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드에서 느껴지는 ‘이라크 파병’ 데자뷔

외교 여건상 원치 않은 선택 내몰린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 떠나보낸 노무현 정부와 다른 결말 맞을까
등록 2017-09-12 16:24 수정 2020-05-03 04:28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30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30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북한이 핵개발에 나섰다. 미국이 군사 옵션의 가능성을 열었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한국 대통령이 나섰다. “전쟁 반대”를 분명히 했다. 미국은 북한에 ‘선 핵포기’를 요구했다. 주한미군 (감축) 논의가 공공연히 오갔다. 북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핵실험을 이어갔다.

지키지 못한 ‘절차적 정당성’

여기서 ‘한국 대통령’은 누구일까. 노무현이다. 대선 승리의 기쁨도 잠깐. 재발한 북핵 문제는 참여정부 초기 모든 이슈를 삼켰다. 취임 첫해부터 지지층 이탈이 시작됐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문재인 대통령도 이 상황을 목격했다.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4년이 흘렀다. 문 수석은 이제 대통령이 됐다. 역사는 반복된다. 문 대통령 역시 집권 초기부터 북핵 문제라는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 한반도를 둘러싼 북핵 위기 상황에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가져다놓아도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때 북핵 문제의 전개 과정은 이랬다. 미국이 고농축우라늄(HEU)을 사용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제네바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자, 북한 외무성은 2003년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만든 “플루토늄을 핵억제력 강화를 위한 용도로 변경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 상황도 비슷하다.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의 여진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9월3일 제6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북한 관영통신은 이번 핵실험에 대해 “대륙간탄도로케트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완전 성공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제 사실상 핵보유국이다.

노무현과 문재인. 개인으로서 두 사람의 지향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통령으로 원치 않은 선택에 내몰렸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 문재인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추가 배치를 결정했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정치 현실에선 후일담일 뿐이다.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져야 한다. 실제 노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뒤 “(내 결정으로) 지지자 절반이 돌아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청와대에선 ‘평화를 위한 파병’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런 현실론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 참여”라는 진보 진영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사드 배치 과정을 잘 아는 문재인 정부 안팎의 여러 인사들은 문 대통령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사드 배치 결정의 재검토와 공론화를 요구한다”고 했다. 이후 그는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갈린 진보·보수 진영 사이에서 사드 배치도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절차적 정당성’을 앞세웠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월28일에도 “환경영향평가 전에 사드 추가 배치는 없다”는 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반전이 일어났다. 북한이 두 번째 ICBM을 쏘아올리자 문 대통령은 몇 시간 뒤 “사드 추가 배치를 미국과 논의하라”고 지시한다. 문 대통령은 7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ICBM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것”이 한국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이라고 정의했다. 북한이 바로 그 레드라인을 넘은 것이다. 이런 맥락을 따져볼 때 9월7일 새벽 이뤄진 사드 추가 배치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진행된 북핵 문제를 둘러싼 공방은 앞으로 이어질 ‘거대한 파국’의 초입에 불과했다. 지금 상황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 그러나 문 대통령에게 유리한 부분도 있다. 참여정부 초기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현재 문 대통령의 지지는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선 자리 달라진 임종석, 사드 배치 강행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4년 이라크의 자이툰부대 방문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4년 이라크의 자이툰부대 방문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사드 배치와 관련된 정부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아본 결과, 이번 조처의 불가피성에 이견을 말하는 이를 찾기 힘들었다. 미국이 주요한 안보 이익으로 여기는 사드를 그냥 방치해둘 수만은 없었다는 현실론도 강했다. 현재로서는 미국의 신뢰를 얻은 뒤 북핵 문제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쥘 기회를 찾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도 힘을 얻고 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의 태도는 상징적이다. 9월7일 사드 배치 강행 과정에서 경북 성주 주민들과 경찰의 몸싸움이 격화되자 청와대 일부에서 “진입 작전을 중단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임 실장은 “쉽지 않다”며 부정적 의견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강행 의사를 밝힌 것이다. 13년 전 임종석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는 파병 반대의 주역이었다.

청와대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2003년 청와대는 국방·외교·경제 라인과 정무·시민사회 라인 등이 파병을 둘러싸고 찬반으로 양분됐다. 이에 반해 청와대는 현재 ‘침묵 모드’다. 이번 사태의 주요 당국자 가운데 하나인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전술핵 배치까지 언급하고 있다. 송 장관은 9월4일 국회에서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전술핵 문제를) 대안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이는 국방부의 분위기를 반영한 태도다. 무기 획득 분야에 정통한 국방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미 동맹을 고려할 때 (사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군의 무기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까지 보호할 수 있다면 군도 반길 만한 일이다. (군의) 정치적 판단이나 외교적 판단은 후순위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박근혜 정부 때부터 반복돼온 익숙한 논리다. 한-미 동맹 울타리 안에서 미군의 전략 자산을 이용해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균형을 이루자는 것은 군을 포함한 보수 진영의 오랜 주장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도 조용하다. 국회 국방위원회의 한 여당 의원은 “사드는 사실상 끝난 얘기다. 다만 미사일방어가 고도에 따라 다층적으로 이뤄지는 만큼 사드와 함께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남았다”고 말했다.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사드 배치는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이다.

물론 고요한 표면 아래 균열 조짐도 보인다. 수도권의 한 여당 중진 의원은 “(사드 추가 배치는) 과거 정부가 만들어놓은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사고의 동맥경화다. 북핵 문제가 위중해지자 다시 한-미 동맹이라는 병으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게 됐다”고 날선 비판을 가했다. 다른 초선 의원은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이라며 말을 아끼면서도 그동안 문 대통령이 내세웠던 사드 배치의 절차적 정당성조차 지키지 못한 것에 자괴감을 드러냈다. 원내 정당 가운데 정의당만이 사드 배치 당일에 “사드 배치는 외교·경제적 자해 행위다.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 푸들로 전락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비판은 시민사회에서도 나온다. 참여연대는 성명을 통해 “문재인 정부는 사드 배치 합의와 추진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와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고 국회 동의를 받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하다못해 한밤중에 배치하지 않겠다는 작은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사드 배치는 사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머잖아 성주 인근에 패트리엇(PAC-3)을 배치한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라며 “사드의 요격 고도는 40~150km이기 때문에 (40km 이하로) 낮게 깔려오는 미사일을 막을 수 없다. 군사적으로 보면 사드라는 전략 자산을 방어하기 위해 저고도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패트리엇이다”라고 말했다. 패트리엇을 실전 배치해 실효를 거두기 위한 1개 포대의 비용은 최대 1조원에 달한다.

어둠 지나 대화의 문 열릴까

우려되는 점은 이외에도 많다. 먼저 중국의 경제 보복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북핵 문제로 곤경에 처한 문재인 정부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기 카드를 언뜻 내비쳤다. 이번 사태를 적극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계산이다. 사드에 대해선 중국과 러시아가 강한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만 바라보다 국내외적으로 고립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사드 배치는 마무리됐다. 참여정부가 북핵으로 촉발된 긴장 속에 이라크 추가 파병이라는 험로를 지나 만난 것은 6자회담이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한국은 남북과 미·중·러·일 주변 4개국이 모여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기 위한 6자회담 구성을 주도했다. 사드 추가 배치라는 짙은 어둠 뒤 문재인 정부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긴 어둠의 터널 너머에 존재하는 한 줄기 불빛이 될 대화의 문은 열릴 수 있을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