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를 이탈한 자는 정말 자유로울까. 매일 순환하는 수도권 생활을 탈출해 바다 건너 제주도행을 감행한 30~40대 이주민들. 그들은 섬 속에서 또다시 먹고사는 문제(생계)와 사람들(커뮤니티)을 견뎌내야 했고, 생활의 ‘타성’과도 씨름해야 했다. 다만 그들은 ‘느리게 사는 법’을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한번 궤도를 이탈해본 자들이기에, 제주를 환승역 삼아 또 다른 궤도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힘도 느껴졌다.
2004년 6월, 에 세 여성의 ‘성공 스토리’가 실렸다. 서울 여의도 금융업계 출신 35살 고교 동창들이었다. 이들은 동양그룹 계열 금융사를 10여 년 다니다 그만두고, 김밥집과 샌드위치 가게를 성공적으로 창업했다. 기사 말미엔 그들이 그리는 40대 이후의 삶이 기록돼 있다. ‘제주도에서의 자연친화형 관광사업’.
2015년 2월, 그 가운데 한 명이 11년 만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했다. 서울 출신 정미자(47)씨다. 지난 10여 년간 그의 마음은 제주의 바다와 돌, 오름의 색으로 젖어 있었다. 지난 7월21일 오후 2시, 제주시 연동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겸 에어비앤비 숙박업소 ‘비아제주’에서 그는 쉴 새 없이 차와 빵을 나르고 있었다. 모든 일은 한 살 연상인 남편과 정씨 둘이 한다.
제주로 이주하기까지 준비 기간만 12년이었다. 2003~2004년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 공덕동과 연희동에 각각 김밥집과 샌드위치 가게를 연 건 순전히 ‘제주 이주’를 향한 꿈 때문이었다. 제주 가서 먹고살려면 뭐라도 기술이 있어야겠다 싶었다. 김밥과 샌드위치를 만들어 제주도에서 소풍 다니는 관광객에게 ‘런치박스’(도시락)를 판매할 생각이었다.
철저하고 신중하게 준비해야앞서 1999년 인도네시아 발리로 이주해 관광사업을 해보려다 사업 착수도 못하고 반년 만에 귀국했던 경험은 ‘쓴 약’이 되었다. 철저하고 신중한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기술만 가지곤 이주할 수 없었다. 이주에 회의적이던 남편을 설득해야 했고, 제주에서 살고 밥벌이할 수 있는 적합한 공간도 찾아야 했다. 그간 살던 관성과 인맥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전 직장 동료들은 따로 차린 회사로 그를 불러들였다.
그렇게 다시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2010년께부터 부동산 카페를 드나들며 제주 정보를 취합했다. 2012년께부턴 한 해 8번 가까이 제주로 내려가 집을 보러 다녔다. 2013년께 제주 김녕마을 바닷가 근처에 돌담집을 구했지만, 그곳으로 이주하진 못했다. “거기서 살 자신이 없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제주도로 이주할 때에도 조금 더 쾌적하고 조금 더 느리게 살자는 정도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돌담집을 팔고 마련한 집이 바로 지금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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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집을 보러 다니다보니, 제주 날씨가 생각했던 것처럼 화창하지만은 않았다. 소풍 갈 만한 장소는 많았지만, 비바람이 잦아 런치박스 판매가 잘될 것 같지 않았다. 애초의 사업 구상을 조금 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은 이주민에게 여러모로 진입 장벽이 낮은 카페와 숙박업이었다.
8가구가 살던 2층짜리 다세대주택을 매입해 전면 리모델링했다. 지하는 세를 놓고, 1층은 베이커리 카페와 살림집으로, 2층은 투숙객을 위한 방 4개로 개조했다. 땅값은 한창 오른 때여서 평당 500만원가량이었고, 집기를 제한 리모델링 비용만 2억5천만원 정도 들었다. 제주 땅값은 그 뒤로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16년 상반기 전국 땅값 상승률 1·2위는 제주 서귀포시(6.08%), 제주시(5.49%)가 차지했다.
