’이라는 국제암연구소(IARC)의 판단을 받아들여 야근이 잦은 승무원의 유방암을 산재로 인정했다. 대만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연구소(IOSH)가 2014년 발표한 ‘대만 10대 암질병 노출 직종 보고서’를 보면 항공사 비행 승무원이 암 발생이 잦은 직업 1위였다.
국내에서 승무원이 방사선 피폭이나 발암물질 노출 등으로 산재 인정을 받은 적은 없지만, 승무원보다 피폭량이 적은 것으로 알려진 방사선사가 최근 법원에서 산재 인정을 받았다.
이 방사선사는 1987년부터 2007년까지 20여 년간 총 33.02밀리시버트(mSv)의 전리방사선(엑스선과 감마선)에 노출됐고, 필름 현상 업무를 하면서 벤젠 등에 노출되기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이 방사선 노출 때문에 생겼을 확률은 11.83%(신뢰도 95%)로 기준치인 50%에 미치지 못하는 등 발병과 업무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요양급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7단독 이승원 판사는 이 방사선사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질병과 업무 사이에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있다는 게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작업장에 발병 원인 물질이 있었는지 여부와 발병 원인 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인과 확률이 낮다는 건 방사선 피폭에 의한 발병 가능성이 작다는 것에 불과하며, 위험인자가 질병을 가속하는 경우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등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건강 관리는 늘 개인의 책임이다. 일하다 다쳐도, 병이 들어도 오롯이 개인이 책임질 몫이다. 4명이 가장 서러웠던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아프니까 다 쓴 소모품처럼 버리더라고요.” J씨는 병이 들자 회사가 퇴직을 종용하는 모습에 상처 받았다. 그는 앞서 기사를 읽을 때도 회사가 K씨를 쫓아내려 한 대목에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대한항공에서 건강 관리는 개인 책임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산재를 신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A씨는 동남아시아로 비행을 갔을 때 회사가 잡아준 저렴한 호텔에 머물다가 화상을 입은 적이 있다.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녹물이 쏟아졌다. 출장 중 부상인데도 회사는 “근무시간이 아니다”라며 공상(공무 중 부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개인 휴가를 냈고 병원비도 스스로 부담했다. A씨는 “작은 부상 하나도 산재로 처리받기 어려운데 어떻게 암을 산재로 신청하냐”고 말했다.
J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운항에 문제가 있어 몸을 다쳤다. 다른 승무원들도 함께 다쳤지만 아무도 산재를 신청할 수 없었다. J씨는 “한 명이라도 산재를 신청하면 팀 전체 점수가 깎인다”며 “암묵적 압박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산재를 신청한다고 하면 팀장과 그룹장 등 윗사람들이 “너 정말 다친 거 맞아?”라고 의심부터 한다. 결국 병가나 휴가를 쓰도록 분위기를 몰아간다. “일하다 다쳤는데 왜 휴가를 써야 해요?” J씨는 억울해했다.
“휴직할 때 6개월 쉬고, 다시 6개월 연장해서 총 1년을 쉴 수 있어요. 그런데 중간에 ‘휴직연장 관련 확인서’에 서명해야 연장이 돼요. 복귀 못하면 사직하라고 적혀 있어요. ‘복직 불가능 사유 해소를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 최종 사직 처리됨.’ 암이 1년 만에 완치되는 병인가요? 열심히 일한 직원이 중병에 걸렸는데 위로의 말 한마디 없고, 사직시킬 생각만 하고.”
W씨도 기자와 통화하다 울었다. “갑상생암 걸린 동기가 있는데, 아픈 사람이 더 많은데, 불임이나 임신 초기 유산도 너무 흔하고. 어떤 회사, 어떤 조직에서 이런 일이 이렇게 많을까….”
이번에 인터뷰한 대한항공 직원 4명은 모두 “산재 신청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A씨는 처음 기자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이렇게 적었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해볼까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선 삼성 백혈병 사건 못지않게 다수의 집단이 결성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현직 승무원들은 대한항공이 무서워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 포기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잊고 있다가 이 기사를 봤습니다. 나랑 나이도 비슷한 K씨가 너무 가엾고 내 지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어떤 방법으로든 힘이 되고 싶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모여 하나가 돼 회사를 상대로 싸우고, 산재 처리를 지금이라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제 잃어버린 1년과 아직도 남아 있는 흉터를 조금이나마 더 지울 수 있다면 동참하고 싶어 메일 드립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라 망설임이 있긴 하다. J씨는 “회사에서 어떻게 야비하고 치사하게 나오는지 다 알고 있어서 겁이 난다”며 “산재를 인정받아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그걸 받으려고 싸우는 동안 내가 받을 스트레스의 양을 비교하며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도 기업도 위험을 알면서도…”앞서 K씨의 산재 신청을 대리한 김승현 노무사(노무법인 시선)는 “집단으로 산재 신청을 하면 근로복지공단에서도 가볍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유사한 사례가 많이 모이고 있는데, 더 모일수록 좋다”면서 “더 제보를 달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와 지난한 산재 투쟁을 했던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대한항공의 현 상황이 삼성 반도체 초기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너무 비슷해요. 정부도 기업도 이게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예방하지 않고 방치했다는 점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삼성 피해자들이 진행했던 직업병 소송의 결과로 노동자들의 산재 입증 책임이 과거보다 조금 완화됐다는 점이에요. 반올림을 지원했던 노무사들도 대한항공 승무원들의 산재에 관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도울 의지가 있습니다.”
글 변지민 기자 dr@hani.co.kr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항공업계에서 일하다 부상이나 질병을 겪은 분들을 찾습니다. 전자우편(dr@hani.co.kr 또는 ph@hani.co.kr)이나 텔레그램(@tea343 또는 @futurnalist)으로 연락 주세요.
산재 신청 K씨가 말하는 보도 그 뒤
“엄마가 안아주며 ‘큰일 했다’고 하더라”
지난호(제1216호) 표지이야기 ‘KAL의 황유미’ 보도가 나간 뒤, ‘KAL의 황유미’ K씨의 심경 변화와 근황을 들었다.
기사 반향이 컸다.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워서 놀랐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많이 왔다. ‘눈물이 나서 기사를 못 읽고 있다. 네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네 뒤에 나 있다. 절대 지치지 말고,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라’ 이런 말 많이 들었다. 힘이 많이 됐다.
금전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분도 나왔다. K씨가 고사하긴 했지만.
정말 감사했다. 말 그대로 내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그 마음만 받아도 좋았다.
산업재해 제보자가 많이 나왔다.
언론의 힘이 크다는 걸 느꼈다. 절 아는 분들은 기사에서 내 목소리가 들린다며 ‘음성지원’이 된다고 하더라. 아픈데 회사가 더 서럽게 한 부분에 다들 공감한 듯하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밖으로 말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라도 얘기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안아주면서 “우리 딸 큰일 했다”고 했다.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떤가.
기사 전과 큰 변화는 없다. 은근히 긴장은 되는데, 응원에 힘입어 나아질 것 같다.
대한항공에서는 연락이 왔나.
전혀 연락 없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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