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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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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와 성주를 잇는 기지 반대 투쟁사

1988년 매향리 주민대책위 결성에서 시작한 기지 반대 운동 30년

“SOFA 개정” “우리 땅 돌려달라”는 구호는 2017년 성주로 이어져
등록 2017-06-15 13:42 수정 2020-05-03 04:28
2006년 5월 경기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부지를 확보하려는 한국 군인과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06년 5월 경기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부지를 확보하려는 한국 군인과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연미복을 차려입은 듯 말쑥한 검은머리물떼새가 사뿐하게 내려앉는다. 검은머리물떼새가 매향리 앞 농섬을 처음 찾은 것은 2016년 봄이다. 지금껏 새들의 주된 거처는 전북 군산 앞바다 유부도였다. 천연기념물인 귀한 몸은 12년을 산다. 매향리의 17년에 걸친 미군 사격장 반대운동이 결실을 맺은 게 2005년이니, 검은머리물떼새도 한 세대를 기다려 그들의 살 곳을 새로 마련한 셈이다.

날아온 검은머리물떼새

한국 근현대사에서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거슬러 오르지만, 기지 반대운동의 역사는 채 30년이 되지 않는다. 그 출발은 검은머리물떼새가 새 둥지를 꾸린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다. 매향리에 미 공군 쿠니 사격장이 운용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다. 사격장으로 소음 등 여러 피해를 입은 주민은 모두 4천여 명. 오폭 및 불발탄으로 사망한 수만 13명이다.

30여 년 고통의 세월을 견디다 ‘매향리 미 공군 국제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가 결성된 게 1988년 6월이었다. 이듬해에는 주민 700여 명이 목숨을 걸고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에 폭격장을 점거했다. 34년 만에 주민 스스로 폭발음을 멈춘 것이다. 10년 뒤 그들은 소송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민대표 14명이 먼저 소송에 참가했다. 6년을 끈 소송에서 대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었다. 2005년 뒤이은 소송에서 주민 1889명이 승소의 기쁨을 누렸다. 2005년 9월 주한미군은 결국 매향리 쿠니 사격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쿠니 사격장은 농섬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고, 검은머리물떼새가 날아왔다. 한국 현대사에서 평화운동이 일군 사실상 첫 번째 결실이었다. 매향리는 싸움 자체만으로 미군기지 문제를 안고 있는 다른 지역에 자극제가 됐다. 군산 미 공군 비행장 소음소송, 강원도 춘천 헬기장 소음소송, 경기도 평택 미 공군 비행장·육군 헬기장 소음소송 등이 이어졌다. 미군기지뿐 아니라 한국군 기지를 대상으로 한 소송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방부는 결국 ‘군용비행장 등 소음방지 및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 나서야 했다(현재 ‘군용비행장 소음 법안’은 국회 발의된 상태다).

1992년 10월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 의한 윤금이씨 살해사건은 미군기지 운동사의 또 하나의 전기가 됐다. 묘사하기도 끔찍할 정도로 잔혹한 사건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한국인들은 분노했다. 이후 이태원 살인사건(1997년),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2000년), 효순이·미선이 사건(2002년) 등이 이어지며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비판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미군 관련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시민들이 목격한 것은 한국 정부의 속수무책이었다. 그 무능의 끝에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있었다. 평화운동의 시작이 매향리라면, SOFA의 불평등 문제를 둘러싼 싸움의 출발점은 군산이었다. 문정현 신부가 앞장선 군산시민모임의 활동은 1997년 한국 민간항공기가 군산 미군기지 내 활주로를 사용하려면 미군에 사용료를 내는 데 비해, 미군은 관련 임대료를 전혀 내지 않는다는 상식 밖의 불평등을 인식하면서 시작됐다. 군산의 SOFA 개정 운동은 1999년 10월 전국 지역농민회, 평화운동단체, 인권단체 등이 참가하는 ‘불평등한 SOFA 개정 국민행동’의 모태가 됐다. 이후 SOFA 개정은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통해 한 번 더 변곡점을 맞는다. 두 여중생의 처참한 죽음 앞에 한국 사회의 여론은 들끓었다.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선 시민 10만 명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들은 광화문 미국대사관을 분노의 촛불로 포위하기도 했다. SOFA 조항은 이후 많이 개선됐지만, 불평등 조항은 여전하다.

매향리에서 시작한 싸움

SOFA 개정 운동과 함께 대중적 호응을 얻은 것은 “우리 땅을 돌려달라”는 미군기지 반환운동이었다. 대구에선 1993년부터 헬기장과 비행장 반환 문제로 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부산에서도 1995년 ‘부산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반(反)기지운동이 본격 시작됐다. 인천 부평에선 1996년 ‘우리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및 시민공원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가 구성됐다. 1997년에는 미군기지가 있는 전국 주요 도시의 지역단체들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녹색연합,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이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전국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미군기지 반환운동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다소 이념적인 논쟁에서 한 걸음 비켜서 ‘지역주민 생존권’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역주민들의 호응도 컸다.

2002년 3월 한-미 양국은 한강 이북 미군기지를 반환하고 이를 한강 이남으로 이전·재편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미군기지가 이전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의 주민들이 나섰다. 자연스럽게 지역 단위의 미군기지 이전반대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경기도 이천에선 미군기지 이전 소식에 이천 주민들의 반대대책위가 즉시 꾸려졌다. 이천시까지 나서면서 2001년 이전 계획이 철회되도록 만들었다. 2002년 서울 용산기지 이전 후보지로 물망에 올랐던 경기도 수원, 성남, 서울 송파구도 마찬가지였다. 송파구는 미군기지 반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군 특전사령부까지 나갈 것을 요구했다. 매향리 폭격장의 대체지로 거론되던 강원도 태백에도 기존 한국군 사격장 폐쇄운동까지 등장하면서 계획이 수정됐다.

물론 ‘이기는’ 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 제2사단 등 주한미군을 평택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2004년 8월 기지 부지로 선정된 대추리는 1990년대 매향리처럼 새로운 기지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당시 대추리로 각종 평화운동단체, 인권단체 등이 집결하면서 싸움은 장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2006년 5월 정부는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작전명 아래 군과 경찰 1만여 명을 투입해 시위대 1천여 명을 해산시켰다. 미군기지 이전은 급물살을 탔다. 2007년 부지 결정 뒤 제주 강정마을에서 벌어진 해군기지 반대운동도 2000년대 기지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기지는 명목상 대한민국 해군의 것이지만, 미군이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이어져온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기지 반대의 역사는 이제 경북 성주에서 쓰이고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때문이다. 국방부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반입 보고 누락’ 사건 이후 정부는 사드 배치로 인한 환경영향평가를 본격 시작할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는 민감한 전략 현안인 사드 문제를 국내적인 절차적 정당성을 따져간다는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주민들이 원하는 사드 배치 철회가 이뤄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성주에서 계속된다

최근 매향리에는 지금 “미군 전투기 폭격 소음이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전투비행장 건설이냐”는 펼침막이 내걸렸다. 지난 2월16일 국방부의 발표에 따라 경기도 수원 군 공항 예비 이전 후보지가 된 것이다. 항공기가 뿜어낼 굉음의 공포에 매향리는 다시 긴 싸움을 준비하며 끓어오르고 있다. 기지 반대 운동사는 다시 매향리에서 쓰일 것인가. 검은머리물떼새는 농섬의 둥지를 지킬 수 있을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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