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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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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반격을 맞다

26년 전 미국 반여성주의 운동 다룬 책 <백래시> 국내 번역…

2017년 한국 상황과 너무나 흡사
등록 2017-12-21 01:56 수정 2020-05-03 04:28
1991년 수전 팔루디가 쓴 책 가 26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됐다. 는 미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의 성과가 사회에 제대로 안착할 틈도 없이 ‘반격’(backlash)에 휩싸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시대(1981∼89년)를 해부한 연구서다. 미디어·대중문화·언론·종교 등 사회를 둘러싼 모든 ‘플랫폼’이 미국 사회에 일어난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페미니즘을 지목했고, 일하러 나온 여성들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결혼하지 않은 나이 든 여성은 ‘우울 전염자’였고, 낙태하는 여성들은 이기적 존재가 됐다. 수전 팔루디는 이 모든 공격을 ‘백래시’(반격)라 하며 이런 역풍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 틀을 제공했다.
1991년과 2017년의 미국 상황은 26년이라는 간극에도 너무나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에선 1990년대 여성발전 기본법 제정, 2001년 여성부 설치 등으로 여성운동이 짧은 시간에 적잖은 제도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운동의 동력은 점점 사라지고 페미니즘에 대한 거센 반격이 일었다. 그 뒤 마치 페미니즘은 없는 듯한, 진공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리부트’ 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나는_페미니스트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 공중화장실에서 한 사람이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여성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러나 여성들의 분노와 저항은 한층 더 은밀하고 전면적인 ‘백래시’에 부딪혔다. 2017년 지금, 여기의 백래시를 들여다봤다. _편집자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여성들의 검은시위’ 참가자들이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정부의 입법예고를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여성들의 검은시위’ 참가자들이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정부의 입법예고를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페미 여성계는 있지도 않은 유리천장 신화를 주입하지 마라! 새빨간 거짓말-남녀 임금격차 사기극을 중단하라! 남성혐오 매스컴과 젠더폭력 방지법을 즉각 철회하라!”

반격의 수뇌부는 누굴까

12월10일 오후 2시 17∼18명의 남성들이 ‘전세계 페미들의 상습 거짓말’ ‘마법의 단어! 여혐?’ ‘세계는 지금 페미니즘 OUT!’ 같은 팻말을 들고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페미니즘을 저주하는 구호들을 격하게 외쳐댔다. 2010년 온라인에서 개설된 뒤 현재 회원이 1800여 명에 이른다는 ‘안티페미협회’에서 주최한 ‘안티페미집회’였다. 남거성 안티페미협회 대표는 이날 집회에서 “성인지 예산제도 등으로 페미니스트들이 혈세를 깎아먹고 있다” 며 국가경쟁력을 갉아먹는 주범으로 ‘페미니스트’를 꼽았다. 2017년 지금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또 다른 공격의 양상은 이런 ‘구호’를 넘어 여성들에게 실제 위협이 된다. 여성들을 표적으로 한 신상털기, 살해 협박, 고소·고발 등이다. 지난 7월 온라인 뉴미디어 닷페이스와 한 인터뷰에서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최현희 교사에 대한 거센 공격이 있었다. 최 교사의 각종 SNS 계정 등을 털어 신상을 공개하는가 하면, 학교로 전화해 항의하고 비난했다. 최 교사는 결국 8월 휴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보수단체는 성평등 교육철학이 ‘아동학대’라며 그를 고소했다.

이런 신상털기는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를 낳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게임방송을 진행하는 비디오자키(BJ) 윤아무개씨는 지난 8월 ‘갓건배를 죽이러 간다’는 인터넷 생방송을 해 인기를 끌었다. ‘갓건배’는 유명 여성 온라인 게이머로, 그동안 여성 게이머들이 게임 중 겪은 성적 공격, 혐오 발언을 돌려주는 미러링으로 유명해졌다. 갓건배가 “키 작은 남자”를 조롱하는 멘트에 자극받은 윤씨는 “그의 주소 등을 제보받았다”며 “목 졸라 죽이겠다” 등의 표현을 이어가며 방송을 진행했다. 무려 7천여 명의 접속자가 이 방송을 지켜봤다. 그러나 윤씨가 ‘제보받은’ 주소 등은 갓건배의 것이 아니라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당시 추모 집회에 참석한 다른 여성의 것이었다. 윤씨는 범칙금 5만원을 내고 ‘인지도’와 ‘인기’를 얻었다.

이런 공격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수전 팔루디는 저서 에서 1980년대 미국 여성운동에 거대한 공격을 한 도전자들은 “소득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 (그래서 이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중위 연령 33세의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성들”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이들은 “반페미니즘 테제의 창시자들이라기보다는 수용자들”이다. 이들을 움직이는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반격의 수뇌부’는 페미니즘을 주변적 문제로 여기고 낙태 합법화와 남녀평등 헌법수정안에 반대함으로써 레이건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영향을 끼친 미국 신보수주의 정치가들과 근본주의 성직자들 등이다.

제한된 경험에서 나오는 여성혐오
12월10일 안티페미협회 회원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12월10일 안티페미협회 회원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에선 어떨까. 12월10일 안티페미협회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남거성 대표는 “우리 대부분은 가부장제는커녕 남성 우위라는 것 자체를 경험도 해보지 못하며 자라난 신세대들”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촛불시민’이라고 자신을 밝힌 유아무개씨는 “페미니스트들은 성별 임금격차 통계를 왜곡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남녀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하는데, 20대는 남녀 임금격차가 없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많이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남녀성별 임금격차 1위가 될 수 있냐”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그 뒤에 발언한 한 남성도 “도대체 학교 다닐 때부터 남성 우위를 겪어본 적이 없다. 언론들을 봐라. 남성 성범죄자는 신상 다 까발리고, 여성 성범죄자는 A씨·B씨 한다”고 외쳤다.