정씨 부부는 평일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한다. 다음날 판매할 천연발효빵을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카페 서빙·청소, 숙소 정리를 하다보면 저녁 8시께 하루 일을 마친다.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할 때와 비교하면 오히려 노동시간은 하루 2~3시간 늘었다. 그래도 “고되지만 바쁘진 않다”.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란다.
정씨는 “회사생활은 끊임없이 회사의 문제가 숙제처럼 주어지고 그걸 해결해야 돈을 버는 부담감이 있지만, 여기선 오래 고되게 일해도 그런 게 없다”고 말했다. ‘놀 계획’이 많아서 자녀 계획은 없었다. 제주로 이주해서 처음으로 고양이와 같이 산다. 페르시안고양이 2마리는 그들에게 생긴 여유의 방증처럼 보였다. 수입은 서울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준이 못 되지만 다른 일 안 하고 빠듯하게 생활을 이어갈 정도는 된다고 한다. 애초부터 1년은 돈 벌 생각을 안 하기로 한 터라 그나마 고맙게 여기고 있다.
“수입 기대는 반 이하로 접어야”
제주 생활도, 생활은 생활이다.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하는 부부는 제주로 이주하기 전, 주말마다 다이빙할 생각에 들떴다. 하지만 제주 정착 1년6개월 동안 단 한 번 다이빙을 했다. 이제 막 시작한 가게 운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씨는 “제주로 온 초반에는 주말이 아까워서 여행하고 돌아다니고 했는데 어느 순간 집이 젤 좋았다. 요즘 주말엔 주로 부족한 잠을 잔다”고 말했다.
나름의 제동장치를 걸어두었다. 카페는 주 5일 영업하고, 숙소는 예약받지 않는 날을 따로 지정해 운영한다. 조만간 자리가 잡히면 1년에 한 달 정도는 휴업하고 외국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행지에 살아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숨통은 트고 살아야 생활에 지치지 않는다는 게 정씨 생각이다.
궤도를 이탈해본 자의 비결을 물었다. “첫 번째는 호기심이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커야 움직이고 변화할 용기를 낼 수 있다. 기존 생활에 대한 반대, 그로부터의 도피, 이런 게 아니다.” 그는 제주로 이주할 계획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곳에 대한 낭만만 가지고 반대급부를 많이 기대하면 정착하기 힘들다. 자연은 기대한 만큼 좋지만 수입 같은 생활 여건은 기대를 반 이하로 접고 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박건승(41)씨에게 제주는 마음속 파라다이스였다. 평소 물질과 해루질(어패류 채취)을 좋아했던 그에겐 제주에서라면 돈이 없어도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같은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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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직장생활 10년차, 한 회원제 골프장 총무과에서 근무한 그는 직장 동료들 사이의 이간질과 아귀다툼에 넌덜머리가 날 무렵, 아내와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오전, 김녕마을 앞바다에 수경만 끼고 다이빙을 했다. 방어 수십 마리가 바닷속에서 산란하고 떼지어 다니는 경이로운 광경을 보았다. 이듬해 그는 아내를 설득해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행을 준비했다.
최소한 빚이라도 갚고 떠나야 했다. 마침 서울 경동시장에서 장사할 자리가 났다. 그곳에서 식자재 도소매업을 하며 제주도 이주비용을 마련했다. 2년간 새벽 2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했다. 화물용 오토바이로 헬멧 쓸 겨를도 없이 겨울에 배달하다보면 양 귓불이 다 터졌다. 애초 장사 계획은 4~5년이었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제주로 이주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린 건 부족한 이주자금,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밑천에 보탰기에 이주할 수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2014년 7월 제주로 이주·정착한 주민 20대 이상 29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박씨처럼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싶어서’ 이주한 이들이 10명 중 3명(29.8%·87명)에 달했다. ‘제주의 자연에 매력을 느껴서’(20.9%·61명), ‘퇴직 뒤 새로운 정착지로 선택해서’(18.5%·54명)가 뒤를 이었다.
