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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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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레토릭을 넘어라

문재인 정부에 제안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5가지 경제정책
등록 2017-05-17 19:08 수정 2020-05-02 04:28

경제개혁을 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할 일은 많은데, 파워는 별로 없다.’ 흔히들 문재인 신임 대통령이 직면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정말 할 일은 많다. 30년이 지난 ‘87년 체제’를 ‘17년 체제’로 새롭게 탈바꿈해야 하기 때문이다. 파워는 별로 없어 보인다. 문 대통령이 기댈 곳은 120석의 더불어민주당 국회 의석과 41.1%의 국민 지지율뿐이다.
일은 많은데 힘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전인 1월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기조강연을 하기 전에 안경을 추어올리고 있다. 이날 그는 “재벌 중에서도 4대 재벌의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전인 1월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기조강연을 하기 전에 안경을 추어올리고 있다. 이날 그는 “재벌 중에서도 4대 재벌의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경제개혁 정책에 대한 제언을 말하는 자리에 뜬금없는 ‘파워 타령’인가라고 반문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혁에서 방점은 ‘경제’가 아니라 ‘개혁’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독자들도 왜 파워 타령이 나오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파워 타령은 개혁의 주관적, 객관적 여건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객관적 여건은 정교한 실천 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하다. 개혁 정책의 중요도와 시급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기고 추진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때 재벌이 금융계열사를 이용해 전체 그룹을 지배하는 것을 막겠다고 호기롭게 시작했던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은 삼성의 반대에 맥없이 꺾였다. 결국 오직 삼성만을 위한 명시적인 예외규정을 두고 탈법을 합법화해주고 말았다. 이 경험은 객관적 여건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더 우려되는 점은 주관적 여건이다. 이것은 사실상의 ‘패배주의’다.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태도다. 물론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패배를 선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겠다’거나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하겠다’는 매우 중립적인 태도로 출발해서 결국에는 ‘이것은 안 하겠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까’로 끝맺을 가능성이 있다. ‘재벌이 이런 규제를 수용하느니 국회의원 300명을 매수하는 게 더 손쉬울 텐데 이런 개혁 법안이 통과되겠느냐’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물론 할 수 없는 것은 못하는 것이다. 금산법 예에서도 보듯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제대로 준비도 안 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재벌에 합법성의 축복만 주는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2008년 삼성 특검이 겉으로는 요란을 떨었으나 결국 이건희 회장의 차명 주식을 떳떳하게 실명 전환하도록 해준 것밖에 없다는 씁쓸한 경험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패배주의는 개혁의 최대 적이다. 패배주의는 자신이 개혁해야 할 정책적 범위를 역설적으로 개혁의 대상이 정하도록 방치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또 개혁을 갈망하고 촉구하는 세력을 ‘현실도 모르고 교과서 얘기만 하는 한가한 사람들’로 치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개혁의 대상이 조그만 선물을 가지고 와서 ‘엿 바꿔 먹자’고 할 때 쉽게 오케이를 외칠 수 있는 심리적 명분을 준다는 점에서 문제다.

광장은 주판알 튕기지 않았다

이럴 때 문재인 대통령은 생각해야 한다. 국민이 도대체 왜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주었는지를. 주식회사제도를 일반적으로 바로잡는 상법을 개정하겠다고 해서 뽑아주었는가. 상법을 개정하겠다는 후보는 많았고 진짜로 해낼 것 같은 후보도 제법 있었다. 그게 이유가 아니다. 바로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해서 뽑아준 것이 아닌가. 재벌 개혁하고 서민 살리겠다고 해서 뽑아준 것 아닌가. 그런데 처음부터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고 한다면,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문 대통령의 오늘을 있게 한 촛불 시위를 되새겨보자. 그때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것만 해보자’고 촛불을 들었는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시민들이 움직였는가. 시민들이 움직인 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건, 주판알을 튕기고 광장에 나온 게 아니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기 위해 ‘해야 할 경제개혁 정책을 묵묵히 추진’하면 된다.

개혁 정책을 추진할 마음가짐을 바로 가졌다면, 다음에 생각해야 할 부분은 전략이다. 국회를 통해 할 것인가, 행정부를 동원해서 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국회의원을 다시 뽑고 새롭게 추진할 것인가 등이다. 예를 들어 삼성을 개혁하기 위해 보험업법을 개정할 수도 있고(그러면 삼성생명이 가지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의 상당 부분을 팔아야 한다), 국민연금의 주주 권한을 활용해 이재용 부회장이 최순실 모녀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에 끼친 손해를 물어내라고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라고 할 수도 있고(그러면 돈도 돈이지만 삼성전자의 경영은 상당 부분 정상화될 것이다), 조기 개헌과 조기 총선을 통해 국회를 다시 구성한 뒤 바뀐 국회에서 개혁 입법을 통과시킬 수도 있다. 이런 것은 객관적 여건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그렇다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경제 부문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할 일은 많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들만 추려보자.

