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는 전쟁위기론의 그늘이 짙던 한반도를 단박에 뒤흔들었다. 1월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서 터져나온 한반도 평화의 물줄기는 1월4일 (올림픽 기간 중)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 9일 고위급 회담 재개로 여러 굽이를 지나며 급물살을 탔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이를 두고 “남북대화가 지닌 폭발력을 보여준다. 김 위원장의 신년사만 봐서는 안 된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준 ‘평화’를 향한 확고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대북 대화론자인 이 전 장관은 “전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인터뷰 내내 들뜬 목소리였다. 1월4일 경기도 성남시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이 전 장관을 만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북한, 신년사 내용 현실화하려 할 것” </font></font>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뒤이은 우리 정부의 환영 기자회견, 곧바로 이어진 남북 전화선 복구와 고위급 회담 논의 등 남북관계가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대화 국면으로 급반전했다.최근 일련의 모습은 남북 모두 (한반도의 미래상과 관련해) 장기적인 전략적 의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문 대통령은 평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남북관계를 안정시키고 이를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겠다는 의지가 있다. 물론 김 위원장의 의도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이번에 북 대표단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기적인) 전술적 인식을 넘어서는 큰 틀의 변화다.
평창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보나.김 위원장의 신년사를 보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김 위원장은 (성과를 중시하는) 현장점검형이다. 북한은 신년사 내용을 현실화하려 할 것이다.
김 위원장의 평창올림픽 언급은 갑작스럽게 들리기도 했다. 남북관계를 자신들이 주도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같기도 하고.이번 신년사에 나온 ‘테이블에 핵단추가 있다’는 말은 위협이기도 하지만, 핵무기가 실전 배치가 됐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한다. 북한은 더 이상 핵과 미사일 기술을 진전시키기 위해 기계적인 일정표를 작동시킬 필요가 없게 됐다. (기술적으로) 핵무력이 완성됐다는 북한의 주장이 엉성해 보일 수 있지만, 북한이 언술로 ‘핵무력이 완성됐다’고 선언한다는 게 중요하다. 남은 것은 정치적 일정표다. 앞으로 (핵실험 등은) 미국 등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와 압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은 본격적으로 경제를 돌봐야 할 때가 됐다. 북한은 핵무기 체계 완성으로 앞으로 경제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열렸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의 입장 변화를 위해 북-미 수교, 불가침 약속, 경제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협상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대화는 이전과 어떻게 다를까.네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 당장 한반도 정세를 전쟁에서 평화로 급반전시켰다. 미국 조야에서 흔히 나오던 선제타격론을 약화하고,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켰다. 둘째는 평창올림픽이 지난해와 같은 분위기에서 치러졌다면 성공적인 개최는 고사하고 올림픽 기간 내내 위험과 불안이 상존했을 것이다. 북한 대표단이 온다는 것은 도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발판이 마련됐다. 셋째,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진전을 병행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이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기회가 왔다. 넷째, 지금까지 한반도 정세는 북한의 도발과 도발에 대한 (주변국들의) 압박이라는 악순환의 도돌이표 안에 있었다. 최대의 압박과 제재가 계속됐지만 북한이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될 것으로 본다. 문재인 정부는 드디어 운전석에 앉게 됐다. 문재인 정부가 무조건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제대로 가지 못하면 “내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잘해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올림픽이 국면 전환 계기 될 수 있어” </font></font>상상 이상으로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꽉 막혔던 남북관계가 단번에 뚫렸다. 남북대화가 가진 폭발력이다. 미국을 포함한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명분을 갖고 남북대화가 이뤄질 때 얼마나 큰 힘이 발현될 수 있는지 증명됐다. 얼마 전까지 팽배하던 전쟁위기론은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다. 평창올림픽이 우리한테는 절호의 기회다. 우발적이지만 필연적인 계기 속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할 때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여전히 신중한 태도다.미국 내에서는 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잘 보면 “우리는 (제재와 압박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도 수준이다. 제재와 압박이 더 이상 중심 이슈가 아니게 됐다. 미국도 그것을 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최대 압박을 얘기하지만 현재 스스로 모멘텀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도 올림픽이 국면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미국 정부가 압박과 제재를 말하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북한과 대화에 응해도 비난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한-미 군사훈련 등은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는 핵심 안보 사안이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 진영의 논리가 여전하다.한-미 군사훈련은 한미동맹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겠다. 평창올림픽의 기본 정신이 평화이고 유엔에서 휴전 결의안도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는 핵이나 미사일로 도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한-미 군사훈련은 방어 목적이니까 해도 된다는 것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물론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내세운 게 뻔한 ‘술책’이라며 응하지 말자는 얘기가 있다. 김 위원장은 한편으로 제재와 압박을 돌파하고, 또 피하기 위해서 나섰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술수가 우리가 관리 가능한 영역 안에 있다. 그게 술책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당면한 목표가 있다. 나아가 문 대통령이 거듭 강조하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있다.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은 당분간 중단될까.김 위원장이 저렇게 자락을 깔았으니 (실험)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인공위성이나 낮은 단계의 로켓 실험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힘들겠지만 그것 또한 조심할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혼밥’에 숨겨진 전략적 계산</font></font>더 중요한 것은 이번 대화를 계기로 북핵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다. 북한은 핵문제만큼은 북-미 문제라고 여긴다.역사에 답이 있다. 북한은 참여정부 때도 지금처럼 핵문제는 미국과 논의하겠다고 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에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독자적인 공간을 어렵게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해 온전한 행위자로 인정받았다. 이번에도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미국도 우리만큼 알 수 없다. 미국에도 우리 얘기를 듣게 해야 한다.
