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자 선정 둘러싼 형평성 논란 지속… 자의적 해석에 민주화 가치 훼손 우려도

“내가 부끄럽다. 지금 심정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푼돈을 받기 위해 신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누구누구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났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왜 (내 건은) 허구한 날 ‘심의중’이라고 하며 발표를 미루는지 모르겠다.”
“독재정권의 총체적 학정에 결연히 저항한 열사들 가운데 다수가 명예회복에서 번번이 누락되었을 뿐 아니라, 정황증거를 충분히 제출했음에도 마치 수매등급 매기듯이 쥐락펴락 단칼에 선별하는 모습으로 보이니 참으로 착잡하다…. 심사과정에서 열사들의 정당성을 비교당하거나 훼손당하는 지금의 현실을 목도하노라면, (이미 명예회복 인정을 받은 열사 후원회 관계자로서) 너무나 염치가 없다…. 부디 열사들을 두번 죽이지 말고, 선별없는 명예회복을 실시하라.”
누구도 만족시키니 못하는 보상심의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의 인터넷 사이트(www.minjoo.go.kr) 게시판에 떠 있는 글들 가운데 일부다. 게시판은 지금 보상심의위에 대한 불만으로 넘쳐나고 있다. 불만의 내용도 제각각이다. 자신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에 허탈해하거나, 결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에 분노하는가 하면, 심의기준과 심의방식에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한다. 보상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게시판의 글들은 보상심의위가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현실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더욱이 지향점이 없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불만들은 앞으로도 보상심의위가 고민을 쉽게 풀어나가기 어려울 것임을 예고한다. 문제해결 의지나 능력에 앞서, 무엇을 어떻게 고쳐나갈지를 판단하는 일도 결코 간단치 않다는 얘기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더불어 김대중 정부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양대축인 보상심의위가 겪고 있는 총체적 난맥상이다.
1999년 12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이하 민주화보상법)이 통과된 뒤 2000년 8월 보상심의위가 문을 열고 업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발등의 불은 ‘인력부족’ 하나로 보였다. 애초 심의신청 건수가 1천건에 못 미칠 것으로 예상했으나, 1차 접수에서만 무려 8440건의 심의신청이 쇄도했다. 지난해 12월에 마감한 2차 신청까지 더하면 모두 1만782건이 접수됐다. 그나마 2차 접수는 수천건이 접수되리라던 애초 예상보다 신청자가 크게 줄어 보상심의위를 ‘안도’하게 했다.
보상심의위의 심의과정은 말 그대로 ‘강행군’이다. 비상임 심의위원 9명은 2주일에 한번씩 회의를 열어 한번에 200∼300건씩 안건을 처리하고 있다. 한 차례 회의 때마다 1천쪽이 넘는 서류를 검토해야 한다. 심의위원 회의 회부에 앞서 접수된 사안들을 사전검토하는 보상지원단과 심사분과위 관계자들도 서류더미에 파묻혀 살고 있다. 이같은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은 2400여명에 그친다. 심의의 내실성에 앞서 심의진행 자체가 게걸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의의 병목현상은 어차피 시간과의 싸움일 뿐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심의를 하고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보류상태에 있는 사안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안은 쉽게 ‘기각’으로 결정하기도 어려운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심의중’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라는 얘기다. 보상심의위는 언젠가 ‘인정’도 ‘기각’도 할 수 없는 서류더미에 완전히 포위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보상심의위는 처음부터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여전히 ‘심의중’… 신청자 갈등·반목도

민주화보상법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망·행방불명·상이·질병 및 후유증을 앓거나 유죄판결·해직 또는 학사징계를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아주 구체적인 규정 같지만, 동시에 아주 제한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1차 접수 때는 구금·강제징집·수배·취업거부 피해자들이 신청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정작 이 법의 본질적인 한계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제한한 것보다는 ‘민주화운동’ 자체에 대한 정의의 경직성에 있다는 게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지적이다.
민주화보상법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해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이다. 자구대로 해석하면 국가보안법 관련자는 민주화운동에서 배제된다. 국보법 관련 사안이 전체 접수 건수의 10%에 이르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손종필 사무국장은 “국보법은 작은 사건만 면피용으로 다뤄질 뿐 대부분 심의가 보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84년 청송교도소 복역중 숨진 박영두(당시 29살)씨의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를 놓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보상심의위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의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6월 “박씨가 당시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교도관들의 집단 고문으로 숨졌다”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보상심의위쪽에 직권으로 보상심의를 요청했지만, 보상심의위는 여지껏 판정을 미루고 있다. 보상심의위쪽은 박씨가 개인적 억울함에 항거하다 숨진 것이기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은 보상심의위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경직된’ 규정해석이 아니라 ‘자의적’이거나 ‘정치적’인 규정해석이라고 꼬집는다. “같은 분신자살이어도 김영삼 정권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는 결정이 보류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95년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아들 장현구(당시 25살)씨가 민주화 관련 사망자로 인정된 장남수(60) 유가협 수도권지회장은 “보상심의위의 인정을 받지 못한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소외감 때문에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권 이후 사건에 대한 보상심의위의 심사기준이 유난히 보수적이라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린다. 그 시절 사건에 대한 심사가 곧바로 김대중 정권 사건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부담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유가협 손종필 사무국장은 “그나마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자질이 된다는 일부 심의위원들조차 김대중 정권의 성격과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인물들”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정신계승국민연대(이하 계승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이러다가는 9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제외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물질적 보상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반목은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새로운 고민이다. 보상심의위 사이트 게시판에는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 보상과 비교해 “5·18은 적자고 다른 민주화운동은 서자냐”라는 볼멘 소리도 등장한다. “전교조 복직교사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해직기간 동안 못 받은 봉급까지 보상받는다는데, 감옥 갔다온 난 얼마나 더 받아야 하느냐”는 불만도 비친다.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속물화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계승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그런 경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민주화운동을 배타적 기준으로 바라보는 한계에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허술한 준비로 진상규명 없는 보상만
이렇듯 보상심의위는 지금 시민사회에 하나의 딜레마다. 보상심의위가 인정하지 않는 사안들 때문에 인정한 사안들까지 한꺼번에 부인할 수도 없고, 인정한 사안들만 가지고 잔치를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가협 손종필 사무국장은 “성과는 성과대로 인정하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다함께 연대해 보상심의위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개선하도록 싸워가야 할 것”이라며 “지금 국회에 상정돼 있는 민주화보상법 개정안 통과를 관철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화보상법을 이끌어낸 시민사회의 준비 부족을 꼬집는 목소리도 들린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회적 정의와 철학도 제대로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도 아닌 명예회복과 보상으로 건너뛴 것이 너무 성급했다.” 한 시민운동가는 “보상심의위의 현재 모습은 정권의 한계이기 이전에 우리 시민사회 역량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며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과거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부터 하지 않으면 정권에 의해 민주화의 가치가 재단되는 일은 반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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