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사찰의 추억’이 부활하고 있다. 1981년 이영섭 당시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사법부’를 한자로 적으면서 ‘사법부(部)’라고 썼다. 박정희 정권 때 대법원장에 취임해 전두환 초기 정권에서 퇴임한 그는 사법부가 삼권(입법·사법·행정)분립의 한 축인 ‘부’(府)가 아니라 정부의 한 부처에 불과했다는 뜻으로 ‘부’(部)라 적고, 자조했다.
헌법 질서 파괴하는 정부그 시절,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권력은 무소불위 국가 정보기관을 앞세워 사법부 법관들의 뒤를 캤다. 1984년 9월, 강금실 당시 서울남부지원 판사(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는 시국 관련 시위에 나선 대학생에게 ‘즉결심판 형 면제’를 선고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강 판사를 내사했다. 국가정보원(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입수한 당시 안기부 보고서를 보면, 안기부는 강 판사의 아버지 재산을 비롯해 친정·시댁 가족관계, 재학 시절 시위 전력, 남편의 ‘무림 사건 복역 사실’ 등을 현미경으로 보듯 사찰했다.
1983년에는 이일규 대법원 판사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유죄 무효 판결을 내렸다. 안기부는 ‘간첩 송지섭 사건 상고심 선고 공판 및 대책 보고’라는 문서에서 “안보 사건에 대한 태도가 선명하지 못한 이일규 판사에 대하여는 배후와 동향을 내사, 인사에 반영”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다른 대법원 판사 전상석, 이성렬, 이회창 등의 인물조사서가 이 보고서에 첨부됐다.( 참조, 한홍구, 2016)
당시 판사들을 사찰하고, 은밀히 얻은 정보로 사법부 제압에 앞장선 게 국정원의 전신 안기부였다. 그런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사법부를 사찰한 정황이 드러났다. 더 놀라운 것은 이번엔 상대가 판사가 아니라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지난 12월15일 조한규 전 사장이 국정원의 양승태 대법원장 사찰 의혹 문건을 공개하면서 드러났다. 조 전 사장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국조특위) 증인으로 출석해 “(국정원이) 양승태 대법원장의 일상생활을 사찰한 문건이 있다”며 해당 문건을 국조특위에 제출했다.
조 전 사장은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2014년 ‘정윤회 문건 파동’ 특종 기사를 낸 의 당시 사장을 지냈다. 그는 “정치부 기자 출신이기 때문에 (정윤회) 문건 파동이 났을 때 (사장이었지만) 저도 많은 내용을 취재했었다”고 밝혔다. 2014년 1월6일 작성된 문건에는 양 대법원장의 개인 비위를 겨냥한 듯한 내용이 적시됐다.
“대법원은 최근 문화일보가 ‘등산 마니아인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 후 매주 금요일 오후 일과시간 중 등산을 떠난다’는 비판 보도를 준비하자, 양 대법원장이 직원들과 소통 차원에서 금요일 오후 등산을 즐기고 있지만 대개 일과 종료 후 출발하고 있다고 해명하면서 지방으로 산행을 갈 경우 17:00경 출발한 적이 있어도 극히 드문 경우라고 강조. 내일신문이 예전 유사 보도를 추진하다가 기삿거리가 아니라며 중단한 전례를 볼 때 이번에도 걱정하지 않는다면서도 당혹감 역력….”
김영한 업무일지에도 드러나는 사찰 의혹또 다른 문건에는 당시 춘천지법원장인 최성준 부장판사(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내용이 있다. “법조계에서는 최성준 춘천지법원장(2.13부 서울고법 부장판사 전보)에 대해 2012.2 現職(현직) 부임 후 관용차 私的(사적) 사용 등 부적절한 처신에다 올해 1월 대법관 후보 추천을 앞두고 언론 등에 대놓고 지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탈락 후에도 주변에 ‘양승태 대법원장이 9월 대법관 인선시 자신을 재차 배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어 눈총….”
조 전 사장은 “(이들 문서를)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일괄해서 홍경식 당시 민정수석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들 문서 상단에 파기 일자와 함께 ‘대외비’라고 적혔고, 중앙에는 ‘차’라는 문서 보안용 표시(워터마크)가 선명하다.
이에 대해 이용주 특위위원(국민의당)은 “김영한 전 민정수석 유품 가운데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한 문건에도 ‘차’라고 찍혀 나오는 워터마크가 있다. 아마도 (사법부 사찰 의혹 문건도) 국정원이 실제 작성 주체인 것이 맞다고 보여진다”고 말했다. 조 전 사장은 “삼권분립이 붕괴된 것이고, 헌정 질서를 유린한 것입니다. 명백한 국헌 문란”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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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정부가 국정원을 동원해 껄끄러운 사법부 인물들을 사찰하거나 이들을 제압한 방안을 마련한 정황이 최근 김영한 전 수석 업무일지에서 드러난 바 있다. 2014년 9월 업무일지에 “법원이 지나치게 강대·공룡화, 견제 수단 생길 때마다 길을 들이도록”이란 대목이 나온다. 김 전 수석의 또 다른 메모에는 대법관 후보 추천을 앞두고 “결국 사람이 문제 이번 기회 놓치면 검찰 몫은 향후 구득 난망” “법무부 짠 대로 진행되는 인상” 같은 말도 등장한다. 이같은 지시를 내린 사람이 대통령 박근혜일 수도 있고,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이나 김 전 민정수석 본인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을 동원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 “정보 수집, 경찰과 국정원에 팀을 구성하도록”이란 메모가 있다. ‘사법부 장악’ 시도에 국정원이나 경찰 정보 라인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드는 대목이다. 지난 12월9일 국회에서 통과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는 대통령 박근혜가 헌법 13개 조항(중복 포함)을 위배했다고 지적됐는데, 사법권이 법원에 속한다고 정한 헌법 제101조 위배 혐의를 추가해야 할 판이다.
전례없는 ‘정보기관의 대법원장 사찰 의혹’을 법조계는 “헌법 질서에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조 전 사장이 문건을 공개한 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논평을 내어 “법관 개인에 대한 위법한 사찰을 통해 사법부의 판결 결과까지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점이 분명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당사자 격인 대법원도 “양승태 대법원장이 ‘놀랄 일이고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반응을 보였다. 법관에 대한 일상적인 사찰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헌법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는 입장을 밝혔다.
법원, 유착 의혹 끊으려 노력해야그러나 법조계 내부에서는 법원이 정부나 국가 정보기관과의 유착 의혹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법원이 지난해 판사 임용 예정자들의 비밀면접을 국정원에 의뢰했고, 이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이 예비 법관들에게 ‘세월호 관련 견해’를 물어 사상검증을 했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이 국정원에 예비 법관들의 신원조사를 의뢰하도록 한 비밀보호규칙(제66조 1항) 때문이다. 법원 내부에서조차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란 비판이 나왔다.
헌정 사상 첫 ‘정당 해산 심판’인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결정을 정부가 사전에 알았다는 사실도 비슷한 맥락에서 지적된다. 김영한 전 수석의 업무일지 2014년 12월17일치에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을 뜻하는 ‘長’(장)이란 글자와 함께 ‘정당 해산 확정, 비례대표 의원직 상실’이라고 적혀 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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