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다.(그동안 한-중 관계의 갈등 요인이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문제는 지난해 12월 한·중 정상회담 때 이뤄진 봉인 합의 등에 비춰볼 때 잘 풀릴 것으로 본다. 지난 10월 말 한-중 외교 당국이 협의한 ‘3불 원칙’(사드 추가 배치, 미국 MD 체계 편입, 한·미·일 군사동맹 추진 불가)을 주권 포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중 정상이 “절대 반대”라고 했다. 정상 간의 합의에서 어떤 사안을 두고 ‘절대’라는 표현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기를 방증한다. 그 점에서 한국과 중국 사이의 공감대는 확인됐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말하는) ‘쌍중단’(한-미 군사훈련 중단, 북한 핵·미사일 실험 중단)이 이뤄졌다.한-미 연합훈련이 연기되면 자연스럽게 (훈련이) 축소된다. 차기 연도 군사훈련까지 다 세워놓은 미국 처지에서는 다음 어느 일정 중간에 훈련 일정을 끼워넣을 수밖에 없다. 패럴림픽이 열리는 4월까지 훈련을 하기 힘드니 이를 (사실상) 중단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도 아니면 모다’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다. 연기냐 축소냐, 중단이냐 쌍중단이냐 이렇게 미리 단정지을 필요가 없다. 중국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된 모양새니 그 효과를 얘기하면서 역할을 찾을 것이다. 각자가 만들어진 실마리를 갖고 가능성의 공간을 넓히면 된다.
문 대통령의 지난 중국 방문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문 대통령이 받은 의전에 대해 말이 많은데, 중국이 의전적으로 결례를 범했는지, 국빈 방문의 틀에서 볼 때 환대받지 못했는지를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후자가 맞다. 그것도 냉랭한 수준이랄까. 중국 입장에서 보면 사드 봉인은 차선을 택한 것도 아니다. 최악을 피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한국이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흡수된다는 판단이 있었으니까. 또 중국 지도자는 문 대통령을 만나고 한-중 관계를 복원하는 과정에 대해 자국민에게 변명할 구실이 있어야 했다. (중국) 국민은 국민대로 감정의 앙금을 소비하는 시간과 프로세스가 필요했다. 그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무너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새로운 감성을 모아가는 우리만의 퍼포먼스도 필요했다. 국내 여론은 ‘혼밥’이라고 폄훼했지만, 문 대통령의 식사는 중국 국민의 마음에 오래 남을 것이다. 전략적 계산이 있었고 (국내 여론과 달리 관계 개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제재와 압박’도 변화 불가피</font></font>인터뷰가 있던 1월4일 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통화를 통해 평창겨울올림픽 기간에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추가로 진행된 전화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한-미 군사훈련 연기를 (미국과 완전한 합의 이전에) 선제적으로 발표하면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정세를 안정시키고 북한이 호응하게 했다. 문 대통령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어 계속되는 제재와 압박에 대해서는 “그것을 얘기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훈련 연기라는 결과를 끌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제와 압박은 현재까지 존재한 흐름이었고, 이 흐름까지 변화시킬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분명한 것은 대화라는 새로운 흐름에 미국의 동의를 받은 것이다. 대화가 시작되면 기존의 제재와 압박은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이를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장관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문재인 대통령이 꼭지를 못 따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제재와 압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 또한 대화의 국면을 열고 한반도 평화의 구조를 만드는 실마리를 찾다보면, 저절로 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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