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녀는 이 장소를 알고 있군요.”
용의자가 찍힌 폐회로텔레비전을 보며 형사가 말한다.
“미안한데요. 그/녀라니, 이 단어 뜻이 뭐죠?”
옆에 있던 다른 나라에서 온 형사가 묻는다.
스웨덴과 덴마크가 함께 만든 범죄 드라마 (Bron/Broen)에 나오는 장면. 주인공인 스웨덴 형사의 말에, 덴마크에서 온 동료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여기서 문제의 단어는 ‘헨’(hen)으로, 남성을 가리키는 ‘한’(han)과 여성을 가리키는 ‘혼’(hon)을 아우르는 대명사다. 이분법적 남녀-여남 구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긴 용어로, 2015년 스웨덴의 공식 사전에 포함됐다. ‘여성’ 자체를 비가시화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의견이 엇갈렸지만, 성평등을 추구하려는 스웨덴 사회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비슷한 맥락에서, 이 단어를 스웨덴보다 훨씬 먼저 사용해온 곳이 있다. 바로 이웃 나라인 핀란드. 스웨덴과 달리 핀란드에는 공식적으로 남녀-여남을 가리키는 대명사 자체가 없다. 그 대신 ‘한’(hn)이란 단어를 써왔는데, 이 용어가 스웨덴에서 채택된 ‘헨’(hen)에도 영향을 줬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성평등과 관련해 특별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핀란드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여성주의 정당 ‘페미니스티넨 푸올루에’(Feministinen puolue)가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평등, 반차별, 인간 안보핀란드 여성주의 정당은 2016년 6월15일 출범했다. 그리고 오는 4월9일에 있을 선거에 앞서 공식 정당으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핀란드 법에 따르면, 정당으로 등록하려면 선거권을 가진 5천 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정당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여성주의 정당은 지난 몇 개월간 서명운동을 해왔고, 2016년 12월13일 법무부에 공식으로 정당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핀란드 공영방송 (YLE)와 법무부에 따르면, 여성주의 정당은 2017년 1월10일자로 공식 등록됐고, 해적당·동물권당 등 새로 등록한 정당들을 포함해 총 15개의 정당 가운데 하나로 지방선거에 참여할 전망이다.
당 누리집(www.feministinenpuolue.fi)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여성주의 정치’란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성평등과 인권, 모든 형태의 억압을 철폐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누구나 성별, 성별 없음, 인종, 성적 지향, 계급, 나이, 국적 등과 상관없이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원칙 아래 여성주의 정당은 세 가지 주요 가치를 세우고 이를 추구하고 있다. 첫째는 성평등, 둘째는 반(反)차별, 셋째는 인간 안보다.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이 균등한 고용 기회와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과 양육에 대한 책임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고르게 분배돼야 한다고 말한다.
반차별 부분에서는 인종주의와 차별에 바탕을 둔 문화가 구조적 불평등 형태로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제도적으로 좁게 정의된 ‘가족’ 개념을 넓혀,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 가운데 하나다.
인간 안보의 경우, 모든 이들이 삶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군사주의와 국경이 아닌, 각 개인의 주권에 바탕을 둔 안보정책 수립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난민, 기후변화,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을 언급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전세계적 현상이자 핀란드인에게도 가장 큰 위협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실제 핀란드 공영방송의 2014년 3월5일치 보도에 따르면, 핀란드는 유럽연합에서 ‘두 번째’로 여성이 살기에 위협적인 나라다. 절반에 가까운 47%의 여성이 15살 이후 물리적 또는 성적 폭력을 당했다고 했는데, 유럽연합의 평균 비율은 33%였다. 여기서 인용된 자료는 유럽연합 내 여성 4만2천 명을 면접조사한 것으로, 이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관련해 유럽에서 진행된 가장 광범위한 연구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의석 차지할 수 있을까핀란드 최대 일간지 의 2016년 10월 말 보도에 따르면, 1990년 ‘여성당’(Naisten puolue)이란 이름으로 등록한 정당이 있었다. 그러나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사라졌다고 한다. 핀란드에선 두 차례 계속되는 총선에서 한 석도 확보하지 못한 정당은 다시 등록해야 한다. 여성당은 1991년과 1995년에 치른 총선에서 의회 진출에 실패했고 그 뒤 재등록을 시도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은 듯하다.
핀란드에서 의회 선거는 비례대표제로 치러진다. 15개 선거구에서 각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200개의 의석이 나뉜다. 선거구별로 배당되는 의석수가 다른데, 인구에 따라 많게는 30명 넘는 의원을 뽑는다(2015년 기준). 앞으로 두 번의 총선이 2019년과 2023년에 있으므로, 2017년 지방선거는 여성주의 정당의 의회 진출을 가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역시 비례대표제로 치르는 지방선거의 경우, 300여 개 지역에 인구를 원칙으로 적게는 13석, 많게는 79석이 배당된다(2017년 기준).
참고로 현재 핀란드의 정치 지형은 보수 성향의 중앙당을 중심으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운다고 여겨지는 핀란드인당, 그리고 국민연합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연립정부 형태다. 대통령은 국민연합당 출신이지만, 핀란드의 제도상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제1당인 중앙당 대표가 총리로서 주도한다. 여기에 사회민주당, 녹색당, 좌파당, 스웨덴인민당, 기독민주당이 야당으로 참여하고 있다.
여성 의원의 비율은 42% 정도다. 의회에 진출한 여덟 개 정당 가운데 좌파당, 스웨덴인민당, 기독민주당은 여성이 대표로 있다. 특히 좌파당은 20대 청년 리 안데르손이 당을 이끌어 주목받고 있다.