스스로 쉴 날을 결정할 수 있다박씨 부부는 2014년 11월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로 이주했다. 박씨가 목수일을 배워 직접 펜션을 짓고 운영할 생각이었다. 이주 초기엔 수입이 없어, 문화재 발굴하는 곳에서 땅을 파는 일당 7만2천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목수일은 일당 10만원부터 시작해 경험이 쌓일수록 조금씩 올랐다. 현재 중급 수준인 박씨는 일당 15만원 정도 받는다.
지난 7월20일 오후 4시, 박씨는 그가 운영하는 ‘오블리비아테’ 펜션 테라스에서 한창 파라솔을 만들고 있었다. 제주에선 바람에 천막 파라솔이 버티질 못했다. 바람이 통하고 썩지 않는 플라스틱 재질의 볏짚 원두막 모양 파라솔을 만들려던 참이었다. 그는 목수 2명만 불러 펜션을 함께 지었고, 틈날 때마다 펜션 인테리어와 추가 시설들을 만든다.
펜션은 그가 직접 일해 인건비를 줄여 총 2억5천만원 정도 들었다. 70여 평 부지를 평당 100만원가량에 샀다. 이곳 한림읍도 땅값이 1~2년 사이 부쩍 올랐다. 그는 땅값 오르는 게 마뜩잖다. 투자용으로 집과 땅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돈을 벌면 그만이지만, 여기 살 생각이라면, 땅을 더 사서 쓰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박씨 역시 텃밭을 가꾸고 싶지만 땅값 오름세가 걱정이다.
그는 펜션 운영을 하면서 목수일을 병행하고 있다. “목수일이 힘들긴 하지만, 목수일과 펜션일을 같이 하면 먹고사는 건 크게 걱정 없을 것 같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예전 회사생활이나 시장생활보다 훨씬 낫다고 그는 말한다. 스스로 쉴 날을 결정할 수 있고, 비 오는 날은 목수일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걱정은 있다. “딱 하나 안 좋은 점이 있다. 고정수입이 없어 돈의 압박감을 처음 느껴봤다. 여기도 삶이다. 도시처럼 먹고사는 생존의 삶.” 정착의 어려움을 단지 경제활동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제주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너무 힘들다. 스스로 어울리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수 있지만 제주말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마을 사람들과 얘기하면 ‘네, 네’만 하다가 대화가 끝난다. 목수 기술 안 배우고 펜션도 잘 안 되면 먹고사는 게 진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마을 공동체에 스며드는 문제는 또다시 경제적 문제로도 이어진다.
박씨의 꿈은 ‘해남’이다. 해녀가 아니라 해남. 하지만 외지인은 해남은 물론, 해녀로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게 제주 마을 어촌계의 문화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꿈은 잠시 접어두고, 그는 장기적으로 목조 공방을 만들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 이곳 마을도 너무 발전하면 한라산 가까이 사람 없는 곳으로 갈 계획이다. “앞으로 계속 제주도에 살고 싶지만, 생계나 다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게 된다면 전남 고흥으로 가고 싶다. 그곳도 바다와 산이 참 예쁘다.”
30대 이주 인구 30%제주를 동경해서 제주로 이주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어디론가 떠날 곳이 필요했고 그곳이 제주”였을 뿐인 이들도 있다. 부산 출신 조민준(32)씨가 그렇다.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올라가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다녔다. 정작 작가일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아카데미 동기 15명 정도가 하나둘 모두 그만뒀다. 일은 소모적이었고, “근근이 쥐어짜내는 생활”이었다.