이들은 주로 ‘페미니즘이 통계를 조작해 잘못된 정보를 사회에 주입한다’고 주장한다. 최현희 교사에 대한 분노도 ‘페미니스트 교사가 아이들에게 편향되고 왜곡된 지식을 주입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의 일부만 취사선택한 경우가 많다. 성별 임금격차에 대한 주장이 대표적이다. OECD 성별 임금격차 통계를 보면, 한국 여성의 임금은 남성 임금의 62.8%로 34개국 가운데 임금격차가 가장 큰 것이 맞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세대별 성별 임금격차는 OECD 통계로는 알 수 없다. 다만, 한국 통계청이 생산하는 ‘2016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원자료를 활용해 시간당 임금 기준으로 성별 임금격차를 분석했을 때, 성별 임금격차는 15∼29살은 530.6원, 30∼54살은 6027원, 55살 이상은 6257원으로 확인된다. 55살 이상의 시간당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크고, 15∼29살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낮다.(‘세대별 성별 임금격차 현황과 시사점’, 김난주 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 사람이 처음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20대에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낮긴 하지만(그마저도 없지는 않다), 30대 이후 여성들은 출산 등으로 경력단절을 겪고, 이후 성별 임금격차는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성별 임금격차가 없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은 20대 통계만 부분적으로 가져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은 왜 그러는 걸까.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0년 이후 고등교육에서 남녀 간 거의 완전한 평등이 이뤄졌다. 교육 기회의 차별은 거의 없다. 보편적으로 여성들의 학업 성적이 더 좋다. 무조건 시험 결과로 당락이 판가름 나는 고시에서 유독 여성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고등교육까지다. 사회에 나오면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 ‘혐오’를 가시화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때까지의 경험만으로 남성에 대한 ‘역차별’ 신화를 신봉한다”고 말했다.

진보정권에 책임 있다

실제로 여러 지표는 남녀가 사회에 나오는 순간 달라진다. 영국 시사주간지 가 해마다 조사하는 ‘유리천장지수’(직장 내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는지 평가하는 지수로 임금·양육비용·간부직 내 여성 비율 등 10개 항목을 합산해 산출한다)는 한국이 5년째 꼴찌다. 아이슬란드·스웨덴·핀란드 등이 80% 안팎인 반면, 한국은 21%에 불과하다. 유엔개발계획 성불평등지수를 보면, 남성 대비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6.3%에 불과하다. 노동시장 진출도 여성은 50%, 남성은 71.8%로 겨우 절반이 된다.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나왔다.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공격이다.” 의 이 문장이 지금, 여기 한국 여성과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거센 반격의 원인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반격의 수뇌부는 누굴까.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진보정권을 이끄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각종 ‘여성혐오’적 글쓰기로 사임 압력을 받아온 탁현민 행정관이 제자리를 지키는 등 현 정부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허용하는 ‘암묵적’ 메시지를 준다는 것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모욕 주고 대상화해온 이를 국가 통치 이미지를 만드는 자리에 그대로 두고 있다. 여성부 장관까지 나서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다. 반면 ‘낙태죄 비범죄화’ 청와대 국민청원에 조국 민정수석이 한 답변을 천주교계가 ‘교황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항의하자, 대통령의 지시로 곧 수정했다. 여성들의 요구에는 하나같이 ‘나중에 해도 되는 사안’으로 유보하면서 종교계 요구에는 민감하게 대응한다. 새 정권이 출범했지만, 여성들의 삶이 나아진 점은 없다. 아무도 그렇게 못 느낀다. 정권의 이런 태도가 사회적 좌절을 겪는 남성 일부 집단의 ‘반격’보다 더 책임이 크다.”

새 인식에 필요한 새 언어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는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여성 장관 임명 등 상징적 행보만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차별금지법 제정은 유보, 낙태죄 비범죄화도 유보하며 ‘유보적 태도’만 보이고 있다. 여성 장관을 임명하는 등 상징적 행보는 (일부 남성들 눈엔) ‘여성 상위 시대, 역차별’의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삶이 실질적으로 향상되는 것과 무관하며 결국 지난 정권부터 누적돼 온 혐오와 반격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반격은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강남역 시위에 나섰던 미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는 “신상털기는 기본이 됐다. 툭 하면, 온라인에 모든 게 공개된다. 댓글 가운데는 ‘쟤 어느 학교야’ ‘너 4층 살지? 조심해’ 등 나를 아는 사람이 단 것 같은 내용도 많다. 그 때문에 공황장애, 우울증에 시달리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지원 페미몬스터즈 활동가는 “페미니즘이 다시 왜곡되고 있다. 모든 페미니즘이 메갈리아 아니면 워마드가 됐다. (페미니즘 내부의 다양한) 결을 들여다보고, 각자가 주장하는 내용(의 차이)을 봐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등을 쓴 리베카 솔닛은 “새로운 인식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페미니즘은 개개인이 따로따로 겪고 있던 경험들을 묘사할 단어를 숱하게 만들어냈다. 데이트 강간, 성희롱 등 ‘관습’을 ‘범죄’로 만든 것은 언어였다. 지금까지의 ‘반격’에 붙인 ‘백래시’라는 해석의 도구도, 페미니즘이 위축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 않을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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