첫째,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부조직 개편이다. 이는 첫 장관을 임명하기 전에 완료해야 하는 것이기에 시급할 뿐만 아니라, 관료들을 ‘정위치에 배치’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관료를 활용하지 않은 채 개혁을 추진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경제 부처 조직 개편의 핵심은 ‘금융위원회 해체’와 ‘기획재정부로부터 예산·기획 기능 분리’로 요약할 수 있다. 금융위 해체는 ‘관치금융 청산과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금융개혁의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다. 구체적으로 금융정책을 담당하는 금융정책국은 기재부로 통합하고, 금융서비스국처럼 금융감독을 담당하는 조직은 공적 민간기구인 금융감독원으로 이관한다. 그리고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를 위해 금융감독원을 쌍봉형 혹은 소봉형 형태로 분할하면 된다. 일부 금융정책 관련 조직의 통합으로 비대해진 기재부는, 예산·기획 기능을 분리시켜 균형을 되찾고 국회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상설화를 추진하면 된다.

경제개혁과 경제성장의 연계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왼쪽 네 번째)이 ‘2014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재계 인사들과 건배하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대통령이 투자 유치한다고 재벌 총수를 불러 밥 먹는 것은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왼쪽 네 번째)이 ‘2014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재계 인사들과 건배하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대통령이 투자 유치한다고 재벌 총수를 불러 밥 먹는 것은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런 정비가 모두 끝나면 기획과 예산 기능에 대한 국민의 감시도 강화되고, 전근대적인 관치금융도 축소할 수 있어 조금 더 ‘나라다운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반대로 이를 못하고 현재의 경제 부처에 바로 초대 장관을 임명하면 그때부터 정부조직 개편은 사실상 물 건너가고, 개편 대상인 금융위는 열심히 자기 살 궁리를 하면서 이런저런 관치와 전시 행정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둘째, 삼성 개혁이다. 삼성의 총수는 국정 농단에 간여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삼성은 엄청난 기업 평판의 디스카운트에 직면해 있다. 삼성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이 ‘지배구조 위험’이라는 지적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특히 삼성은 국민경제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기업집단이고 재벌 구조의 핵심인 만큼 삼성 개혁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삼성 개혁은 목표를 바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총수 일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좋은 경영자가 삼성을 경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특히 주주로서 국민연금의 역할을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악성 가계부채를 정리해야 한다. 민주당은 지난해 총선 때부터 저신용·저소득·다중채무자의 부채를 탕감하고,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소각하겠다며 국민들에게 표를 요구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공약의 취지는 그대로 유지됐다. 따라서 이제는 공약을 정책으로 구현할 때다. 예를 들어 정부와 돈을 많이 벌고 있는 은행이 돈 내서 금융권의 악성 개인채무를 매입한 후 추심 없이 그대로 보유하다가 소멸시효가 지나면 태워버리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민행복기금과의 차이는 ‘추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행복기금처럼 공적 기구가 추심을 하면 결국 은행의 추심대리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추심이 필요한 개인채무는 개인파산이나 개인회생 제도를 채무자 우호적으로 개혁하여 새로 출범한 도산전문법원인 서울회생법원에서 다루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

넷째, 경제민주화 정책과 경제성장 정책을 연계해야 한다. 경제개혁 정책이 삐딱선을 타는 첫 번째 징후가 ‘경제민주화는 이쯤하고 이제부터 경제성장에 매진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러고는 투자 유치한다고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하고 재벌 총수들 불러 청와대에서 밥 먹는 것이다. 우리가 수없이 봐온 레토릭이다. 이런 발상의 근저에는 경제민주화는 형평을 위한 것일 뿐, 경제성장과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기업의 발목을 잡아서 해를 끼친다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외치는 ‘사람 주도의 성장’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면 각종 경제민주화 정책이 사실은 ‘올바른 경제성장 정책’임을 자각해야 한다. 경제민주화 정책을 통해 사람들이 보유한 인적 자본의 축적을 장려하고, 대기업의 갑질로부터 중소 벤처기업의 창의성을 보호하는 것이 곧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세 마리 토끼를 잡는 조세정책

마지막으로 생산을 장려하고 세대 간 왜곡을 최소화하는 형태로 조세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증세를 최소화하고 부득이 증세할 경우에는 최상위 소득자에 대한 과세를 강화한 뒤 필요하다면 법인세율을 인상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소득세와 법인세는 모두 생산활동에 참가한 경제주체를 과세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별로 생산친화적이지 않다. 또 주로 젊은 세대가 근로소득자라는 점에서 세대 간 과세 부담의 형평성 측면에도 부합하기 어렵다. 그 대안으로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고 그 세수 중 일부는 재정사업에 활용하고 나머지 일부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깎아주는 데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경제활성화, 재원 조달, 세대 간 조세 부담의 형평성 제고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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