근근이 버티면 버틸 수도 있는 생활이었지만,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말은 아직도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한숨 좀 그만 쉬어.” 서울 홍익대 앞 술집에서 서빙하며 방값과 생활비를 벌고 시청률에 맞춰 작가일을 기계적으로 해내는 생활을 더는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2011년께 친구에게 전해들은 전북 부안 변산공동체로 내려가 생활하기로 했다. 그곳은 자급자족과 생태농법을 지향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2년간 공동체의 의미를 찾아가며 생활하던 중 어느덧 지치기 시작했다. “그 생활을 빡빡하게 쫓아가다보니 몸이 지쳐 좋은 뜻도 잘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밭을 매고 잠자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서울 생활과는 다른 의미에서 정해진 틀에 맞춰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그곳을 떠나 2013년 5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다가, 우연히 변산공동체 지인들을 만났고, 그들은 그가 지낼 수 있는 농가주택을 마련해주었다. 제주도로 이주한 이들 중 상당수는 조씨처럼 30대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1~2015년 제주도 순유입(전입-전출) 인구 중 가장 많은 연령대가 30대로서, 전체 4만411명 중 1만2457명(30.8%)이다. 40대(23.7%)가 그 뒤를 잇는다.
조씨는 제주에서 지내며 목수 기술을 배웠다. 왠지 배워둬야 할 것 같았다. 농가주택에서 지내려면 배관·배수·미장 등의 일이 필요할 터였고, 내 집이 아니어도 마을 어딘가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나무 나르는 일조차 신났다. 하지만 제주 곳곳에 타운하우스와 펜션들이 들어서면서 시공사는 공사 일정을 빨리 끝내라고 재촉했다. 목수일로 “이곳 시골에서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한 달 200만원” 정도를 벌었지만 결국 일을 그만뒀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 7월20일 오전 10시30분, 조씨는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있는 한 콩밭에서 예초기로 잡초를 베고 있었다. 요즘은 보통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밭에서 일한다. 목수일을 그만둔 뒤, 지인에게 밭 2천 평을 빌려 그곳에 밭벼와 콩, 감자를 심었다. 얼마 전, 이주한 뒤로 처음 농산물을 수확했다. 감자 170여kg을 수확해 110kg 정도를 내다 팔았다. 감자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수입은 수십만원 정도. 그나마도 지인들이 서로서로 사준 덕분이었다.
그는 종종 아르바이트로 근처 다른 농장에 나가 천혜향 가시를 제거하거나 예초기를 돌린다. 생계를 위한 것이다. 조씨는 “농산물을 팔려고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농사짓기 위해 다른 농장 농사를 짓는다”고 말했다.
“집과 이웃에 애착 갖게 돼”그는 여가시간엔 희곡을 쓴다. 부산이나 서울에서 생활할 땐 집에 있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해 어디든 나가야 했다. 제주로 이주한 초기에만 해도 카페나 도서관을 전전하며 노트북을 펴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집에서 일하게 됐다. 여기서 만난 이주민 친구들도, 예전과 달리 농가주택이나 창고에서 글을 쓰거나 예술작품 만드는 일을 한다. 도시에선 집 밖에 나가야 생산성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강박이 이곳에 와 사라진 걸까. 그는 “그만큼 집과 이웃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점점 오르는 제주 땅값이 걱정이다. 현재 사는 집과 농사짓는 땅은 지인에게 값싸게 빌려쓰고 있는 터라, 언제 새로 땅과 집을 구해야 할지 모른다. 어느 날 농사지을 땅을 구경이나 할 심산으로 1억원에 내놓은 땅을 보러 갔더니, 땅 주인은 1억2천만원을 불렀다.
지역을 막론하고 제주 땅값은 기대심리가 높아져 있다. 그는 제주에서 집 짓고 평생 살 수 있을지 자신하진 못했다. 다만 “오래 쓸 수 있는 땅을 구해서 농사를 짓고 이곳에서 만난 이주민·토박이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뤄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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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 때문에 제주를 떠난 이주민도 있다. 서울 출신으로 제주를 거쳐 지금은 강원도 양양에 거주하는 오은영(43)씨 부부가 그렇다. 충북 영동에서 2천 평 규모의 땅을 빌려 포도밭을 일군 오씨 부부는 2013년 10월께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로 이주했다. 부부는 바다를 좋아해 바다 근처에서 농사지을 계획이었고, 마침 제주에 아는 동생 부부가 넉 달 먼저 내려와 있었다.
