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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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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이 불러낸 촛불, 조양호 아웃을 외치다

서울 광화문에서 ‘갑질 스톱 촛불집회’ 연 대한항공 직원들…

가면 쓴 직원들 “조씨 일가 적폐 청산”
등록 2018-05-08 15:56 수정 2020-05-03 04:28
5월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모인 대한항공 직원들. 정용일 기자

5월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모인 대한항공 직원들. 정용일 기자

“조씨 일가 물러나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이 촛불을 불러냈다. 5월4일 저녁 7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촛불을 든 수백 명의 ‘브이’(의 주인공)들은 조양호 회장 일가의 ‘퇴진’을 외쳤다. 이날 사회를 맡은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은 집회를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조양호 일가 및 경영진 퇴진 갑질 스톱 촛불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나선 사람 대부분은 대한항공과 한진그룹 계열사의 전·현직 임직원이었다. 평소 같으면 달콤한 주말을 상상하며 집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을 금요일 저녁이었다. 대한항공 직원 연대 350명, 일반 시민 150명(경찰 추산)은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 경영 행태를 더 이상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겠다는 각오로 발걸음을 광장으로 돌렸다.

갑질·밀수 어디까지 해봤니

이들이 요구한 것은 조양호 회장 일가와 측근의 퇴진과 전문경영인 경영 체제로 이행이다. 집회 사회자로 나선 박창진 전 사무장은 “2014년 ‘땅콩 회항’ 이후 항상 마음에 짐이 있다. 우리는 대한항공이 국민으로부터 더욱 사랑받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박 전 사무장이 “갑질 원조 조양호는 물러나라”고 선창하자 집회 참석자들은 “물러나라, 물러나라”를 연호했다. 이들은 “조양호 OUT” “갑질·밀수 어디까지 해봤니”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사회자들이 선창하는 구호를 따라 외쳤다.

집회에 참석한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의 직원들은 항공사 유니폼을 입었지만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면을 썼다. 150여 명이 가면을 썼고, 가면을 구하지 못한 직원들은 선글라스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대형 마스크를 썼다.

대한항공 직원연대는 회사 쪽이 촛불집회 참석자를 확인해 인사 불이익을 주는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신분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심했다. 집회를 앞두고 제보방에는 “팀장이 금일 광화문 집회에 참가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한다. 참가하면 불이익을 받는다고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대한항공 직원연대는 철저한 신분 보장을 위해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삼갈 것 △복면을 한 채로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것 △휴대전화 장식을 뗄 것 △휴대전화 사용에 주의할 것 등도 당부했다.

‘대한항공 갑질불법비리 제보방’을 개설하고 촛불집회를 기획한 ‘관리자’는 집회 일정을 공지하면서 회사 쪽의 불법 채증에 대비해 가면이나 모자·선글라스를 쓰고 집회에 참여하라고 당부했다. 이들이 착용한 가이 포크스 가면은 다국적 해커 활동가들의 모임인 ‘어나니머스’가 쓰면서 유명해졌다. 가이 포크스(1570~1606년)는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가톨릭 탄압에 저항해 1605년 11월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에 화약을 설치한 극단적 가톨릭 보수주의자다. 1980년대 앨런 무어가 쓰고 데이비드 로이드가 그린 풍자만화 에서 ‘브이’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뒤부터 ‘저항의 상징’이 됐다.

관리자는 전날 조씨 일가의 밀수 의혹을 보도하는 과정에서도 제보자의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정보가 노출돼 곤혹을 치렀다. 그는 과 한 대화에서 “한 언론사가 제보자 보호를 위해 삭제해야 할 내용을 거르지 않고 보도해 제보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기자들에게 제보를 전달하는 대화방이 더 이상 통제되지 않아 폐쇄했고, 향후 운영 방향은 일단 촛불집회를 끝내고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이들이 촛불을 들고 나선 까닭은 총수 일가의 ‘갑질’이 도마 위에 오른 지금을 놓치면 언제 다시 이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집회에 조종사 정복을 입고 참석한 ㄱ씨가 말했다. “참담하다. 그동안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던 직원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조양호 회장 일가가 솔직하게 잘못을 이야기하고, 사과한 뒤 적폐를 해결했으면 한다.”

처음 조현민 전 전무의 폭언 녹음 파일을 언론에 제보한 직원, 각종 언론 보도와 이날 집회까지 이끌었던 관리자의 용기에 힘을 냈다는 직원도 많았다. ㄴ씨는 “관리자와 제보자는 정말 대단하다. 우리 회사에서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은 큰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힘을 모은 만큼 앞으로의 집회도 가족과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촛불 든 이유

이날 집회에는 직원 외에 직원 가족, 언론 보도로 촛불집회 소식을 보거나 들은 일반 시민들도 참여했다. 남편이 대한항공 직원이라고 밝힌 여성은 “남편이 대한항공을 바꿔보겠다고 했다가 해고됐다. 지금은 복직됐지만 여전히 이 자리에 서 있다. 좋은 회사 만들어보겠다고 나설 때 함께 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사와 박 전 사무장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퇴근길에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최진철(29)씨는 “대한항공 직원들이 말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이 참여하고 싶어 나왔다. 대한항공의 잘못된 관행이 바로잡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가면 뒤에 육신을 넘어선 신념이 함께하고 있지. 그리고 신념은 총에 뚫리지 않아.” 관리자는 ‘브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한항공 임직원과 시민의 촛불집회 참여를 촉구했다. 그는 이날 한 언론사에 보낸 기고문에서 “지금도 연일 조양호 회장 일가와 경영진의 불법·비리가 폭로되고 있다. 대한항공 전 직원과 계열사 전 직원, 그리고 시민 여러분이 집회에 참여하고, 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자금을 모아주길 부탁한다”고 썼다.

그는 “대한항공의 3개 노조(일반직 노동조합, 조종사 노동조합, 새 조종사 노동조합) 모두가 직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을 근절하고, 직원들이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며 “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자금을 모아주면 우리는 대한항공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갑질 문화에 경종을 울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대한항공 촛불집회를 위한 모금 페이지는 한 언론사 누리집에 5월4일 정오쯤 열렸다. 개설 6시간 만에 2천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모였다.

집회 관련 모금 6시간 만에 2천만원

대한항공 직원들이 촛불을 들어올리는 순간에도 조양호 회장 일가에 대한 사정 당국과 관세청의 수사는 계속됐다. 5월4일 오후 서울 강서경찰서는 조현민 전 전무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검찰이 기각했다. 조 전 전무는 3월16일 대한항공 본사에서 광고업체 직원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며 유리컵을 던지고 종이컵에 든 음료를 뿌린 혐의(폭행)를 받고 있다. 조 전 전무는 폭행으로 광고업체의 회의를 중단시킨 혐의(업무방해)도 함께 받고 있다.

관세청은 5월2일 서울 평창동 조양호 회장 자택에 세 번째 압수수색을 한 뒤 “외부인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공간 두 곳을 찾았다”고 밝혔다. 대한항공은 보도자료를 내고 “해당 공간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창고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해당 압수수색에서 명품 가방·가구 등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관세청은 “조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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