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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마오 반열 실화냐

시진핑 권력 집중…

집단지도 체제 약점 타개할 강력한 리더십 필요하다는 데 당원로·계파 동의했을 수도
등록 2017-11-08 02:08 수정 2020-05-03 04:28
시진핑 중국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10월2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9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10월2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9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끝난 직후인 10월31일. 새로 구성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7명은 첫 외부 일정으로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던 상하이의 일대회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중앙에 선 시진핑의 선창으로 입당 선서를 큰 소리로 복창했다. 시진핑은 “초심을 잃지 말고 사명을 견지하자”는 말로 제19차 당대회의 긴 개막 연설을 시작했는데, 그에 어울리는 첫 퍼포먼스 장소로 일대회지를 선택한 것이다. 그날 저녁 중국 관영 매체 「CCTV」는 입당선서를 복창하는 최고 지도부의 모습과 시 주석에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을 반복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부터 문화대혁명(1966~76)을 비판하며 개인숭배 금지 원칙을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왔는데, 그 규율이 느슨해진 것으로 보였다.

강력한 권력 집중이 필요하다

분석가들은 제19차 당대회의 결과로 드러난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을 개인의 권력욕 때문에 벌어진 현상으로 보고, 이를 1인 독재 강화나 전체주의로의 회귀로 판단한다. 하지만 시진핑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당 전체로 보면 조금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보면, 당이 문화대혁명 이후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권력 엘리트 내부의 합의를 중시하는 집단지도 체제를 만들어낸 목적은 이후 당내 큰 분열이 생겨 집권당의 안정적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오쩌둥같이 한 사람에게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방식을 피하는 동시에 체제에 불만을 느낀 대중운동과 당 내부의 분파가 결합하는 위협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2012년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권력 이행기에 생겼던 ‘보시라이 사건’(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영국인 닐 헤이우드와 경제적 이익 문제로 갈등을 겪다 그를 독살한 것을 계기로 드러난 보시라이의 직권남용, 부정부패 등 권력형 비리 사건)과 그와 연관된 ‘저우융캉 사건’은 그동안 유지돼온 당 집단지도 체제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충칭에서 좌파적인 정책을 실시해 큰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던 보시라이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은 당시 상무위원으로 공안과 경찰력을 총지휘하는 정법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저우용캉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것이 당 지도부에 큰 위협이 됐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직 그 전모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외신에선 이들이 심지어 정변을 모의했다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 지도부는 18대 지도부를 구성할 때 정법위원회 서기 직위를 상무위원회에서 제외하고 상무위원 수를 9명에서 7명으로 줄였다. 또 유력한 6세대 지도부로 예측된 충칭시 서기였던 순정차이의 낙마 이유 중 하나는 보시라이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조처는 모두 이 사건이 매우 엄중했음을 방증한다.

즉, 보시라이 사건은 상무위원 간의 권력 분점이라는 기존 집단지도 체제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킨 큰 충격이었다. 그 때문에 이를 제압할 수 있는 좀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최고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에 여러 당원로들을 비롯한 각 계파들이 동의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 빈부 격차, 부정부패, 생태 위기, 부채 증가, 경제성장 둔화 등 여러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강한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서도 좀더 강력한 권력 집중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선택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

어찌됐든 이번 당대회의 눈에 보이는 결과는 시진핑으로 권력 집중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현직 지도자의 이름이 들어간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이 당의 주요 지도 이념으로 당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창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나 개혁·개방으로 노선을 전환해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덩샤오핑에 비해 아직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한 시진핑의 이름이 당장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졌지만 당 중앙은 이를 관철했다.

하지만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이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제기했다기보다 큰 틀에서 당은 여전히 덩샤오핑의 유산 속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에서 앞으로 2050년까지 대전략의 구체적인 목표들과 그에 따른 여러 실행 방안들의 비전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비록 그 설계도가 화려해지고 중국적 색채가 더 강해졌으며 내용에 이것저것이 덧붙여졌음에도, 덩샤오핑이 이미 1980년대에 제기했던 2050년까지 중국의 3단계 현대화 전략이나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중국의 가장 중요한 국정 목표는 경제성장이고 그 방법으로 개혁·개방을 견지해나가되 공산당 영도의 원칙을 유지해나간다)이라는 원칙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다. 그런 맥락에서도 시진핑으로 권력 집중은 중국에 뭔가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덩샤오핑 시기에 그려진 큰 그림을 그려가는 가운데 그동안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인다.

당 중앙과 시진핑으로 권력 집중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와 권력 내부에서 하나둘 드러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선택일 수도 있다. 시진핑은 당대회의 연설에서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사상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배격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이 기층 인민들에게 보이는 태도를 살펴보면, 과연 자신이 얘기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공산당의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아래로부터 나오는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은 크게 억압당한 채 활력을 잃고 있다. 2년 전 겨울 중국 당국은 광둥 지역의 노동 비정부기구(NGO)와 활동가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과 억류를 했고, 언론을 동원해 이들이 외국의 자금을 받아 사회불안을 조장했다며 비난했다. 그때 노동자들은 저항의 의미로 군벌정부가 막 태동한 중국 공산당을 탄압한 내용을 담은 1922년의 한 신문 기사를 갈무리해서 SNS에 올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만국 노동계급 해방 이상 어디로

“후난성 경찰 당국은 ‘이전에 우리가 소나 말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이 되자’는 구호로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외부의 자금을 받아서 비합법적인 조직을 결성해 지역에서 분규를 조장하고 사회의 안정적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죄로 마오쩌둥, 류샤오치 등 7명을 잡아들였다.”

과연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은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만국의 노동계급 해방이라는 그들의 원대했던 첫 이상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하남석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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