지지 기반 넓혀가는 여성주의 정당핀란드 공영방송의 2016년 12월30일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지지율 1위는 사회민주당으로 21.2%를 기록했다. 그다음은 중앙당(20.3%), 국민연합당(17.4%), 녹색당(13.3%), 핀란드인당(9.4%), 좌파당(7.6%) 순이다. 여성주의당이 포함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타 정당들은 총 2.3%의 지지율을 보였다.
핀란드 여성주의 정당은 2005년 구드룬 휘만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스웨덴 여성주의 정당인 F!(Feministiskt initiativ)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스웨덴 여성주의당은 중앙의회에는 진출하지 못한 상태지만, 2010년과 2014년 각각 지방의회와 유럽의회에서 의석을 얻었다. 2015년 노르웨이에 같은 이름의 정당이 생겼고, 2016년 핀란드가 그 뒤를 이은 셈이다.
참고로, 구드룬 휘만은 사회복지사 출신으로 과거 10년 동안 좌파당을 이끌었고, 현재는 여성주의당 대표다. 스웨덴 중앙의회에 진출하려면 4%의 득표율이 필요하다. 여성주의당은 2006년 0.68%를 시작으로, 2010년 0.4%, 2014년에는 3.12%를 기록했다. 스웨덴 공영 라디오의 보도에 따르면, 2016년 12월 기준 당의 지지율은 2%다. 당원 수는 2013년 1500명에서 2014년 총선을 전후로 2만2천 명까지 급속히 늘었다.
배타적 민족주의 핀란드인당의 대안여성주의 정당들의 출현은 특히 유럽에서 극우 성향 정당들이 (주로 이민자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지지율을 높여가는 상황이라서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실제 스웨덴 여성주의당은 2014년 총선에서 스스로를 극우 정당인 스웨덴민주당의 대안으로 규정했다. 핀란드도 인종주의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핀란드인당이 2011년과 2015년 총선을 통해 각각 제3당, 제2당의 위치를 차지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티모 소이니 당대표는 현재 핀란드 외무부 장관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올해 지방선거는 핀란드 독립 100주년에 치러지기 때문에 그 의미가 특별하다(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짧게 얘기하면, 핀란드는 수백 년 동안 스웨덴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 뒤 러시아로 편입됐다가 1917년 독립했다). 여성주의 정당 ‘페미니스티넨 푸올루에’는 이번 선거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까? 핀란드 역사에 어떤 기록이 남겨질지 기대된다.
*여성주의 저널 에 게재한 글입니다.박강성주 여성주의 저널 객원 필진
핀란드에서 여성주의 정당 ‘페미니스티넨 푸올루에’ 창당을 공동으로 주도하고, 현재 대표로 당을 이끄는 카튜 아로(Katju Aro). 예술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해온 아로 대표는 1892년 세워진 여성단체 ‘나이사시알리토 우니오니’(Naisasialiitto Unioni)의 회장이기도 하다. 지난해 6월15일 출범한 여성주의 정당 소식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전자우편 인터뷰를 요청했다. 카슈 아로 대표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인터뷰는 1월2일 전자우편으로 진행했다.
핀란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성평등 관련 사안들에서 굉장한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제가 많이 남아 있어요.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한 폭력은 핀란드 (그리고 전세계) 여성들에게 가장 큰 위협입니다. 여성의 임금도 남성의 82% 정도고요. 여성은 아직도 가족관계에서 주된 돌봄노동자예요. 이 사회에는 수세기 동안 차별을 받아온 집단이 많이 있습니다. 성소수자, 장애인, 소수인종이 그렇지요. 우리에게 여성주의는 평등, 자유 그리고 모두가 차별받지 않음에 관한 것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것이 이뤄진 나라는 없습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구체적인 정책을 발표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핵심 정책을 미리 알려줄 수 있나요.
우리의 정책 기조를 이루는 주제는 반차별, (모두가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 웰빙(well-being), 인권보호 등입니다. 이 주제들은 경제정책에서 사회복지,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과 싸우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 방안까지 아우르고 있어요.
삶의 모든 영역에는 각각 다른 형태의 권력투쟁이 있었습니다. 여성주의 시각의 분석은 해결되지 못한 아주 오래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흔히 과소평가되는 돌봄경제에 대한 공공투자가 그래요. 이는 돌봄 분야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돌봄노동자들의 웰빙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공공투자는 사회에 더 많은 세금 수입을 가져오고, 결국 돌봄을 받는 이들에게도 웰빙을 제공하게 되지요.
선거가 3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좀 이르기는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나요.
우리의 가능성에 대해 꽤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겨우 6개월 전에 정당이 만들어졌고, 지금 등록 절차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죠. (인터뷰는 1월10일 정당 등록이 정식 완료되기 전에 진행됐다.) 선거 전까지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이 2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거든요. 만약 헬싱키(핀란드 수도) 지역에서 의석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5천 표 정도를 획득한다면 우리는 승리라고 말할 수 있어요.
당이 스웨덴 여성주의 정당 ‘F!’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몇 년 전 스웨덴 여성주의당이 선거운동을 굉장히 성공적으로 했는데, 그때 큰 영감을 받았어요. 우리 당의 출발점이 된 거지요. 그래서 F!와 정보를 주고받았고, 핀란드에서도 여성주의당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유럽에 있는 다른 여성주의 단체들도 더 많은 여성주의 정당을 만들어내기 위해 앞으로 함께할 거랍니다.
한국에서 이 글을 읽게 될 분들, 특히 여성주의자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고뇌하는 것을 멈추고, 조직하는 것을 시작하세요.” 이 말은 몇 년 전 스웨덴에서 여성주의 토론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갔다가 본 벽보 문구입니다. 정말 깊이 와닿았어요. 세상은 모두에게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어야 해요.
박강성주 여성주의 저널 객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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