당시 이미 늘어난 펜션들에서 펜션 관리인을 구하는 붐이 일었고, 부부는 한 달 정도 그 일을 하면서 농사지을 땅을 알아보러 다녔다. 제주 땅값은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상황이었다. 땅값은 알아보는 중에도 쉼없이 뛰었다. 마을에 있는 값싼 땅은 평당 50만원 정도였고, 괜찮은 땅은 평당 150만원이었다.
오씨는 지난 7월22일 전화 통화에서 “제주가 서민들이 정착하기엔 발을 붙이고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과 이주민이 몰리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물가도 오르고 조용하던 곳들도 매력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만 2년간 남편이 목수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고, 결국 제주 생활을 정리했다.
전국에서 바다가 가까운 지역을 알아보던 중 강원도 양양에서 재정 상황에 맞는 땅을 찾았다. 그곳 땅 1500평에 올해 처음 들깨를 심었다. 그는 “땅값도 땅값이지만, 살아가는 힘을 유지하려면 함께 사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주변을 보고 삶을 많이 비교하게 되니 그렇다. 제주와 다르게 이곳 양양은 우리 부부와 비슷한 상황의 외지인 가정들이 주변에 있어 정착이 훨씬 수월했다”고 말했다.
제주를 떠났다가 다시 제주로 돌아올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와 의 작가 정다운·박두산 부부다. 정씨 부부는 2013년 9월 경기도 용인 수지에서 제주시 삼양동으로 이사했다. 각각 5년, 7년을 다닌 정보기술(IT)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왔다. 제주살이 기한을 정해두진 않았다. “‘평생 살 거야’ 하는 비장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단 한두 해 살아보자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냥, 가볍게, 동에서 동 이사하듯이 분당에서 용인으로 이사 가는 것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사랑하지만 고집하지 않는 제주제주로 이주한 뒤, 남편은 제주에 있는 IT 회사에 취업했다. 아내는 글을 쓰고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입은 예전 생활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저금할 수는 없었지만 사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두산 작가는 지난 7월27일 전화 통화에서 “서울에선 한 달 동안 정시 퇴근이 다섯 번 안팎이었는데 제주에선 동료들 역시 수도권에서 온 사람들인데도, 한 달간 전 직원을 합쳐 야근하는 경우가 10번 안팎이었다. 그런 취향이 있는 사람들이 제주로 오는 건지도 모르지만, 불충분한 대중교통과 자가 운전 때문에 밤늦게 회식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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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부부에게 제주는 “언제든 돌아오면 똑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평화로운 땅이었다. 한편으론 1년6개월 만에 제주 삶의 반복적 패턴이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에게 제주도는 안전하고 한적한 곳이어서 “인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론 같은 느낌을 주는 땅이다. 이렇게 끝나긴 아직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도 회사생활을 한 박두산 작가는 특히 더 그랬다.
그러던 차에 2014년 여름,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플랜비’라는 이름의 관광회사를 운영하는 남동생이 업체 운영을 대신 맡아줄 사람을 찾았다. 정씨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하여 부부는 2015년 5월 제주를 떠나 바로셀로나로 갔다. 그곳에서 회사를 운영하며 가이드일을 한다. 정씨는 틈이 나면 글을 쓰고, 박씨는 요리를 배우고 사진을 찍고 영상편집일을 한다. 애초 내년께 국내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없다. 정씨는 “한국에 가면 당연히 제주도로 가겠지만, 다른 나라로 가거나 스페인에 더 머물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에 정착했거나 정착해본 이주민들은 제주를 사랑하지만 제주를 고집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언제라도 제주를 환승지 삼아 옮겨다닐 수 있는 이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이 제주에 정착하고 있었다.
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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